한국 영화가 스크린 쿼터로 그 맥을 보호했다면, 공연도 공연장의 쿼터제를 통해 공연 예술가들의 창작권과 시장권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 젊은 창작자들이 공모를 통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몇 가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연습실 대관료, 극장 대관료, 그리고 식대. 밥값이야 뭐 도시락을 싸 다니던가 굶던가 하면 그만인데 연습실이나 극장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모으고 좋은 작품을 쓴다해도 그것을 연습하거나 발표할 최소한의 공간을 해결하지 못하면 젊은 창작자들은 다음 행보를 나갈 수 없다.
대규모 자본이 중심된 상업 프로덕션 시스템속에서 무명의 젊은 창작자들에게 부여되는 기회는 흔치않고, 설혹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은 특정 파트이지 전체가 아니다. 그리고 상업 자본은 그 수익의 안전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검증된 작품(라이선스 작품들이 대부분), 검증된 제작사와 창작자, 검증된 배우들에게 편중되고 그러한 자본의 위력을 앞세운 대형 작품들이 공공극장을 포함한 주요 극장에 쉴새없이 포진되니 새로운 순수 창작 작품이 공연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몇몇 지원제도와 공모제가 있지만, 공모제의 경우 상업제작사와 창작 개인간의 구별 없이 진행되고, 지원제도 역시 작품 자체 심사보다는 페이퍼 작업에서 1차로 걸러지기 때문에 경험이나 인력, 전문성이 부족한 창작자들에게는 천재가 아니고선, 설령 천재일지라도 요건에 요함을 충족한 눈에 띄는 페이퍼 제작 신공이 없이는 뚫기 어려운 관문들일 뿐이다.
공공극장은 국민과 지역민의 세금으로 설립, 운영되고 있는 만큼 극장 자체의 수익사업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문턱을 낮춰 한다. 지원제도와 공모제의 경우도 개인과 제작사를 구분해 평가 해야 한다. 공공극장의 경우 1년의 한 분기는, 또는 분기당 한 시기는 극장 상주 단체를 제외한 지역 또는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품이 공연될 수 있는 기간을 확보해야하고 창작 기간동안의 연습실과 극장 대관료를 상업극의 절반수준으로, 또는 그 이하로 인하하여 창작자들의 활로를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등록된 공연장 수가 많아도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연장은 없다. 대학로나 민간의 소극장은 그나마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중·대형 극장은 도전할 의욕조차 갖지 못한다. 그나마 예전에는 국립극단에서라도 대형 연극을 제작하고, 각 시·도극단에서는 상주하고 있는 공연장의 대극장을 활용하여 대형 창작 연극, 무용, 가무극을 시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요원하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관련 전공 후배들이 도전할 수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젊은 피들이 모여 그들이 느낀 세상을 말 할 수 있는 공연장 배분이 필요하다.
정책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적인 사업이 아닐 지라도, 각 시도의 지방 정부에서라도, 그들의 관할 구역에 국민과 지역민의 세금으로 세운 겉이 화려한 공연장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내 주어야 한다. 독일의 부퍼탈이 피나 바우쉬라는 젊은 안무가에게 극장을 내주어 탄츠 테아터(Tanz Theater)를 만들어 낸 것처럼, 러시아의 상 페테르 부르크가 레프 도진이라는 젊은 연출가에게 그들의 공공 극장을 내 주었던 것처럼, 이제 갓 졸업해 피끓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지역의 공공극장을 내 줄 때, 진정한 문화강국으로서의 토대와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공연은 산업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문화이고 예술이다. 매대에 놓인 다 만들어진 상품을 레토르트 음식처럼 구매자가 사와 공연장에 넣고 끓여 되 파는 작업은 그 나라 공연의 다양성과 시장의 확대를 가져올 수 없다. 또는 검증되고 가성비 좋은 나라밖의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고 OEM으로 생산된 제품을 풀어놓으며 영역의 확대, 시장의 발전이라는 논리를 앞세우기만 해서도 안된다. 국립 단체는 자국의 연출가와 배우, 가수(오페라), 무용수, 연출가, 안무가를 주역으로 육성하고, 시도 단체는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 육성하여 민간이 그러한 결과를 자신의 매대로 가져갈 때, 우리의 공연 시장도 산업으로서의 순기능과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난 어떤 면에서 분명, 혜택을 받았다. 대학에서도 그랬고, 사회에서도 그랬다. 난, 그 혜택을 통해 때로 부역하며, 때로 싸워가며 일의 시작은 했다. 그런데, 후배들은, 나보다 훨씬 재능있고 천재적인 이름없는 누군가들은 부역할 기회도, 싸워 볼 기회마저도 점점 갖지 못한다. 공모와 지원은, 대본 평가나 악보 평가로 온전할 수없다. 기획서 몇장과 듣기 좋은 말로는 그 예술가의 원천적 생각과 발전 가능성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나도 그렇고 내 선배들도 그렇고, 선험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생각들을 선발하고, 누락시킬 권한도 없다. 공공 극장을 열어라. 젊은 예술가들의 졸업공연, 졸업 연주를 찾아가라. 그들에게 극장에서 단 하루라도 자신들의 작품을 선 보일 수 있도록 앞 길을 비켜라. 맘마미아를 내려서라도, 위키드를 내려서라도, 하루만,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에게 극장을 내 주어라. 그리고 꾸준해라. 그러기를 5년, 10년, 성과지표에 목 걸지 말고, 육성과 도전에 목을 걸어라.
공공극장이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시민들에게, 극장을 찾는 누구나에게 서비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돈 없어도 공연 볼 수 있고, 돈 없어도 공연 할 수 있는 곳. 8천원짜리 커피팔고, 만 오천원짜리 밥 팔고, 백만원짜리 연주복 파는 곳이 아닌, 시민 누구나 극장을 찾아갈 수 있는 곳. 극장에 갈 때 커피 마실 돈 없어 주눅들지 않고, 밥 먹을 돈 없어 배 곯지 않는 곳. 적어도 공공 극장이면 그리해야 되지 않을까. 뭐가 그렇게 어려워. 그게. 진짜 돈은 버는 사람들이 따로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