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 늘 고민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버겁다. 자유롭고 싶다. 또 행복하고 싶다. 써야 할 것도 많고, 쓰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이 모든 것은 일상이고 내 지금이다. 하지만 어디 그것만 있을까. 마음 가득한 번민들, 하나만 생각하기에는 그 담을 그릇이 작아 자꾸만 여러 곳을 튀어 나가는 또 다른 번민들은 나의 지금을 이곳에도 저곳에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다. 사실 번민은 내 삶 가운데 늘 존재했고, 때론 벗 삼아, 때론 극복해야 할 상대 삼아 나를 발전시켰다. 지금까지의 것은 그렇게 감당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종류도 간단했고, 양도 적었다. 그런데 지금의 것은, 종류도 많고 양도 많아 걷잡을 수 없는 데다 이것이 자꾸만 자가 증식하여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무력화시킨다. 그래서 지난 몇 주간 몸무게는 약 6kg 정도 빠져나갔고 피부에는 트버블이 생겼으며 생체리듬도 심각하게 훼손됐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은, 감성적인 아픔은 물리적인 아픔을 동반한다는 것.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감성적인 어리광이 아니라 실제로 위와 심장에 타격을 주어 혈관 수축, 이상 위액 분비, 심박 불균형, 호흡 곤란, 식도 수축, 잇몸 염증을 동반했고, 이것은 이뇨 및 배변 작용과 음식 섭취 등 여러 형태의 동시다발적인 신진대사에 영향을 주어 하루의 삶을 매일, 무너뜨렸다.
준비하고 진행하던 모든 작업과 일들이 멈췄다. 그래도 삶을 진행해야 하기에 계획된 회의나 연습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진행했지만, 창조적 활동 에너지를 내 안에서 생성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눈을 떴어도, 길을 걷고 있어도 혈관 수축으로 인한 심박의 불균형으로 인해 나를 온전히 부여잡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나를 오랜 시간 관찰해 오던, 나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은 나의 그런 기운을 감지해 염려했고, 그들의 염려를 인지했음에도 내 몸과 정신의 기운은 온전히 서 있지 못했다.
서른네 살, 한 아이의 아빠, 6년간의 결혼 생활, 직업 연출가, 스마트 폰 유저, 흡연가, 기독교 신자, 목사가 된 아버지의 아들,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를 받는 아들, 나를 돕고 사랑하는 너무나 훌륭한 아내의 남편, 예술 고등학교의 시간 강사, 대출은 받았지만, 방 3개 화장실 2개의 집을 아내와 공동명의로 소유하고 있는 집 주인, 몇 개의 적금과 보험을 가진 고객, 태국의 한 아이를 매달 4만 5천원으로 양육하는 영친, 최근 극단을 만들어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 중인 단원, 또 그 밖의 무엇, 무엇, 무엇들… 이게 나다. 나를 유지하는 내 밖의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나일까…………
귀찮다. 모든 것이. 나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내 삶이 귀찮다. 나를 유지하는 내 밖의 모습들을 사랑하지만, 그 안에 내가 보이지 않아 두렵다. 나를 만나고 싶다. 이 도시와 사회가 옳다고 가르쳐온 삶의 기준들을 떠나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내가 노래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걷고, 보고, 노래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은, 그런 행동들은 정말 나쁜 것이란다. 무책임한 것이란다. 죄악이란다. 그리고 그 모든 정죄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다 그러고 살아. 모두가.’ 그래, 그렇겠지. 좋아, 다 그러고 산다고 치자. 그럼 그게 잘된 세상인가? 그럼 그게 옳은 세상인가? 정말 미친 세상이 아닐까? 그리고 난 왜 갑자기 세상 기준으로 미쳐 버린 거지?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더욱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내 밖의 내 모습을. 어딘가를 걷고 싶다. 무언가를 쓰고 싶다. 무언가를 먹고 싶고, 죄의식과 불안함 없이 며칠이고 실컷 잠을 자고 싶다. 또 한동안 생각을 멈추고 싶고, 아무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고 싶고, 살고 싶다. 건강히 기쁨으로, 나 살고 싶다.
마음의 감기가 조금 독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그 감기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와의 싸움이 조금 더 깊어진 것뿐일 수도 있다. 눈 한번 감으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사회적 나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미, 난, 이제, 평범하게 살긴 틀렸다. 내가 내 안을 너무 깊이 들여다봤고, 나로서의 나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잔 브라흐마의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보면 호주의 어느 건장한 수도승의 일화가 등장한다. 건강과 수영에 자신 있던 이 수도승은 호주의 어느 지역을 수도 여행하던 중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를 만나고 그 바다에 취해 무작정 뛰어든다. 하지만 그 바다는 조류가 강하여 수영이 금지되어 있던 곳임을 그는 몰랐다. 뭍으로 나오기 위해 온몸의 힘을 써 헤엄을 쳤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순간 그는 모든 것을 놓았다. 그리고 조류에 떠밀려 뭍으로부터 저 멀리 밀려 나갔다. 그곳에 도착하니 더 이상 그를 밀어내는, 그와 싸우는 조류가 없더란다. 그래서 그는 다시 헤엄치기 시작했고,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그때까지 비축되었던 그의 마지막 힘이 그를 뭍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일화는 전했다.
나는 지금 싸우고 있다. 조류가 거세고 강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조류의 근원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힘이 빠지지, 당연히. 그러니 살도 빠지고 집중력도 빠져나가고 있지. 나를 내려 놀 때가 가까웠다. 지금까지 나로서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냥 나를 내려놔야겠다. 죽지 않을 것이다. 살아 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 또 다른 나를 죽여야만 한다. 그냥 내려놔야만 한다. 어디로 얼마나 떠밀려 내려갈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미 떠밀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택은 하나. 앞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리느냐, 이 떠밀림이 멈출 때까지. 조바심 내지 말자. 두려워도 말자. 내 선택은 이미 시작되었다. 죽어야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