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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D 미식가 Oct 10. 2023

[미술의 맛] 가장 정치적인 그림 '마라의 죽음'

프랑스 혁명기에 정치적인 그림으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다비드

샤를 보들레르가 '마라'를 되살렸다


184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작은 미술 전시회.  한 청년 문학가가 프랑스 신고전주의 작가의 작품을 보고 감격어린 감상평을 코르세르 사탕(Le Corsaire -Satan) 저널에 기고했다.


"이 작품에는 가슴 저린 아픔과 마음을 녹여내는 부드러움이 있다. 영혼이 이 방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벽 안에서, 차가운 죽음의 욕조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이렇게 아름다운 선의 표현을 단시간에 그렸다는 것이다."


감상평을 쓴 문학가는 25살의 패기만만한 미술 평론가이자 유미주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였다. 그리고 보들레르가 극찬한 그림은 정치적인 이유로 대중들에게 외면받았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Death of Marat)'이었다.


보들레르가 '마라의 죽음'을 대중의 기억 속으로 소환했을 때 당시 여론은 호의적이지 아닐 것이란 것을 보들레르 자신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이단아이자 예술지상주의를 추종하던 보들레르는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예술 그 자체의 미를 강조했던 것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진 '마라의 죽음'

신고전주의 작가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은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의 광풍이 불던 1793년 7월, 혁명 정부의 지도자이며 유명 저널리스트였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마라의 암살 직후 정치적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다비드는 현장의 생생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오른손에 들린 깃펜과 왼손에 든 핏자국이 선명한 편지, 핏빛으로 가득 찬 욕조,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피로 얼룩진 칼까지, 그림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62x128cm, 1793,벨기에 왕립박물관

그러나 화면의 분위기는 암살 현장의 잔혹한 서술과는 사뭇 다르다. 암살당한 사람의 얼굴 모습이라고 하기 어려울만큼 너무나 평온한 표정, 공간의 절반을 갈색 톤의 배경으로 처리한데서 느껴지는 정적인 숭고한 분위기, 그리고 피부와 편지에 나타나는 빛의 효과.  다비드는 생생한 사실적인 현장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순교자의 이미지를 그림에서 최대한 표현하려 했다.


실제로 마라는 만성적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욕조에서 일을 할 정도로 피부가 좋지 않았다. 반면에 암살자인 샤를로뜨 코르데이(Charlotte Corday)는 젊고 순결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비되는 상황을 다비드는 의도적으로 코르데이를 그림에서 배제하는 한편, 마라를 깨끗한 피부를 가진 순교자로 표현했다.

다비드의 그림속의 편지 확대부분

샤를로뜨 코르데이는 그림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마라의죽음 그림속 피 묻은 편지에는 이름이 등장한다.


“마리안느 샤를로뜨 코르데이로부터 시민 마라에게,
나는 당신의 자비를 구할 만큼 비참합니다”


편지에서 마라의 손가락은 ’자비‘라는 단어를 가르키고 있다. 이처럼 마라의 모습은 이상화되어  순교자로 추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예수의 순교적 이미지에서 차용하고 했는데, 이는 그가 로마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 좋아했던 카라바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라의 죽음'은 그 당시 공포정치의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때문에 복제품에 대한 수요도 엄청났다. 다비드의 제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복제품들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랭스, 베르사이유 미술관 등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 복제품(좌)                                            베르사이유 미술관 복제품(우)

위의 이미지에서 두 복제품의 차이는 탁자에 있는 글씨의 유무이다.루브르 박물관의 복제품에는 “뇌물을 거부했기에 나를 살해했다”라는 문구가 묘비명처럼 씌여 있고, 베르사이유 미술관의 복제품에는 탁자에 글씨가 없다. 벨기에 왕립미술관의 원본 작품에는 “마라에게, 다비드”라고 되어 있다.


공포정치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와 정치적 동지로 활동했던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등 공포정치의 주역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에 단두대의 처형은 면했지만,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정치 선전적인 의도를 가진 작품 '마라의 죽음'도 운명을 다하고 금기시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살녀 샤를로뜨 코르데이는 부활했다

마라를 응징한 프랑스 여인 샤를로뜨 코르데이(Charlotte Corday)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 의도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샤를로뜨 코르데이를 다시 부활시킨 화가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정기 인기 작가였던 폴 보드리(Paul Baudry)이다.

폴 보드리, 샤를로뜨 코르데이, 캔버스에 유채, 154x203cm, 1860

보드리의 작품을 보면, 마라가 누워있는 구도와 머리의 흰 두건, 녹색 탁자 보, 탁자 등은 다비드의 그림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마라의 죽음'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샤를로뜨 코르데이의 등장과 마라의 얼굴과 피부, 암살에 사용되었던 칼의 위치와 모양, 대비되는 암살현장의 공간 등이다.


마라의 얼굴은 숭고한 이미지에서 칼에 찔린 고통의 얼굴로, 매끈한 피부는 거친 늙은 피부로 묘사했다. 그리고 칼자국만 있는 다비드의 그림에 비해 보드리는 마라를 칼에 찔린 모습으로 그렸고, 칼의 손잡이도 흰빛의 상아에서 검은색의 흑단으로 처리했다. 두 작가는 확연히 다른 의도로 동일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암살 현장의 끔찍한 공간과는 너무도 이질적일 정도로 샤를로뜨 코르데이는 프랑스 지도를  배경으로 벽에 기대어 입술을 다문 채 의지 있는 눈빛으로 위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암살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고 의연한 자세와 당당한 어조로 "나는 십만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느낌을 작가 보드리는 작품에서 코르데이의 얼굴 표정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속 부분 확대 이미지

벽면에 있는 프랑스 지도의 일부는 붉은빛으로 얼룩져 있고, 순결을 상징하는 하얀 머플러를 두르고 파란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코르데이가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운 벽면과 대조되는 빛이 감돈다. 작가는 프랑스 지도를 통해 그녀가 프랑스를 구했다는 의미와 프랑스 삼색기의 색상처럼 지도의 핏빛과 흰 머플러, 파란색 원피스를 어울리도록 연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비드가 '마라의 죽음'에서 마라를 순교자로 묘사했듯이, 보드리는  '샤를로뜨 코르데이'에서 그녀를 프랑스를 구한 애국자이자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의 잔 다르크였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감옥 해방 10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약동하는 프랑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에펠탑도 이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박람회 기간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는데, 미술 전람회도 그 일부였다.

미술 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화가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르투로 미켈레나 (Arturo Michelena)였다. 그가 금메달을 수상한 작품이 바로 단두대로 향하는 코르데이를 묘사한 작품이다.

아르투로 미켈레나, 샤를로뜨 코르데이, 캔버스에 유채, 234x315cm, 1889, 베네수엘라

그림에는 6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코르데이는 문을 통해 들어온 빛을 맞으며 단두대로 가기 전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손이 뒤로 묶인 채 서 있다. 오른쪽에 서 있는 남자는 단두대로 가는 코르데이를 묘사하고 있는 군인이자 화가인 장 자크 오에르(Jean-Jacques Hauer)이다. 가운데 빨간 모자를 쓴 남자는 간수인데,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데 몰두하고 있고, 코르데이 뒤의 빨간 옷을 든 남자는 사형 집행인의 조수이다. 당시 사형수는 처형장에서 빨간 옷을 입었는데 빨간 옷은 코르데이를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이 1889년 만국 박람회의 미술 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것은,  바스티유 감옥 해방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취지와 '샤를로뜨 코르데이'로 상징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자유를 향한 시민의 애국심이 그림에 잘 묘사되었다는 평가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위 그림 속에 등장하는 군인이며 화가인 장 쟈크 오에르(Jean-Jacques Hauer)는 실제로 1793년 당시 처형되기 직전의 코르데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장 자크 오에르, 샤를로뜨 코르데이, 캔버스에 유채,1793

 그는 그녀를 기품있는 귀부인처럼 표현하고 있다. 체포된 지 3일 만에 처형당한 그녀는 감옥에서 배후에 대해 혹독한 취조를 받았음에도 초상화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온화한 미소와 단정한 모습이다. 당시 공포정치가 광풍처럼 휘몰아치던 시기에 화가인 오에르가 자신을 위해 코르데이를 귀족적인 반혁명가인 귀부인처럼 그렸다는 후문도 있지만,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 없는 모습과 단정한 옷차림 등을 볼 때 그녀는 애국적인 순교자처럼 느껴진다.


단두대로 향하는 중 동승한 사형 집행인 상송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그녀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강하게 매료되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처형장으로 가는 마지막까지 저렇게 의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샤를로뜨 코르데이의 의연함과 아름다운 이미지는 그녀 사후에 많은 예술가의 소재가 되었고, 19세기 낭만파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그녀를 '암살의 천사'라 부르기도 했다.  예술의 정치성, 사회성을 배격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절대미를 주장하는 예술지상주의를 신봉하던 보들레르가 가장 정치 선전적인 그림인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극찬한 것은 역설적이다.


반면에 샤를로뜨 코르데이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프랑스 시민들에게 사랑받은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애국적인 혁명정신과 죽음 앞에서 보인 고결하고 의기 있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10만 명의 프랑스 민중을 구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코르데이와, 그녀에 의해 암살된 마라가 정치적 이념에 따라 순교자의 위치가 바뀌고 예술작품의 선호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면, 시대와 정치사회적 지형에 따라 예술은 유동하며, 그 가치와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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