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46
두려움 1 / 2012~ 2013년 즈음
지금 브로드웨이에서는 <원스>가 뮤지컬로 올라 호평이다. 들여다보았다. 포스터만 보고 난 울었다. 기타 줄이 풀려 영어로 ‘once'가 검정 바탕에 하얀 글씨로 적혀 있는데, 그 포스터에서 풍기는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내게 깊이 느껴졌다. 그들의 공연 모습을 짧게 편집한 동영상을 봤다. 모든 배우가 악기를 연주하며 그들의 노래를 부르는데, 난 또 울었다. 작품 자체도 훌륭하지만, 정말 속이 상했던 것은, 그들이 만들면 세계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 시스템과 작품에 쏟아붓는 그들의 믿음과 노력이 부럽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다 자본과 관계되어 있어 망하면 여러 명 죽을 수 있지만, 최고의 예술가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교육하고 만들어 내며, 무대 안과 밖의 그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작품에 걸맞은 다양한 인종과 나이가 다른 배우들의 다양한 경험과 능력,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새로운 작품에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프로듀서들, 그리고 선택 후 그들을 존중하는 그들의 태도가 내겐 부러웠고, 짜증이 났다.
우리나라에는 협력연출이라는 것이 있다. 이게 뭐냐면, 이런 <원스> 같은 작품이 라이선스 형태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국 배우들로 공연이 올라갈 때, 그 초연을 외국 예술가들이 와서 만든다. 그러면 통역과 함께 협력연출은 미군정 시절처럼 외국 연출가의 의도와 생각을 한국 배우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이 떠나면 작품을 모니터 하며 완성도를 유지한다. 그러다 그 공연이 살아남아 재연하게 될 때, 한국 초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초연과 꼭 같이 재현해 내는 일이 그 역할이다. 난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통해 그러한 작업을 경험했다. 얼마나 짜증 나는지 모른다. 또 요즘은 대형 창작 작품을 만들 때도 한국 프로듀서가 투자를 통해 돈을 대고, 외국 작가, 작곡가에게 창작을 의뢰하기도 한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한국에서 초연할 때, 우리 작품이고 우리나라에서 세계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외국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연출, 안무 등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도 역시 우리 토종 예술가들은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프로덕션에 속하게 되어 위의 설명한 협력으로서의 업무를, 맡게 된다. 뭐야 이게… 우리 연출가들이 큰 자본의 대형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협력연출이 아니고서는 힘든 구조다.
물론 배우는 것이 많다. 미국에 가지 않고도, 영국에 가지 않고도 그들의 작업 시스템을 유학하듯 배울 수 있고, 그들의 생각과 방식을 온전히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공부의 기회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예술적 가치와 생각들은 모두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말처럼 서로 협력하여 서로의 생각들을 교류,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소통을 흡수해야 하는 것. 어떤 말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것, 하고 싶은 말 하려고 예술하는데, 물론 상업 자본 속에 일한다 해도 이게 뭐야. 그래서 난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원스>가 들어오고 그 할아버지가 들어와도 협력 연출하라면 난 안 할 거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 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좁고 적다. 창작 초연, 또는 작은 규모의 라이선스 한국 초연이 아니면 맡을 작품이 없다. 그리고 예술적 가치와 능력을 존중해 주지 않는 프로덕션과는 함께 일 할 수 없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프로듀서들과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프로듀서의 노력과 마음을 100% 존중하지만 그러한 조건들 속에서는 창작행위를 이루어 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욱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강렬해지고, 좋은 소재를 찾고 싶은 열망이 내겐 가득하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도 그것이 그저 개인의 나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작품과 연계해서 생각하고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내게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그 문제 안에 내가 놓여있다.
삶과 일이 구분되어있지 못하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에게도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대할 때처럼 같은 긴장과 같은 강도로 말을 할 때가 많음을 느꼈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대할 때도 그들의 준비와 그 익숙해 짐의 대한 시간을 배려하지 않고 내가 본 것들을,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먼저 요구하고 말할 때가 더 많음을 고백한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무언가에 홀려있는 것, 무언가에 미쳐 사는 것, 조금 있으면 불혹이 된다는 불안감과 이대로 살아가다가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내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일의 방법이 변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내게 크고 강해 매일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매일 같은 생각과 그 생각의 발전만을 위해 내가 이러고 있다. 이것이 지나갈 수 있을까. 설령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저 앞에 이루어 낸다 해도 내가 목마르지 않아 하고, 배고프지 않아 할 수 있을까. 내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