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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D 미식가 Nov 10. 2023

[미술의 맛] 반 고흐가 그린 가장 걸작 그림은?

 화가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전략적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

지난 9월 네덜란드의 한 미술관이 2020년 도난당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3년 만에 되찾았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반 고흐의 부모가 살았던 네덜란드 뉘넌의 목사관 정원의 풍경을 담은 작품인 <봄의 정원>(1884)이 그 주인공이다. 작품의 가치는 최고 600만 유로(약 85억원)로 평가된다.

반 고흐, 봄의 정원, 나무패널 위 종이 유화,1884, 흐로닝언 박물관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는 마을 교회의 탑은 고흐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며, <봄의 정원>이란 제목과는 이질적으로,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는 반 고흐가 고향인 네덜란드 뉘넌에서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을 다듬어 가는 시기였다.


그가 고향에서 특히 관심을 가진 주제는 농민들의 일터와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진실한 묘사였다. 이삭줍기, 파종 등 농부들의 일상을 탐구하고, 그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기본기를 다듬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삶의 본질이 그림에 투영되길 원했다.

이런 다양한 시도와 탐구를 통해 마침내 그가 자신있게 완성한 작품이 명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이다.


명작을 위한 설계,  전략적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 먹는 사람들(Potato Eaters)>은 고흐 자신이 실력 있는 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탐구를 거치면서 실존적인 농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이다. 고향 마을에서 직접 농민들과 생활하며, 현실감 있는 노동 현장을 그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세밀한 삶의 본질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먼저 그림의 기초자료로 농민들의 손과 같은 인체 부분들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이어서 동작에 대한 연구로 농민들의 씨뿌리기나 땅파기 등의 동작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반 고흐, 농민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한 소묘들,1885

그런 후에 얼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농부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실존적인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노력이다. 그들의 모습은 다른 인상파의 그림처럼 예쁜 얼굴이 아니다. 어둡고 칙칙한 흙빛의 장면을 통해 생생한 농민의 생활과 진실한 현실을 그림에 투영하고자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보다는 농민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라고 적기도 했다.

반 고흐, 남자의 두상,1885(왼쪽)      여자의 두상,1885(오른쪽)

이러한 기초적인 연구단계의 인체묘사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인 전체적인 구도 작업에 돌입했다.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습작, 캔버스에 유채, 33.6x44.5cm, 1885

<감자 먹는 사람들 습작>그림에서는 부부와 자녀로 추정되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어두운 배경 속에 중앙의 램프의 밝은 빛을 중심으로 네 명의 인물이 앉아서 식탁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장면이다. 얼굴색은 램프 불빛을 반영하여 밝은색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인상파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처럼 얼굴 윤곽은 뭉개져있다. 디테일 없는 준비단계의 그림으로, 명작을 위한 설계의 기본적인 개념을 설정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는 왜 많은 소재 중에서 저녁 식사 장면을 그림의 소재로 삼으려 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그가 당시의 네덜란드 작가 중에 유명했던 요제프 이스라엘의 <식탁의 농민 가족>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농민들 식사 장면을 <감자 먹는 사람들>로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요제프 이스라엘, 식탁의 농민가족, 캔버스에 유채, 71x105cm, 1882, 반고흐 미술관

식탁 주위를 둘러앉은 5명의 인물 구도와 어두운 배경 등을 담은 이스라엘의 그림을 보면,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차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무렵 그는 파리에 있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네가 인상주의에 대해 말한 것에, 생각했던 다른 무언가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열망하거나 궁금하지 않다."


고흐는 철저한 자신 만의 설계도를 가지고 명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가지 기초작업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 만큼 이 그림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동생 테오에게 그림을 여러 번 설명하면서 그림이 파리에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의 파리 화단은 밝은 계열의 인상파 그림이 선호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전시되지도못했다. 그리고 친한 지인이던 화가마저 그림에 혹평을 가함으로써 고흐를 우울하게 했다.


그림 속의 숨겨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흐는 동생 테오와 친구 화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감자 먹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림 속에서 그동안 연구하며 걸작을 만들어간 여러가지 메시지를 녹여냈다.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82x114cm, 1885, 반 고흐 미술관

이 작품에서는, 중앙의 빛을 내는 램프가 그림의 색상을 표현하는 포인트다.

 흔히 인상파를 '빛의 화가들'로 부르듯이 램프의 빛은 인물들의 얼굴색을 밝게 만들어 배경의 어두운 분위기와 대조되는 강한 인상을 제공하는 장치이다.


고흐는 인물들의 얼굴색을 표현하는데 흰색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연구한 방법을 그림에 적용했다. 얼굴의 흰색처럼 보이는 부분은 실제로는 회색이다. 그리고 배경의 색상들은 회색, 갈색, 녹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정확하게는 갈색이나 녹색도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연구를 토대로 '보색'을 사용했다.

 

두 가지 보색(서로 반대되는 색)을 혼합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색을 표현한 것이다. 빨간색과 녹색 또는 주황색과 파란색 등. 같은 양으로 섞으면 무채색이 된다. 엄밀히 말하면 검정 같은 회색이 된다.

감자먹는 사람들 상세부분

위의 그림에서 모자의 회색 속의 분홍색은 보색끼리의 양을 조절해 다른 색깔의 느낌으로 나타나게 했다. 이처럼 고흐는 색의 연구를 통해 그림 전반에 걸쳐 녹색과 진정한 감자색을 띤 인물들의 흙빛 얼굴을 표현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여러 번 방문한 드 그루트(De Groot) 가족이 모티브가 돼 재구성된 것이다.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1885, 크뢸러-뮐러 박물관

왼쪽의 젊은 여성은 여자의 두상 연구에 나오는 고르디나(Gordina de Groot)이다. 가운데 있는 인물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논란이 있지만 두상 연구에서는 남자의 두상으로 명명하고 있다. 당시 성년 여성들에게는 흰색 모자 같은 장식이 없는 점도 그렇다. 더구나 반 고흐 미술관의 작품보다 먼저 제작한 아래의 작품에서는 분명한 남자의 모습이다.


왼쪽 벽에 시계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이지만, 그림에서는 어두워서 정확한 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확대한 그림을 보면 시계는 저녁 7시를 나타내고 있다. 그 옆의 액자에는 종교적인 기원을 담은 듯한 십자가를 그린 모습이 보인다.


 인물들은 고된 농민의 일과를 마치고, 화려하고 이상화된 옷차림은 아니지만, 경건한 복장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먹고 있다. 이 장면에서 반 고흐는 램프의 빛을 이용하여 희미하게 감자에서 나는 김을 연기처럼 묘사하고 있다.

시계와 성화 확대부분 (왼쪽)               수저통과 부엌도구(오른쪽)

차를 따르고 있는 여성의 머리 위에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저통과 부엌 도구가 걸려 있다. 이런 모습도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그림 속에서 나타내는 메시지이다.

남자의 의자 등받이 확대한 부분

남자의 의자 등받이가 확대된 흑백 사진에는 무언가 글씨로 씌여진 것이 보이는데, 'Vincent'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이처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가 인물과 색상의 연구를 통해서 농민들의 신성한 저녁 식사를 표현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순수한 눈망울과 젊은 부부의 정겨운 이야기를 통해서 고된 노동 뒤에도 인간적인 모습이 살아 숨쉬는 실존적 농민들의 희망적 일상을 담은 작품이다.


이런 이유로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신의 가장 성공적인 걸작으로 평가하며, 그가 사망한 해인 1890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위해 가족에게 자신의 농민 그림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사망하던 해에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

반 고흐, 식사장면 스케치 ,1890, 반 고흐 미술관

가족의 힘으로 재탄생한 반 고흐의 신화

반 고흐는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을 남겼다. 화가의 길로 입문한 10년 동안의 업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후부터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불과 5년 동안 엄청난 작품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인상파, 야수파, 표현주의적인 다양한 요소가 결합된 자신만의 화법으로 이후 예술의 여러 방면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사후 10여년 후인 1901년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동생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읽고 정리해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과 형제애를 담은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1914)을 출간하면서 '고흐의 신화'를 창조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400여 점의 고흐의 작품을 내놓아,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는 드물게 많은 명작을 보유한 반 고흐 미술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요한나가 없었다면 반 고흐도 무명의 화가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동생 테오가, 사후에는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반 고흐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가족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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