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D 미식가 Jul 10. 2022

[미술의맛]우리는 왜 추한 미술을 불편해할까

Art를 미술로 오역하면서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매김

 우리는 왜 추한 미술을 불편해할까

 Art를 미술로 오역하면서 인식도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매김.


 지난해 서울 본 전시에 이어 올해까지 지방 순회전을 열고 있는 리움 미술관의 재개관전은 모처럼 미술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코로나19로 우리의 관심이 온통 ‘몸’에 집중되었듯이 전시의 주제도 ‘인간’ 좀 더 세밀하게는  ‘신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필자의 관심을 끄는 작품은 중국 작가 장 후안 (Zang Huan)의  Family Tree(가계도)이다.    

 

그림 1.  Zang Huan, Family Tree(가계도),1990.

 불쾌하고 엽기적인 미술 작품들


  작품 Family Tree(가계도)는 작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시절인 1990년 타국 생활에서 겪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자아에 대한 퍼포먼스 작업을 사진으로 옮긴 것이다.

 

작품은 3명의 서예가가 작가 자신의 얼굴에 중국의 속담이나 격언, 그리고 그의 가족들의 이름과 개인적 이야기를 한자로 적어나가는 장면을 9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한자를 얼굴 표면에 적어나가는 동안 점점 글자는 사라지고 얼굴은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


 왼쪽 처음의 사진 가운데 유독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우공이산(愚公移山) 단어가 보인다.  한자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고향인 중국에서 작가가 획득한 자신의 이름과 문화를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아의 모습이 변하듯이, 점점 한자는 사라지고 얼굴이 검은색으로 변한다. 이것은 작가가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자아의 상실과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독자들의 일부는 엽기적이고 기이한 또는 아름답기는커녕 불쾌감을 자아내는 작업을 미술 작품이라고 하니 작품이지, 이 엽기적인 행위를 기록한 사진이 무슨 작품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모름지기 인상파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적 장면을 통하여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작품이 미술작품이지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장면을 현대미술이란 허울을 씌워 작품이라고 하니,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할 것 같다.  


오늘 미술이야기는 이 엽기적이고 기이한 醜(추)함의 미학(美學)인 그로테스크 미술에 대한 것이다.


그림 2.   Paganino, 그로테스크(grotesque),1574.

불쾌한  엽기를 추구할까


그로테스크(grotesque)는 원래 아라베스크라는 용어로 불리던 고대 로마의 당초문양 사이에 사람이나 동물, 꽃 등을 배치하여 만든 무늬를 말한다. 당초문양은 우리나라 고려자기나 조선백자에서도 볼 수 있는 덩굴식물 모양의 장식문양을 일컫는다.


이러한 장식문양은 1500년경 로마의 티투스 지역의 유적 발굴 과정에서 지하 무덤 동굴의 벽면 장식에서 발견된 이후 ‘그로테스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어로 동굴인 그로테(grotte)가 어원이다.


이 로마의 무덤 동굴에서 탄생한 그로테스크는 당시 비례와 균형의 미가 주류인 예술분야에서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기이하고, 엽기적인 문양은 아름다운 미적 쾌감에 익숙한 당시의 지배층들에게 오히려 호기심과 그들만의 구별 짓기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로테스키(grotteschi’)라는  괴상한 기물을 수집하는 유행을 낳게 된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적인 경향을 추구하는 미술은 현대까지 이어져서 일반인들이 수용하기 힘든 기이하고 엽기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독일 태생의 영국 작가인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1922-2011) 도  그들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로 유명하다.    


그림 3.  Lucian Freud, ‘Benefits Supervisor Resting,  150.5*161.3, 1994.

위의 그림은 201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620만 달러(705억 원)에 거래된 루시안 프로이트 대표작 중 하나인 ‘Benefits Supervisor Resting’이다.


비대하고 뚱뚱한 늘어진 살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누드화, 낮은 채도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거칠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델은 127kg(280파운드)의 실존하는 틸리 수(Tilley Sue)라는 여성이다.


그는 기존의 얼굴 위주의 초상화를 몸 전체로 확대하여, 인물이 지닌 몸이야말로 한 인물의 살아온 인생과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주변 평범한 이웃 인물들의 누드화를 통하여, 모델의 삶과 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누드화는 애초부터 기존의 아름답고 비례와 균형미를 갖춘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의 누드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미화된 인체가 아닌 실재의 일상에서 존재하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현실세계


 아름다워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일까?  

지금 우리는 남녀 누구나 건강하고 예뻐지고 싶어 한다. 이런 경향은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의 등장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높아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뻐지기 위한 성형수술은 정형화되고 일률적인 미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서구의 강요된 미의 기준에 담론을 제공하며, 미용을 위한 미적 목적인 아닌 예술의 재료로 자신의 얼굴을 성형함으로써 충격을 주고 있는 현대 미술가가 있다. 바로 프랑스 출신의 행위예술가인 오를랑 (Saint Orlan)이다.



그림 4. 성형 수술 준비 중인 오를랑

오를랑은 그가 43세 되는 해인 1990년에 ‘성 오를랑의 환생’(The Reincarnation of St. Orlan)이라고 이름 붙인 성형수술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성형수술을 위한 대본을 마련하고, 수술실을 그의 예술을 위한 작업실로 상정하여  이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는 이 성형 퍼포먼스에서 직접 르네상스나 바로크의 시대의 명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눈, 코, 입, 이마, 턱 등을 미리 자신의 성형 목록에 올려놓고 성형수술을 실행한 것이다. 이른바 성 오를랑의 환생’(The Reincarnation of St. Orlan)인 것이다.

그림5. 성형수술 계획도


그림 5에서 보는 것처럼 이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턱은 보티첼리의 비너스, 입은 부쉐의 유로파 등이다 그가 명화 속의 여성의 이미지를 각각 요구한 것은 그들의 외형적인 미적 요소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속성에 주목한 까닭이다.


오를랑은 왜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자기 가학적인 자기표현에  몰입한 것일까? 그는 미술의 재료로 자신의 몸을 변형하여, 정형화되고 일률적인 미의 기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6. 성형 후의 오를랑 모습들

좀비영화도 있는데, 미술만 아름다워야 하나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추한 그로테스크적인 미술에 익숙하지도 않을까? 이는 애초부터 우리의 미술이 서구에서 유입되는 과정에서 ‘art’가 미술(美術)로 번역된 까닭이 아닐까 생각된다.


‘art’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로 번역되고 인식되면서, 미술이 추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미술이 아닌, 오로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나은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미술이 아닌 다른 예술장르인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영화만을 상상하지 않는다. 좀비나 추한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부터 심금을 울리는 감동 어린 자연의 경이로운 풍경들과 고난 속에 열매를 맺는 인간승리의 휴머니즘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익숙하다.


미술이 아름다워야 하는 명제는 그래서 미술을 감상하는 독자들에게 인식의 한계를 정하여, 이해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폴론적인 이성(理性)의 낮과 디오니소스적인 욕망(慾望)의 밤이 있듯이 미술도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는 예술인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추함의 미술은 오히려 미술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인식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균형 잡기’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미술의맛] 나도 그릴 수 있는 그림, 왜 작품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