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내가 신입생 입학 상담을 했을 때의 일이다. 신입생 지원부에 '김소예'라는 이름을 가진 분께 전화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던 선생님 N이 짐짓 놀라는 눈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나에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한다.
선생님 N : 김소예 이 분 XX 살쯤 되고, AA동에 사신다고 하지 않던가요? 글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시고요.
나 :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선생님 N : 그게... 그분 예전에 우리 야학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야학에 다닌 적 있다는 말씀은 안 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나 :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거예요? 우리 야학에 다닌 적이 있다는 말은 없으셨어요. 혹시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평소 무던한 선생님 N의 호들갑이 의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예씨는 요주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부디 조심해야 하고, 학생이 만약 수업을 듣더라도 편의를 챙겨주지 말고 원칙대로 대하라고 일러주었다.
선생님 N과 소예 씨는 과거 한글반 사제지간이었다. 당시 한글반은 운영이 쉽지 않았다. 학생들의 낮은 학습의지와 부족한 선생님을 이유로 학급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맡아줄 선생님이 부족하니 한글반을 없애는 쪽으로 선생님들이 의견을 모았으나, 이를 강하게 반대한 사람이 선생님 N이었다. 그는 한글반은 어려움이 있더라고 운영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다.
선생님 N은 가장 한글반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나, 그랬기 때문에 학생들이 가장 싫어했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한글반의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학생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자신의 사연을 늘어놓고 이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N에게 통할 리가 없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런 경우 '어머 그러셨구나' 라며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감정동요가 잘 없는 선생님 N에게는 '또 핑계를 늘어놓는구나.'라고 들릴 뿐.
그런 선생님 N과 가장 마찰이 많았던 학생이 소예 씨였다. 한글반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 소예 씨였다고 한다. 선생님들의 증언에 따르면 술기운이 있는 상태로 수업을 들은 적도 있고, 말투도 거칠었다. 마음이 약한 선생님들은 차마 크게 그녀를 나무라지 못했지만, 선생님 N은 사람들의 기분을 살피는 편이 아니다. 문제점이 보이면 지적하고 넘어가야 했다.
선생님 N의 노력에도 결국 한글반은 문을 닫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한글반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도 선생님 N의 역할이었다. 결자해지. 한글반에 대한 큰 책임감만큼, 그의 손으로 한글반을 없애야 했다. 선생님 N은 수업시간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N : 벌써 학기말이네요. 아쉽게도 다음 학기부터 우리 반은 없어집니다. 수업해 드릴 선생님들이 부족해서요. 이제 초등반으로 올라가거나, 다른 기관에서 한글을 공부해 주세요.
소예 : 아니, 선생님. 우리 반이 왜 없어져요?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학생들을 오지 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학생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소예 씨가 여론을 주도했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글반 폐지의 원흉으로는 선생님 N이 지목되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학생들을 자주 나무라던 선생님이고, 학급을 폐지한다는 소식도 그를 통해 들었으니 자연스러운 의심이다. 선생님 N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없어졌을 반인데, 오히려 선생님 N이 욕을 먹는 상황.
선생님 N의 마지막 수업날, 소예 씨는 조용히 넘어가기에는 분함이 가시지 않았나 보다. 선생님과 이색적인 작별인사를 나눴다.
"나는 사실 선생님이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알고 계셨죠?"
봉사활동은 보람을 빼면 시체다. 나의 정성이 외면받을 때의 좌절감은 밥벌이에서보다 더 짖다. 선생님 N처럼 남다른 공을 들인 사람이 받는 충격은 더 클 것이다. 당연히 야학에서도 내 노력이 허무해짐을 가끔 느낀다. 소설을 한 달째 열을 내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눈빛이 영 이상한 거다. 내 수업이 머릿속에 흡수되지 않고 허공에서 둥둥 떠있는 분위기가 교실에 감돌았다. 불안한 마음에 학생 한 명씩 붙잡고 얘기를 해보고서야 알았다. 학생들은 시와 소설을 구별할 줄도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학생들에게 소설 작품을 접근하는 법을 알려주는 게 의미가 없음을. 한 달 동안 쓴 내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나.
타인의 인정은 강력하고 즉각적인 보상이다. 하지만 내 뜻대로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그럴 때는 나 스스로 일궈낸 열매를 맛봐야 한다.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는 나는 잘 아니깐.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나는 알고 있으니깐.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이만큼 했음에 성취감을 느끼려고 해 본다. 그러다 보면 의외의 수확도 따라온다. 드디어 남들도 내 진가를 알아줄지도 모른다. 이제는 학생들이 글의 장르를 척척 찾아낸다. 똑같은 말을 다섯 번째 했을 때, 학생의 머릿속에 지식이 쏙 들어가는 게 내 눈에 보일 때! 그간의 노력에 이자까지 붙여서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요즘도 가끔 선생님 N은 한글반 재건을 상상한다. 전화로 학생 상담이 많이 오는데, 한글을 배우고 싶다는 어르신들이 많다는 거다. 선생님 N의 신념은 아직 유효해 보인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남들이 몰라줘도 내 할 일을 하자. 내가 옳다고 여기는 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상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