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by 김룰루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제주행 티켓을 구매한 건 출발 이틀 전이었다. 오래전부터 올레길을 다시 걷고 싶었다. 하지만 제주는 우선순위에서 쉽게 밀리곤 했다. 일정이 길면 해외로 가고 싶고, 일정이 짧으면 집과 가까운 육지가 더 좋다. 제주가 분명 좋긴 하지만, 몇 년 동안 가지 않았던 올레길이 마음에 밟히지만, 세상에는 아직 가지 못한 곳이 너무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이번 여행을 제주로 정한 건 순전히 올레길에서 열리는 행사 때문이었다. 올레여행자센터에서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님과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해니의 강연이 있었다. 20년 전, 당시 기자였던 서명숙 씨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한국은 워커홀릭에 미친 나라야. 당신의 나라야말로 산티아고 길이 긴급히 필요해. 너는 고국에 돌아가 이 길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길에서 만났던 해니라는 영국 여성과의 대화는 서명숙 씨에게 여생의 숙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네 주민들을 설득하고, 곡괭이를 들고 끊어진 길을 이었다. 그 결과는 여러분도 이미 알다시피 대 성공적이었다. 전국에 걷기 열풍이 불었다. 유사한 도보길이 만들어졌고, 일본과 몽골에 '올레' 브랜드 라이선스와 관리 노하우를 수출까지 했다.


그녀가 눈부신 결과를 만들어 나가는 동안, 정작 그녀에게 길 만들길 권유했던 해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종이에 적어뒀던 연락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발 해니를 누가 좀 찾아주세요' 라고 부탁하던 그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년이 긴 시간이긴 한가보다. 그 사이 AI라는 놈이 태어났고, 해니의 사진을 AI에 넣어서 그녀를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내가 제주에 가는 날, 그녀와 해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토크가 열린다고 했다.


어렵사리 토요일 아침 비행기를 잡았다. 그리고 강연을 신청하려 하는데, 그사이 매진이 되었다. 강연을 들으려고 제주행 티켓을 급하게 산 건데, 강연을 보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일단 제주로 간다. 강연이 열리는 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하고, 분주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직원에게 '오늘 강연 서서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입에서 맴도는데, 너무 분주한 그녀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체면 때문인지, 아쉬운 소리를 하기 겸연쩍어서 그런지, 그 말을 삼켰다. 다음 기회가 있겠지. 다음에는 꼭 강연을 보자마자 신청을 해야겠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오늘 부고가 올라왔다. 서명숙 이사장님의 별세소식이다. 내가 강연을 놓친 게 불과 50일도 되지 않았다. 난 왜 기다려 줄거라 생각했을까. 어째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강연 시간에 불쑥 가서 '신청 못했는데 뒤에 서서 조용히 들어도 될까요?'라고 넉살 좋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다음이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겼을까.


시간에게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기 일쑤다. 잠 못 드는 밤, 비자발적인 회의시간, 달갑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까지. 괴로운 순간은 시간이 영원할 듯 나를 속인다. 그러다 문득 늘어난 흰머리, 눈가 주름을 보고는 또 내가 세월에게 당했음을 알게 된다. 영원한 건 없음을,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도 당연한 게 아님을.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겠다. 미루지 말고. 여한이 없도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출처 : 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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