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인간은 같을 지도 모른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고 통칭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고고한 존재를 다른 유기체들과 구분 짓던 '창조성'이라는 소도가, 인간이 만들어 낸 무언가에 의해 격침당하고 있기에.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근간을 이루던-혹은 이룬다고 생각되던-창조성이라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는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AI보다 우월한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만 하는 결정의 순간에 도달했다.
'AI는 주어진 데이터를 벗어나는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낼 수 없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인간과 AI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과연 인간은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 지성을 가지고 있을까.
AI도, 인간도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학습하며 성장하는 존재이다. 인간 또한 AI와 다를 바 없이 외부에서 정보가 주입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예를 들어, 한 인간이 태어나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고 가정해 보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을까?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외부에서 정보가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공간은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물'이라는 물질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하다못해 물레방아라는 도구를 생각해 낼 수 있을까. 외부에서 특정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특정 정보에 대해 아무것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구분하는 '창조'의 영역은 결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며, 배우지 않은 것 이상의 결과물을 창조해 낼 수 없다. 소위 창조성이라 불리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 간의 결합을 통해 특정 정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 내리고 있는 창조성이라는 게 무엇일까? 본질적 의미의 창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창조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걸까? 학창 시절에 배운 '경우의 수'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전 한 개가 만들어 내는 정보의 경우의 수는 두 개이다. 하지만 동전을 한번 더 던진다면, 만들어 내는 정보의 경우의 수는 4개가 된다. 그리고 한번 더 같은 동전을 던진다면 8개가 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며 '달라 보일 뿐인 정보'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같은 정보이나, 정보가 누적되며 다른 시점과 다른 관점에서 조명되며 다른 정보로 인식되는 셈이다.
선사시대 이후 인류가 지속적으로 행해온 진리에 대한 탐구 또한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 '물'이라는 물질은 항상 동일하게 존재해 왔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현재에 '물'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고, 과학화 시대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같은 시대일지라도 동양과 서양에서 다르게 정의했다. '물'이라는 물질과 정보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양과 서양에서 다를 리가 없음에도 근본적으로 같은 정보를 두고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진리라는 하나의 정보를 두고 정보를 둘러싼 환경(다른 정보와의 결합 방식 등)이 변화하며 정보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되고 정보가 창조된다고 믿어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흔히 생각되는 창조성은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정보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정보를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서 AI와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AI는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행해온 창조의 과정을 이행할 수 있을까? 정보의 결합을 통해 새로워 보이는 정보를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인류 역사상 존재해 왔던 그 누구보다 많이 정보를 습득하고, 정보 간의 연결성을 구성할 능력을 가진 AI야말로 오히려 인간 만의 가치인 창조성을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선보일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테다.
인류의 역사는 환경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나가면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월성을 상징하고, 다른 종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창조성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정의에는 창조성이라는 가치가 저변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AI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어떤 종도 따라오지 못했던 인간의 '정보의 결합능력'(창조성이라고 흔히 여겨졌던)을 따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었기에 인간과 그 어떤 종보다 유사하며, 창조성의 특정 영역에서는 인간보다 우월한 것이 AI다. 창조성과 인간이라는 정의를 침범하는 존재가 등장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 어떤 종보다 우월하고 그 어떤 종도 인간을 넘볼 수 없던 시대가 종말을 맞이했다. 애초에 인간이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기 위해 만든 게 AI인데, 두뇌로 정의되던 종이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우리는 우월하지 않고, 우리는 어쩌면 열등한 존재일 지도 모른다. 이것이 AI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결코 태초부터 동일하지 않았다. 하나의 예시로 산업혁명, 혹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유럽 대륙에서 살아가던 인간은 신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인간은 신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고 신이 만든 세상과 신이 정한 규칙 내에서 살아가던 존재였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종을 정의 내리는 건 창조성이 아니라 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신이 준-혹은 성직자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정보에서 벗어나 진리라는 정보를 자신들의 의지로 추구하기 시작하며 세계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며 이전 시대에서 신이 지정해 준 행동 이외의 새로운 행동을 행하기 시작하며 정보와 정보가 마주치고 정보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인간은 신의 자식이라는 정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신들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그 결과가 창조성이라는 가치이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다시 한번 인간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이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들의 대한 정의를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무수하게 변화시켜 왔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정의가 변화하면서 인간은 진화해 왔다. 가끔은 퇴화하기도 했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인간은 자신들을 새로이 규정짓고, 자신들을 우월한 존재로 합리화시키고 격상시킬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과거의 인간의 정의에 묶여있는 듯 보인다.
그렇기에 AI와 인간은 같을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