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과 AI
20세기, 경영학이라는 학문을 빛냈던 피터 드러커 교수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즉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직 내의 어떠한 한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23년 현재 피터 드러커 교수의 예언은 정보화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은 듯하다. Chat GPT를 위시로 한 AI의 발전은 1등조차 쫓아내려 하고 있다. 과거의 나마저 넘어서는 것, AI시대가 말하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다.
1. 노동자가 곧 기업이다
2. 정보화 사회에서는 1등만이 가치 있다
3. 어제의 나 또한 경쟁자
4. 대부분의 인간은 가치가 없게 될까?
드러커 교수는 현대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의 노동자는 칼 마르크스의 정의에서 벗어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곧 생산수단이다. 헨리 포드로 대표되는 기계의 부품으로 기능하는 노동자를 벗어나 자기 자신이 하나의 기계가 되는, 바야흐로 '지식 노동자'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그렇기에 프로페셔널은 지식이라는 독립적인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즉 '이 작품이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만이 프로페셔널이다.
기업의 수명은 경쟁사 대비 생산수단이 우위를 가질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현실은 완전경쟁시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효율적이며 생산적인 기업이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진리이다. 역사적으로 경쟁우위의 원천은 토지에서 노동으로, 노동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에서 근로자의 생산성으로 변화해 왔다.
과거 서양의 봉건제든 동양의 토호제(혹은 관료제)든 그 조직의 힘은 근본적으로는 토지의 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생산수단인 토지의 질이 좋으면 그만큼 더 많은 인구를 보유할 수 있고, 더 많은 군사력을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시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 당시 각 다이묘(영주)들의 권력관계를 쌀 몇 석(보유한 토지의 농업생산량)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농업사회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지식이 곧 생산수단이다. 그리고 예전의 영주들이 더 좋은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현대의 기업은 질 좋은 지식을 갖춘 노동자(생산수단)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각종 복지나 인센티브 등을 통한 공격적인 헤드헌팅이 잦아지고,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근속기간이 짧아진 건 이러한 기업들의 노력에서 비롯한다. 특히 질 좋은 노동자의 공급이 부족한 신생분야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접어들며 개발자 연봉이 천정부지로 상승했던 시기가 좋은 예시이다.
한편 반대로 얘기하면 기업이 원하는 급의 지식을 갖추지 못 한 노동자는 가차 없이 버려진다. 과거 생산성이 낮은 농토는 황무지로 두거나 범죄자들을 보내 개간하도록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앞서 이야기한 개발자들의 상황이 그렇다. 토스 같은 신생 디지털 기업들이 인력 / 복지 감축에 나서고 있는 건 경기침체와 기준금리인상으로 투자자금 모금이 힘들어진 것뿐만 아니라 원하는 급의 가치 있는 지식(인력)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후에 보다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개발자들이 만들어 낸 AI가 발전해 나갈수록 AI는 점점 더 개발자 본인들을 대체할 수 있도록 성장한다. 결과적으로 AI가 제공하는 생산력 이상의 가치 있는 개발자의 수가 감소하는 것이다.
지식은 복사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 이걸 본격적으로 심화시킨 것은 정보화혁명이었다. 물론 정보화혁명 이전에도 누군가의 지식을 통해 만들어 낸 조직 내 최고 스펙의 상품만이 가치있었던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정보화혁명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심화되었다.
단적인 예시로 교육제도를 들 수 있다. 정보화혁명 이전에는 질 좋은 교육은 대면으로만 가능했다. 그렇기에 각 교육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교육자라는 직업과 우후죽순 널린 학원들이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보화혁명이 우리의 생활 속에 차근차근 녹아들기 시작하며 '전국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가장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강사들로 무장된 인터넷 강의 등 온라인 교육업체들이 급성장하며, 반대급부로 학원에 대한 수요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지식으로 만들어 낸 산출물의 복사가 물리적인 실체를 넘어서서 무형의 가치까지 가능하게 됨으로써 1등이 아닌 존재들의 삶은 더욱 버거워졌다. 다시 말해 1등이 가진 지식을 전파할 수 있는 한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심지어 규모의 경제라는 생산의 원리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1등의 지식을 쉽고 싸게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등이 아닌 지식과 노동자들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Winner takes all, 슈퍼스타의 경제학, 적자생존 등등... 정보화혁명으로 사회가 연결되고 거대해질수록 승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의 프로페셔널이 100명 중의 1등을 의미했다면, 현대의 프로페셔널은 100만 명 중의 1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앞서 개발자 시장의 예시를 말하며 AI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 개발자들의 어려움을 언급했었다. 거칠게 말하면, AI는 데이터화된 인간의 지식들을 모아 최적화된 지식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다. AI의 발전은 인간과 인간 간의 경쟁이 아닌 또 다른 경쟁을 창조해 냈다. 인간과 데이터화된 거대한 지식군집 간의 싸움이다.
컴퓨터 그 자체가 지식노동자화 되고, 모든 것이 데이터화가 가능한 사회가 되면서 1등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어제의 내가 1등이었다고 해도 AI는 바로 다음 날 나의 지식을 흡수해서 적어도 나의 지식과 동등한 산출물(일반적으로는 그 이상의)을 만들어낼 수 있다. 100만, 아니 1억 명 중의 1등이라 해도 더 이상 어제의 자신보다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 가치 있는 노동자가 아니게 된 셈이다.
Chat GPT(Open AI)의 B2B 사업을 들여다보자. 기존의 Chat GPT는 기밀 유출의 문제가 있어 각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기존의 Chat GPT와 분리된 개별 기업 만의 평행우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기존의 우주와는 기업 자체의 기밀 정보가 아닌 그 정보를 통해 만들어진 명령어와 결과만을 주고받기에 기밀 유출에 대한 우려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기업의 평행우주에는 기업의 정보를 자유롭게 저장할 수 있기에, 모든 기업은 자신들의 분야와 시스템에 특화된 '나만을 위한' Chat GPT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Chat GPT가 가진 기존의 단점은 보편적인 정보에 대한 결과값 산출에는 능했으나 반대로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특수한 정보와 관련된 결과값 산출에는 미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안성의 강화로 개별 기업 만의 Chat GPT를 생성할 수 있게 되어 이를 사용하고 데이터를 축적시키다 보면 이러한 단점조차 마침내 해결가능한 문제가 되었다.
기업의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기업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으며, 야근수당조차 요구하지 않는 지식노동자가 탄생한 셈이다. 그리고 이 지식노동자는 기업에 속한 각 분야 1등들의 지식을 1분 뒤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어제의 나와 경쟁해서 이기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예정이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생산수단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수십 년 간 지식노동의 사회를 거치며 생존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 AI라는 궁극의 지식생명체로 귀결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앞으로 그 어떤 인간도 피터 드러커가 이야기한 프로페셔널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지식처리능력은 AI에 비해 한계가 뚜렷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피터 드러커가 말한 세상 속에서만 살지는 않는다. 피터 드러커가 제시한 가치 있는 인간상 또한 막스 베버의 관료제 사회와 유사한 사회 기반 위에서 성립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조직화된, 관료제 사회에서만 사는 건 아니기에 프로페셔널이 되지 못한다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인간은 효용, 즉 행복을 위해 산다. 그리고 돈은 아마도 가장 보편적이고 확실하게 효용을 제공해 주는 수단이다. 그렇기에 조직과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돈 그 자체로는 효용을 얻지 않는다. 돈을 통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에 돈이 행복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그 돈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당신 명의의 은행 계좌에 1조 원이 예치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보다 행복하긴 힘들다(나도 그렇다). 하지만 이 계좌를 이용하여 돈을 인출하거나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그 어떤 물질적인 가치도 획득할 수 없다면? 1조 원 자체는 효용을 가지지 않는다.
경제학에서 '상품의 다양성에서 오는 효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쌀 1kg가 더 많은 칼로리를 제공하지만, 쌀 200g과 함께 먹는 고기 200g이 더 행복할 때도 있다는 얘기다. 돈이 많으면 쌀 1kg와 고기 1kg를 모두 살 수 있긴 하나(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 지 생각해 보자 라는 슬픈 말이 떠오른다), 어쨌거나 단순히 나라는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돈의 단위만이 반드시 효용(행복)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 수 있다.
플랫폼 경제와 AI의 발전은 쓸모 있는 노동자, 프로페셔널의 범주를 극도로 좁힌다. 이렇게 한 사람이라는 생산수단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시대에 다다르면서 그에 따라 당연히 빈부격차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돈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삶을 바라본다면 우리 모두는 불행해질 것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이들보다 돈이 많은 건 무조건 좋지만, 그것만이 행복을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
항상 수요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수탉의 울음소리가 알람이던 시절에 굳이 알람시계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보다 현대적인 예시로, 음식을 카메라 앞에서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려는 수요자가 이렇게 많을 줄 백 년 전의 누가 예상했을까. 한 사람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건 보편적인 기준에서 부족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인 건 맞다. 하지만 자신이 강한 전장에서의 능력을 키우고 이를 세일즈하다 보면 새로운 시장이 열릴 때도 있는 법이다. 인류의 문명은 시장을 세분화하고, 새로운 시장인 것처럼 포장하면서 발전해 왔다.
또한 AI가 사람보다 똑똑한 건 맞지만 AI 스스로가 무언가를 수요하진 않는다. 오직 사람이 원하는 것만이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사람은 현재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가치, 다시말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 또한 수요한다. 앞서 말한 다양성에서 오는 효용, 즉 단지 새로움에서 오는 효용이 좋은 예시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시장을 새롭게 만들어낼 것이다.
경운기가 생겼다고 농부였던 사람들이 업데이트 후의 게임 캐릭터처럼 싹 다 소멸한 건 아니었다. 당장의 변화는 아프지만 변화된 상태가 곧 다시 표준으로 자리 잡기 마련이다. 지식노동자로서의 인간은 점점 쇠퇴해 가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할 예정이다. 인간들은 다시금 무엇인가의 프로페셔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