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취해 살고 있음을 인정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졸업하고 학전에 들어갔을 때는 연출로서의 일을 하고 싶어 안달했고,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 다리 인대 두 번 늘어나 그곳을 박차고 나왔을 때는 작은 작품이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작업했다.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고 그다음 날 오후까지 리허설을 진행해도 난 만족했고,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아도 연출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작품을 선택하고 가리기보다는 기회가 주어지는 모든 것을 난 잡고 움켜쥐었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해가 거듭할수록 성장했고, 만들게 되는 편수도 처음에 비하면 대단히 늘어났고, 삶의 질도 높아졌다. 지금의 내 모습은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상상하기 힘든 발전이다. 학전 나오고 처음으로 만들었던 작품이 내 돈 이백만 원과 연극원 동료들, 전통예술원 동료들이 몸과 마음, 물질로 힘껏 도왔던, 그 힘으로 몹시도 추운 겨울에 혜화동 1번지 소극장을 2주 대관해 올렸던, 내 자작극 <마인필드>였으니 그 규모나 가치를 따지면 말할 수 없는 발전이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난 그러면 될 줄 알았다. 큰 극장에 작품을 올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연출로서 인정받고, 다음 작품이 예정되어 있고, 내가 만드는 작품들이 한번쯤 이름 들어봤음직한 그런 작품들이고, 작게라도 그 일들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면 난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지금 난, 7년 전 그때와 심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배 주리고 마르다.
아내는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그녀가 쉴 곳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공간을 살지만 정말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의 삶이 최악이라고 내게 말한다. 그래서 내게 상처를 주고 싶다고도 하고 헤어지자고도 내게 여러 번 말했다. 한걸음 물러서지 않고도 아내가 말하는 그 모든 말의 속 뜻을 난 이해할 수 있다. 차라리 학전을 박차고 나왔을 때, 처음 <마인필드>를 올리고 <가면 라이더> 시리즈를 올릴 때의 우리가 더 좋았다. 지금보다 훨씬 불투명하고 돈 없을 때 우리는 더 가까웠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한 문제고, 그 문제를 풀 사람도 나임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나 스스로 그 문제를 풀지 못한다. 어디 아내뿐이겠는가, 부모님, 함께 5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조연출들에게도 요즘 내 모습은 달갑지 못하다. 그들에게 짜증만 내고, 그들 마음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그들의 삶과 고민에 가까이 있지 않다. 매일 한 공간에서 12시간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료들임에도 나는 내 깊은 속을 그들에게 보이지 않고, 그들도 내게 그들의 깊은 마음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 역시 내 문제다.
난 친구가 없다. 사적으로 만나는 단 한 사람도 내겐 없다. 집에 가다 누군가 강렬히 보고 싶어 전화해 만나고 술 마시고, 삶에 대한 수다 떨고 나눌 사람이 내겐 없다. 아주 가끔, 어떤 시즌에 함께 작업을 하는 동료와 아주 가끔 그럴 때가 있지만, 그 특별한 순간과 관계를 제외하면 마음 편히 삶과 대화를 나눌 친구가 내겐 없다. 그것도 내 문제다.
내 문제, 그래. 내게 있는 문제는 그렇다. 난 무언가 취해있다. 그 불안한 취함 속에 내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되도 않는 아주 많은 음악들을 듣고 부르고, 되도 않는 당대 최고의 외국 작품들을 사이트로 경험하고, 그런 작품들을 못하고 있음에 마음에 북북 줄을 긋는다.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과 생각들은 아직 이 땅에서 마음껏 펴 보이지 못했다. <청 이야기>가 그래도 그러한 펴 보임에 근접했기에 그 작품을 다시 올리고 싶은 집착이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내가 속한 이곳에 두 다리를 붙이지 못하고 계속 떠돈다. 배우들이야 그 생명의 빛과 속도가 빠르고 강렬하기에 그들의 노력과 실력을 통해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다음 걸음들을 내 딛기 용이하지만, 나와 같은 연출들은 그다음 걸음 내 딛기가 쉽지 않다. 그다음 걸음을 내 딛기 위해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의 모든 일을 완벽히 해야 함을 잘 알기에, 매 순간 맡게 되는 작품과 작업에 최선을 다하지만, 왜 이리 내 마음에 그 모든 것들이 안 차는지 괴롭다. 교만과 두려움, 그것이 주는 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