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47

대물림 / 2012년 ~ 2013년 즈음

by Pia Jong Seok Lee

아빠 배고파요, 소리에 눈을 떴더니 아내는 이미 출근했고, 소파 위에는 줄리가 내 품속 깊숙이 코를 묻고는 한 손에 자동차, 다른 손에 도둑 게임 인형 든 루민에게 그 자리 뺏기지 않으려 잠든 척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학교 연습은 아직 젊은 기운에 열과 정을 다하다 보면 금세 열 두시를 넘고 새벽 서너 시가 넘어야 아이들을 찜질방에 보내야 할 때가 많다. 누가 시켜서거나 돈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 나이 때 날 위해 애써주셨던 몇몇 선생님들의 그림자가 감사와 헌신으로 대물림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도 다섯 시가 조금 너머 소파에 몸이 꺼지다 보니 해가 뜬지도 아내가 출근했는지도, 루가 내 곁에 왔는지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씨리얼 먹을래? 고개 끄덕이는 루를 안고 식탁 의자에 앉혀 아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두 개의 씨리얼을 배합해주고, 그 김에 나도 우유를 마셨다. 숲 유치원 가야 하는데.. 꼭꼭 씹는 야문 입 사이로 루가 뱉은 말을 들으니 오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는 숲 유치원 프로그램에 가는 날이었음이 기억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지각. 매주 한 번씩 숲에서 한 나절을 보내는 이 프로그램은 난 한 번도 참여해 본 적 없지만 도시에서 성장하는 아이가 주기적으로 자연과 만날 수 있기에 내심 좋아했고 어린이집의 훌륭한 선택을 응원하고 있었다. 루가 그릇을 비우자마자, 어떻게 가는지 알고 있니? 묻자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숲복으로 갈아입히고 난 세수도 안 한 채 모자 하나 눌러쓰고 아이와 함께 차를 탔다.


오른쪽으로 나가서 왼쪽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쭈욱 가다가 다시 왼쪽 가면 부처님 나오고 거기서 오돌도돌 길을 쭉 가면 돼요! 루의 알 수 없는 정확한 설명에 오른쪽 왼쪽, 또 오른쪽을 쭉 가보니 정말 부처님이 나왔고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애들이 이길 오돌도돌 길을 좋아해요! 오돌도돌 길. 이전에도 몇 번인가 루의 입에서 들었는데 그 뜻이 비포장 도로임을 난 오늘 처음 알았다. 길 끝에서 차를 세우자 루가 앞장섰다. 길 양옆의 거미, 풀, 농장들을 루는 내게 익숙히 가리키며 설명했다. 산에 오르는 내내 루는 내 손을 잡지 않았고 씩씩하게 앞장서며 아이들 소리가 울리는 저 먼 곳으로 걸어갔다. “어머! 루민이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의 반가운 맞이에 난 테러라도 당한 듯 서둘러 허리 굽혀 인사했고 그 무리로 루가 달리기 전 힘껏 끌어안았다. “아빠는 루민이를 별만큼 사랑해. 뽀뽀.” 마음 밭은 이미 제 친구들에게 가 있는 루는 아빠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아 주었고 뽀뽀를 마친 후 제 친구들을 향해 냅다 뛰었다. 그러더니 멈춰 서서 날 돌아봤다. 손 키스를 보내자 루도 웃으며 내게 손키스를 보냈고 다시 제 마음 밭을 향해 냅다 뛰었다. 루가 아이들에게 묻혔다.


난 걸음을 돌려 아들과 오르던 그 길을 홀로 내려왔다. 자꾸 눈물이 흘렀다, 아무 일 없었는데. 오래전 내 어머니가 골목에서건 지하철에서건 날 두고 앞장서 가실 때, 아니 최근에도 식사라도 하고 헤어질라면 엄마는 걷다가 뒤돌아 날 보고 또 걷다가 뒤돌아 날 쳐다보셨다.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엄마는 다 큰 아들을 뒤돌아보셨다. 오늘 내가 그랬다. 내가 루를 뒤에 두고 걷다가 멈춰 돌아보고 또 걷다가 뒤 돌아보고 아이가 보이지 않음에도 난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자꾸 흘렀다. 내 어머니도 그때 그러셨구나. 선생으로의 대물림이, 부모로서의 대물림이 지금 내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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