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내외 통틀어 대략 46점만 존재한다는 고려시대 불화인 <수월관음도>가 처음 공개되었다. 학창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한 기업가가 우리나라 공공 박물관에 수월관음도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수소문 끝에 일본에 있던 수월관음도를 25억원에 구입,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했던 것이다.
“수월관음도를 만난 것이 운명 같다”던 기증자의 말처럼,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7백여 년의 세월 동안 타국을 떠돌다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증받은 수월관음도 91x43cm(좌) 보물 제1426호 수월관음도(우)
고려시대인 14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수월관음도>는 불교경전 <화엄경>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형상을 묘사한 불화다. 특히 고려시대 불화 중에서 색감, 구도, 묘사력이 뛰어나 고려불화의 백미로도 일컬어진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달빛이 비치는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미소를 띤 관음보살은 후광으로 둘러싸여 반가부좌 하고 있고, 금빛의 얇은 무늬로 장식된 투명한 비단옷를 두르고 있다. 관음보살 앞에는 아주 작게 묘사된 선재동자가 지혜를 구하고 있으며, 왼쪽 중간에는 정병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수월관음도>의 일반적인 구도다.
그림에 등장하는 관음보살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중생들의 어려움을 자비로서 구제하기 위해, 눈과 손을 천 개나 가진 보살이다. 1천 개의 눈과 손을 가진 이유는 어려움에 처한 한 명의 중생이라도 더 보살피기 위함이라.
관음보살에 <수월관음>이란 이름이 붙은 까닭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세상의 맑은 물에 비치는 것처럼, 관음보살은 어둠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한 가닥 빛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그림의 화려함만큼이나, 부처의 가르침을 밝은 달빛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사상이 들어간 그림은 동양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오늘 미술 이야기는 서양미술 속에 나타난 불교 이야기다.
반 고흐는 불교의 수도승이 되고 싶었을까?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폴 고갱이 한 집에 살면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 무렵 반 고흐는 고갱에게 아를에서 같이 작업하기를 권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예술 공동체를 꿈꾸며, 호기롭게 자신과 고갱을 예술혼을 불태우며, 고행의 길을 가는 수도승에 비유했다.
“친애하는 벗 고갱에게,
내가 얼마 전 아를에 방 네 개짜리 집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소. 남부에서 작업할 마음이 있고, 수도승처럼 살아갈 화가를 찾게 된다면, 아주 기쁠 겁니다.”
이 편지를 시작으로 그들은 서로의 자화상을 교환하며,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고, 의지와 경쟁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자화상을 먼저 보낸 쪽은 고갱이었다. 고갱은 자신의 처지를 어려움에 처한 장발장에 비유하며, 제목을 <레미제라블>이라고 붙인 자화상을 고흐에게 보낸다.
폴고갱,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454x55cm, 1888
자화상에는 고갱의 의지가 느껴진다.
강렬한 눈빛과 어금니를 다문듯한 입, 원근감을 무시한 대담한 평면성, 우측 하단에 보이는 '레미제라블, 빈센트, 고갱'이라는 사인. 그리고 우측 상단의 인물은 고흐, 고갱 두 사람과 우정을 나누었던 작가이자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의 얼굴이다.
고갱의 자화상을 받은 반 고흐는 1888년 고갱에게 헌정하는 자화상을 보낸다. 그가 죽기 2년 전의 일이다.
고흐, 자화상(폴 고갱에게 헌정), 캔버스에 유채, 61.5x50.3cm, 1888
고갱에게 헌정된 고흐의 자화상은 그의 다른 자화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전체적인 느낌은 말끔하고, 영적이다. 머리와 턱수염을 깎은 마른 모습의 군더더기 없는 얼굴과 단정하게 입은 파란색 테두리가 있는 갈색 코트. 갈색이지만 보라색의 기운을 불어넣어 단정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배경이다.
머리의 그림자도 없이 두껍게 칠해진 밝은 하늘 같은 푸른 배경색은 성인들의 후광처럼 동심원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동심원 같은 배경색은 머리 주변에서는 밝게 시작하여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마치 불교의 수도승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고갱에게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자화상에서, 나 자신의 개성과 인상파의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으며, 영원한 부처의 단순한 숭배자로 자화상을 생각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을 부처님을 숭배하는 수도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행의 수도승처럼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인상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술에 대한 열정에 따라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운명이었으며, 그는 고행의 길을 가는 수도승이었던 것이다. 반 고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많이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끊임없는 고뇌와 번뇌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 고갱은 고흐를 애도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불교적 표현으로 위로하고 있다.
“지금 죽는 것은 큰 행복인데, 그 까닭은 고통을 끝내고, 다른 삶으로 돌아간다면, 부처님의 법에 따라 세상에서 그가 훌륭한 행동의 열매를 수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폴 고갱은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
'폴 고갱은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그의 작품세계와 인생을 살펴보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든든한 직장인으로 증권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이후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고갱은 결혼과 동시에 부인의 고향인 코펜하겐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서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생활고와 불화로 1885년에는 6살 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1888년 혹독한 가난을 경험하던 고갱은 고흐의 제안으로 아를에서 고흐가 같이 지내게 되는데, 이마저도 둘 사이의 의견차로 헤어지게 된다. 이 무렵 빈곤과 고독, 그리고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현실은 그에게 가장 혹독한 시간이었다. 이 혹독한 시간에 그는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폴 고갱, 실크에 유채, 니르바나, 20x29cm,1890
위의 그림에서 고갱은 불교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그 자신이 겪는 고뇌를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니르바나, 야곱 마이어 드 한의 초상화'(Nirvana, Portrait of Jacob Meyer de Haan)다.
마이어 드 한(Meyer de Haan)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로, 한때 고갱과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던 동료이자 제자다. 그는 마이어 드 한의 초상화에 의도적으로 불교적인 명칭인 <니르바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니르바나는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고 차 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감을 뜻하는데, 현실에서는 크게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입적하는 <열반>이다.
<니르바나>의 마이어 드 한(Meyer de Haan)은 푸른 옷을 입고 괴상한 얼굴로 뒤편의 관능적인 여성들의 유혹을 외면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고갱이 동료의 초상화를 그린 배경에는 그가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났고, 건강상의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삶의 태도에서 매우 특별한 사람, 즉 불교의 고승 같은 이미지를 갖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어 드 한은 신체적인 장애와 건강상의 이유로 1891년 고갱과 함께 타히티로 떠나지 못하고,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4년 후에 사망하게 된다. 그는 열반에 든 성자처럼 프랑스에 자신의 두 딸을 낳은 카페 사장인 마리 앙리에게 모든 그림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폴 고갱, 야만인 이야기, 캔버스에 유채,130x89cm, 1902
마이어 드 한(Meyer de Haan)은 고갱의 불교적인 그림인 야만인 이야기(Barbaric Tales)에도 등장한다. 그림에서 야만인은 누구일까?
타히티섬을 지배했을 때 프랑스인들은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낮추어 부르며, 그들에게 온갖 수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프랑스에 부인을 두고도 어린 소녀들과 중혼관계를 유지하고 쾌락을 일삼았다. 고갱도 1901년 나무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된 집을 <쾌락의 집>으로 명명하고 매독에 감염된 몸으로 어린 소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매독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사망하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이 바로 <야만인 이야기>이다.
야만인은 바로 자신과 같은 서양인들이란 것을 깨닫고는 그의 동료였던 마이어 드 한(Meyer de Haan)의 얼굴을 차용하여 서구인의 얼굴을 그렸다. 위의 그림 왼쪽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악한 얼굴인 서구인의 발을 자세히 보면,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이 보인다. 바로 약탈의 흔적을 고갱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가운데 인물은 불교식의 가부좌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의 여자는 머리에 화관을 올린 모습이다. 사악한 서구인의 날카로운 눈빛, 발톱과 대비하여, 원주민들의 모습은 많은 수탈과 고난에도 초연한 경건함과 순수성을 가진 불자의 모습이다.
어쩌면 서구인의 얼굴은 바로 고갱 자신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두 명의 원주민은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그는 이미 사망한 친구의 얼굴을 차용하여 과거의 약탈과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있으며, 고난의 역사를 안고 살아온 두 명의 원주민들은 현재의 초연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가장 오른편의 백합 같은 꽃과 상단의 꽃들은 마치 불교의식의 꽃공양 같은 경건함의 장치로 느껴진다.
서구인의 머리에는 어두운 구름이, 원주민의 머리에는 먹구름이 지나간 하얀 구름이 죽음을 앞둔 작가 자신의 참회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 화단에서 종종 자신이 야만인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야만인의 이야기는 바로 과거에 방종과 쾌락을 일삼던 그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갱은 불교적인 이미지를 여러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바로 목판화 작품이다. 갈색과 검은색으로 인쇄된 목판화는 동양의 불상을 연상시킨다.
폴 고갱, 부처님. 1895년 또는 그 이후, 목판화,1898-899
고갱은 자신의 삶을 위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처의 정체성에 주목했다.
"부처님, 신을 잉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인간 마음의 지혜를 완전히 잉태하고 완전히 이해한 분은 그 영원한 행복, 열반, 시대를 통한 진보적인 움직임에서 영혼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지혜를 얻음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발췌문에서 그는 완벽하게 불교사상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불교의 사상을 작업에 반영하고, 그의 삶의 지표로 삼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그가 남긴 가장 대작인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인간 삶의 의미와 근원을 탐색하는 다분히 불교적인 선문답 같은 작품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39.1x374.6cm, 1897-1898, 보스턴 미술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삶의 궁극적인 문제를 철학적으로 제기하는 이 긴 제목은 다분히 불교의 선문답 같다. 대부분 작품에 캔버스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에는 거친 터치가 느껴지는 삼베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붉은 기운의 열대지방을 표현하던 야생의 색이 아닌 어두운 빛깔의 군청색이 그림의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갱이 한 달 만에 진력을 다해 완성한 이 작품은 제목만큼이나 여러 상징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그야말로 인생에서 최악의 상태였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재정의 파탄 등 그의 주변에는 불운의 기운이 드러워져 있었다. 이러한 고민을 안고서, 그가 예술 작품으로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신성한 탄생기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게 세 장면으로 우리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탄생기와 욕망의 성장기, 그리고 죽음을 앞둔 노년기를 나타내고 있다. 잠자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는 신성함과 순수함이, 가운데 과일을 따는 모습의 성장기에는 원죄의 사과처럼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죽음을 앞둔 노년기에는 뒤편에 있는 내세의 평안을 상징하는 부처처럼 보이는 조각상이 있다.
욕망과 탐욕의 성장기
부처처럼 보이는 조각상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세상의 고통을 자비로써 보듬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각상을 인생의 노년기에 배치함으로써 죽음을 앞두고는 욕망과 탐욕보다 내세의 평안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세의 평안를 비는 노년기
고흐와 고갱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둘 다 독학으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미술사를 저술한 곰브리치는 “인간적으로 고갱은 고흐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고흐가 지닌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반대로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라고 평했다.
현실에서의 가난과 고독, 그리고 가족과의 분리 등 엄청난 고통의 길에서 혹은 더 나은 예술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길에서, 고흐는 수도승처럼 불교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반면 고갱은 탐욕과 욕망으로 자신을 불태운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부처의 자비를 작품에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