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일기 54
빛을 알기에 / <풍월주>와 <김종욱 찾기>, 동경 아뮤즈에서
일본에 와있다. 동경에 있는 아뮤즈 씨어터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일부터 뮤지컬 <김종욱 찾기>가 우리말로 공연된다. 아뮤즈 씨어터는 올 한 해, 대학로의 여러 창작 공연들을 길게는 한 달, 짧게는 삼주정도 초청을 해서 벌써 여섯 편의 우리 공연을 올렸다. 특별한 스타가 없어도 오직 작품과 배우들의 힘만으로, 그리고 아뮤즈의 기획력으로 일본관객과 1년을 만났다. 그 1년의 마지막 공연으로 <김종욱 찾기>가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실은 지난 토요일에 뮤지컬 <풍월주>를 올렸다. 늘 그랬지만, 부족한 시간과 예산 안에서 작업을 했고, 믿을 수 없는 셋업 일정과 진행 속에서 첫 프리뷰를 무사히 마쳤다. 만족스러웠다. 이 작품을 맡을 때 예상 했던 것은, 이번이 재연이기 때문에 공연 초반에 관객들의 저항이 거셀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2010년에 <쓰릴미>를 올릴 때도 약 3주간 거센 저항이 있었고, 그 저항은 연출인 내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이어져 자살을 생각해 볼 만큼 마음에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시작 전 제작사와 이 재연에 대한 관객 저항 부분을 예상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프리뷰 기간에는 그 저항에 내가 대응할 수 있도록 작품에 힘을 실어달라고 부탁했었다. 이번 공연은 극단 연우무대와 CJ E&M이 함께 공동제작했다. 계약은 늘 그랬듯 CJ가 아닌 연우와 했다. 나는 계약 당시 연우와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눴고, 작가와 함께 대본 수정 및 구조부터 고치기 시작했다.
<풍월주> 초연을 봤을 때 작품은 내겐, 재미있는 뮤지컬은 아니었다. 작품이 좋다고들 하지만, 인물 간의 개연성과 전사가 부족했고, 장면 상황에 대한 에너지는 높았으나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추진력은 약했다. 초연 대본을 받아보고 나는, 먼저 인물의 관계를 분명히 만들고, 작품 전체가 100분 동안 쉴틈 없는 추진력으로 끝까지 질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작가와 작곡가도 이러한 내 의견과 노력에 큰 거부 없이 함께 애썼고, 서로의 마음이 맞아 충돌이나 불편 없이 대본의 방향과 연출안이 만들어졌다. 공연까지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미술 스태프들이 소집됐고, 짧은 시간 동안 내 생각을 전하고 그들의 생각을 조율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이 일을 해본 사람만 아는 믿기 힘든 스케줄 속에서 나와 스태프들은, 셋업과 프리뷰까지 모든 과정을 일사천리로 이뤄냈다.
이 작품에서 난, 인물들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의 표현 미학으로 심리적 관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 평행적 배치들도 시각화했다. 즉 인물의 신분에 따른 외적 관계는 수직적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는 인간 본성이기에 인물의 움직임과 무대 미술의 배치를 평행하게 배치했다. 그래서 사담과 열의 관계, 열과 진성의 관계가 평행 속의 긴장과 애틋함으로 만들었고, 그들 주변의 모든 인물들도 기능적 활용이 아닌 개인의 분명한 목표를 지닌 각각의 역사를 가진 인물로 만들어 서로의 관계와 장면의 개연성을 높였다.
프리뷰 첫날은 전쟁 같던 바로 전날에 비해 여유 있었다. 셋업 날짜가 하루 줄어들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 속에서 내가 쓸 수 있는 극장 리허설 중 하루를 버려야 했다. 극장에서의 하루란 일상에서의 일주일과 같이 귀하고 큰 시간이다. 배우들의 무대 배치를 위한 스페이싱, 전체 기술파트와 배우들의 유니티, 그리고 장면의 기술적, 미학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테크니컬 리허설의 시간들이 반 이상 잘려나갔다. 3시간 내에 스페이싱을 끝내고 6시간 내에 테크를 끝내고, 남은 세 시간에 드레스, 제네럴 리허설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했다, 그 모든 걸, 그 시간 안에. 그걸 하기 위해 밤을 새야 했다. 조명을 메모리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테크 때는 디자이너와 큐만 만들어 가메모리를 해놓고, 밤새 디자이너와 세부큐와 디테일을 만들었다. 약 48시간을 꼬박 극장에 갇혀 쉼 없이 밤과 낮의 분간 없이 프리뷰를 준비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과 일정이 특별한 경우는 아니다. 프로덕션의 상황에 따라 종종 있는 겪었고, 그래서 하루나 잘려 나갔을 때 짜증은 났지만 두렵지 않았다.
프리뷰가 시작 됐을 때, 기뻤다. 배우들은 나와의 약속을 정확히 지켰다. 피곤과 싸우는 스태프들은 긴장 속에서 각자의 큐들을 정확히 진행했다. 공연이 끝나갈 때 나는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다. ‘됐다, 성공했다. 이 공연, 살아남을 수 있다… 아주 잘.’ 로비에서 만난 연우 대표와 끌어안고 서로의 수고와 믿음에 대한 기쁨을 나눴고, 배우들, 스태프들을 격려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오랜만에 편히 잤다. 하지만, 눈을 뜨고 맞이한 다음날 아침은 어제와 달랐다. 저항이 시작됐다. 예상했던 그대로 저항은 거샜고, 이곳저곳에서의 전화와 미팅 요청은 어제의 확신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극장에 갔다. 연우는 담담히 담아내고 있었지만, CJ는 불안해했다. 이해했다, 대중극을 만들어야 하고 티켓 세일즈가 중요한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내게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 부분이었다. 프리뷰 기간 중 관객 반응을 살피고, 그들의 반응에 따라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찾았다면 작품은 충분히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럴 준비도 되어있고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또 어디까지를 지켜야 하는지의 기준은 연출인 내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도 많은 얘기가 쏟아져 들어오니 그 기준이 단 하루 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준. 그 기준을 바로 세워야 했다. 귀를 닫았다.
턴 테이블과 음향, 커튼콜과 안무 등이 가장 큰 이슈였다.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것부터 순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바꾸겠다는 이유는, 나도 처음 본 이 작품이, 나도 무대에서 온전히 처음 본 이 작품이 첫 계획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의도처럼 표현되지 않는지를 판단해야 했는데, 단 한 번의 공연을 보고 결정하기에는 일렀다. 관객들 저항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의 핵을 알아야 하는데, 내가 알기까지의 시간이 부족했다. 프로듀서들에게 말했다. 흔들리지 말자고. 버릴 것은 버리고 발전시킬 것은 발전시킬 것인데, 그 시간이 필요하다고. 프리뷰 다음날은 2회의 공연이었다. 음향 사고도 있었지만, 공연은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무대적 환경과 조합, 유니티 속에서 버리고 지켜야 할 것들이. 한 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모든 문제들을 한 번에 수정해 본공연 첫날 투입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관객들의 저항을 그 한 주간 감내해야 하지만, 조금씩 수정하는 것은 배우들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연출인 나를 향한 인신공격이 포함된 저항을 이겨내야 했다. 그래도 경험이 있던지라 이번에는 자살까지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는 누르기 쉽지 않았다.
마음이 산란하던 차에, 3회까지 프리뷰를 올리고 일본으로 떠나왔다. 떠나오는 순간까지 무대감독, 안무, 조연출에게 당장 하루 쉬고 시작되는 4회 공연부터의 수정 보완점을 일러두고, 본 공연 전까지 우리가 정리해야 할 사안들이 무엇인지를 전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고쳐버리고 싶었지만, 내 스스로와의 대화가 필요했고, 변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의 분명한 기준을 다시 정리해야 했기에 한주를 참기로 했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일본 스케줄이 금요일까지 있기에 자의든 타의든 그 안에는 손댈 수 없다. 일본에 도착해서 이곳의 일정 때문에 생각을 비웠다. 화장실이나 숙소에 가서만 <풍월주>의 대처를 생각했고, 하루의 온 시간은 <김종욱>의 완성도를 위해 노력했다. 극장 환경변화와 부족한 연습은 이곳도 마음을 편케 하지 못하는 요인이었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배우가 그대로 왔다면 극장 환경 변화에만 신경 쓰면 되는데, 남자 배우 1명의 새로운 투입과 그 배우의 일정으로 인한 충분치 못한 연습은 연극적, 음악적 미학의 완성도보다 3명의 배우 조합, 앙상블, 큐가 먼저로 인식하게 했고, 간신히 그것들을 맞춰 공연을 준비했다. 테크 시간도 늘 그랬듯 6시간이 안된다. 여기도 거기도, 편치 않다.
<풍월주>에 대한 계획은 섰다. 이곳의 <김종욱>의 대한 대책도 실은 있다. 답은 늘 내 안에 있다.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할 것 없이, 아무런 변명 없이 내 안의 답과 솔직히 마주하고, 그 답을 온전히 무대에 올려 내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결과를 담담히, 당당히, 책임지는 것. 늘 그랬지만, 직업 연출가로서 그것이 지금 나에게 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