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피노 컬렉션, Tatiana Trouvé 타티아나 트루베 전시
인간은 태어나면서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수많은 '것들'에는 사물을 포함, 어떠한 상황을 뜻하기도 하며 생각이나 개념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인간으로 마주하는 내외면의 모든 세계를 '어느 것'이라 정의한다면, 타티아나 트루베에게는 모든 단위들, 그러니까 작은 물건부터 시공간의 단위까지를 포괄한다. 즉 인간을 포함한 담요, 의자, 신발 같은 물질적 단위부터, 개인적 기억, 일련의 사건, 꿈, 역사 등과 같은 비물질적 단위까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순서에 상관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건물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로비 바닥을 가득 채운 맨홀 뚜껑들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다양한 도시의 맨홀 뚜껑들과 지하설비 덮개들을 아스팔트에 결합하여 모두가 걷는 '길'을 재현하였는데 이는 전시의 서막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맨홀 뚜껑 아래 지하에서 흐르는 물길들은 다양한 경로로 흘러들어와 지하수를 이룬다. 작가는 이러한 현상을 전 세계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융합하는 도시 베네치아, 그리고 그 물의 도시에 유입되는 수많은 물길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위층으로 올라가 0층인 로비를 내려다보면 맨홀 뚜껑들이 별자리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별지도의 형태를 띤다. 다른 언어와 모양, 크기로 구성된 맨홀 뚜껑들이 만들어낸 별지도는 다양성을 융합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만, 국가 같이 합리적으로 조직된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을 갖는다.
이 비합리성은 전시 전반에 걸쳐 전개된다. 개인적 기억부터 공적인 사건까지 다양한 모티브들이 작품을 이루기도 하고 이치와는 다르게 사용된 재료들이 작품의 개념을 심화시킨다.
두 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석고보드가 방 하나를 가로지른다. 제목은 '밤의 이야기, 2023년 6월 30일'.
2023년 6월 27일 파리 근교 낭테르에서 북아프리카계 17세 소년이 프랑스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다. 이후 과잉진압 및 공권력 오남용 논란으로 경찰을 규탄하는 시위가 프랑스 전역으로 번지게 된다. 이 시위로 인한 피해는 1조 원에 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폭력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작품은 전국적 시위가 계속되었던 6월 30일,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몽트뢰유에서의 시위를 포착한다. 시위에서 불타버린 쓰레기통과 진열장, 녹은 플라스틱, 깨진 유리 등을 확대하여 아크릴 석고와 알루미늄, 황마로 재현했다. 그날 밤의 기억은 불타 녹아버렸지만 하얀 석고보드에 재탄생되어 폭력의 그림자와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분노가 사회적 상처가 되어버린 현실을 조명한다.
타티아나의 기억은 다른 형태로도 존재한다.
작가가 지난 40년간 오고 간 - 다카, 도쿄, 뉴욕, 베이징, 베네치아 등 - 도시의 거리, 숲 속, 바닷가 등을 거닐며 수집한 주인을 잃은 사물들을 청동, 황동, 강철, 알루미늄으로 주조하고 채색하여 목걸이 형태로 엮어 조각으로 만들었다. 라이터, 조개, 꽃, 담배꽁초, 가위 등과 같이 누군가의 개인적 기억이 담겨있는 사물들이 전혀 다른 재료로 재탄생하였다.
개인적 의미를 지닌 물건들이었지만 주조되고 채색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의미 중립 상태인 '물건' 그 자체로서 재탄생하여 관객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지만 작품으로 전시되어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상기시키며 사물과 인간이라는 관계의 순환을 보여준다.
'수호자들'이라는 작품이 눈길을 끈다. 의자 위 누군가가 두고 간 사물들의 집합체로 이들 역시 대리석, 오닉스, 청동, 황동 등으로 조각되고 주조되어 새로 만들어졌다. 연작으로 전시 공간 곳곳에 다른 작품들과 함께 설치되어 마치 전시장 지킴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태프의 의자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던 작품이다. 반복되는 의자와 오브제들의 결합을 알아채고는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는데,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구성으로 기억에 남았다.
앞서 보았던 작품들처럼 '수호자들' 또한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는 사물들의 컨디션을 통해서만 암시할 뿐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수호자의 의자에는 파리 코뮌의 아이콘인 루이스 미셸의 회고록이 놓여 있다. 아나키즘 혁명가이자 간호사, 교육자,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사회개혁을 향한 저항정신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베개와 쿠션이 그들이 가진 부드러움과는 정 반대되는 무겁고 단단한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곁에 머무른다.
또 다른 수호자들의 의자에는 여러 책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어슐러 르 귄의 '세상의 끝에서 춤추다', 조르조 아감벤의 '님프' 그리고 제인 구달의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 놓여 있다. 자연과학, 공상과학, 인류학과 생태계를 비롯한 윤리적인 삶 등을 다루는 책들은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부서지기 쉬운 재료가 아닌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세상을 위한 신념으로서 자리한다. 조용히 작품을 지키는 수호자로서도 존재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불을 바닥에 깔고 종이판을 세워 만든 임시 대피소. 이름 모를 재난이나 큰 변화를 겪어낸 이들이 만든 임시 구조물들은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구조물들은 알루미늄과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종이판과 나뭇가지 모두 주조된 것이다. 어쩌면 제일 연약한 공간을 강한 재료로 재탄생시켜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인간의 흔적과 사용감이 느껴지는 임시 공간은 불특정다수의 어떠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트루베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으로, 각 작품들이 특정 공간이나 사건을 만들어낸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작가는 작품에 사용된 대리석이나 청동이 다른 재료들과 마찬가지로 변하는 성질임을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화되거나 침식되는 재료를 사용해 끊임없이 이동과 움직임을 반복하는 인간이 사물과 맺는 순환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원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드로잉/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각, 설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몇 작품은 '기억을 잃은 사람들' 시리즈의 일부로 주로 색연필이나 검은 연필로 그리고 채색한 작품들이다. 몽환적인 얼룩과 색 번짐은 덧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종이를 표백액에 담가 얻은 결과이다. 번쩍이거나 희미한 빛, 구름 같은 색과 형태는 꿈이나 기억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선명하면서도 모호한 느낌을 재현한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태는 부재한다. 다만 인간이 존재했을 법한 공간들을 언급함으로써 여전히 '것들'과 인간의 관계를 탐색한다.
총 30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전시는 작품들 간의 일종의 생태계(ecosystem)를 구축한다.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드로잉과 조각의 공간적, 재료적 한계를 구분 짓지 않고 유기적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 생태계는 인간을 둘러싼 현실/비현실, 내적/외적 세계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시간적 공간을 여러 것들로 증언한다.
전시의 이탈리아 제목은 La strana vita delle cose, 영어 제목은 The strange life of things이다. Le cose와 things를 한국어로 해석할 때 단순히 물건이나 사물로 해석하기에는 작품들이 말하는 비물질적인 것들까지 포함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 '어떠한 것들'로 기준점을 잡고 전시를 해석해 나갔다. 인간이 관계 맺는 물질적/비물질적인 모든 것이 어떠한 '것'이라면, 우주적 관점에서 모든 관계를 내려다보았을 때 인간도 하나의 사물, 그러니까 어떤 것에 지나지 않을까.
(전시는 2026년 1월 4일까지 피노 컬렉션 베네치아의 팔라초 그라씨Palazzo Grassi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