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의 K-한류가 세계무대에 자리매김 하고 있는 사실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일이다. 몇 해 전 한국 드라마로 시작한 K-한류는 BTS에서부터 오징어게임까지 종횡무진 지구촌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어린 시절 아카데미상(오스카상)을 몇 개 수상한 작품은 당연히 좋은 영화로 인식됐고, 아카데미상의 권위가 주는 위력은 한국의 관객들에게 대단했다. 감히 넘보지 못할 것 같은 아카데미상을 우리의 배우들이 수상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야흐로 세계의 문화 중심지 대열에 한국이 우뚝 섰다.
이런 흐름은 한국 미술계도 예외가 아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해외의 상업갤러리 전시가 아닌 해외 미술관 전시는 한국 미술의 예술적 가치를 재평가받고 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시카고미술관은 한국 단색화 소장품 상설전을 통해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가 이우환은 카셀 도큐멘타, 베르사이유궁, 구겐하임미술관, 퐁피두센터 메츠 분관 전시에 이어 지난해에는 프랑스 남부 아를 지방에 이우환 전용전시장 개관했다. 근래 10년 사이에 한국미술의 위상도 K-한류의 물결을 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우환, 관계항,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2014
한국 단색화는 어떻게 태어났나?
한국 단색화에 대해 극찬 일변에서 벗어나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단색화는 1970년대 정부 주도의 국전을 거부하고, ‘아방가르드’를 표방한 일련의 전위부대 작가들에 의하여 시작됐다.
이들은 당시에는 어떤 동일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미술운동차원의 단체를 형성하는 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닌, 개인 각자가 자신만의 형식으로 작품행위를 했을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단색화가로 분류되는 일부의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조차도 자신의 작품이 단색화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한국 단색화는 그동안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 한국적 미니멀리즘, 단색주의 등의 이름으로 명명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와 담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단색화’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단색화’라는 용어는 단순히 영어의 '모노크롬(monochrome)'을 한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모노크롬 회화는 다색화(polychro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일한 색조를 바탕으로 명도와 채도에만 변화를 준다. 그리고 다양한 색채뿐만 아니라 내용, 주제, 선, 형태를 거부한다. 애초에 기존의 형식과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모노크롬을 처음 미술사에 도입한 작가는 20세기 초 절대주의를 주창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다.
말레비치는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란 작품을 통해 모노크롬을 선보였다. 그리고 1945년 이후에는 만조니, 폰타나, 이브 클랭 등의 작가들이 모노크롬 작업을 전개한다. 특히 1960~1970년대에 이르러 한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모노크롬은 하나의 주요한 추상회화 양식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밀레비치의 '모노크롬 0.10' 전시회. 1915년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온 한국 단색화
단색화,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 한국적 미니멀리즘, 단색주의 등. 한국 단색화는 그동안 왜 이렇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왔을까?
바로 이 점이 한국 단색화의 정체성을 이야기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단색화가 모노크롬에서 비롯된 용어라는 것은 이해되는데 왜 갑자기 '한국적 미니멀리즘' 이란 용어가 나왔을까?
한국 단색화와 미니멀리즘의 연관성을 이야기하자면 이 글 제일 앞에 제시한 닮은 듯 다른 두 작품 A와 B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자들 중에는 형태나 색채의 유사점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미술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진 분들은 한 작가의 작품 영향을 받았지만 정확히는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림 A는 캐나다 출신의 미국작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이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00억 원을 호가하는 인기 작가의 것이다. 모노크롬과 격자무늬, 옅은 유화물감 위에 연필로 그린 가느다란 선, 그리고 격자속의 무수한 점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숭고함'을 자아낸다.
마치 우리나라 단색화를 보는 느낌이다. 격자 무늬속의 무수한 점은 김환기의 '점화'를 연상시킨다. 아그네스 마틴는 미니멀리스트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작가 본인은 스스로를 '추상표현주의 작가'라고 했다.
그림 B는 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가인 박서보의 1970년대 초기 묘법이다. 이 두 작품을 보고 있으면 캔버스 위에 반복되는 연필의 선과 명상적 작업등에서 우리의 단색화가와 미국작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단색 화가들은 서구의 이런 미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모노크롬 뿐만 아니라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 단색화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사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요소들을 그림에 도입하면서, 기법이나 형태적으로는 서구 미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물성을 탐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양적인 선의 사상이 가미된 독특한 한국 '단색화'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 단색화, 일본 '모노하'(物派) 영향을 받았을까?
한국 단색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우환이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작가로 알려져 있다. '모노'는 '사물'을 뜻한다. 모노하는 '물파'(物派)다.
일본에서의 모노하 운동은 미셸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라는 명제에서 탄생한 운동이다. 푸코는 인간의 이성보다 물질이나 사물을 중요시 했으며, 여기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 일본의 모노하(物派)다. 간단히 말해서 사물에 관심을 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적 중심에 한국인인 이우환이 있는 것이다. 그는 서울대 미술학과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일본의 모노하에 대한 비평을 주도적으로 발표하면서 모노하의 담론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 대부분은 앞서 이우환의 작품 <관계항>을 보면서 흔한 돌과 철판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도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시절에 비슷한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이우환의 설치작품은 대개 돌, 유리, 철판, 천과 같은 모노(사물)로부터 형성된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모노만으로 성립하는 것은 거의 없다. 반드시 두 개 이상의 모노로 형성된다. 그의 작품 핵심은 각각의 모노가 아니다. 바로 모노와 모노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가 작품에 즐겨 사용하는 모노인 철판은 인공적인 모노(사물)다. 그리고 돌은 자연적인 모노(사물)다. 그가 사용하는 돌을 되도록이면 현지의 돌을 사용하는 까닭도 아마도 그 지역의 자연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라는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이질적인 모노와 모노의 관계속에서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 내는 작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환과 박서보의 합작, 한일 문화교류전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 이우환은 어떻게 한국의 단색화와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한국 단색화를 이끌고 왔다고 평가받는 박서보와 이우환의 개인적인 친분도 작용했겠지만, 1972년 한국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Independant)전의 심사를 이우환이 맡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때부터 이우환은 한국의 미술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모노하 운동과 한국 단색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백색 모노크롬이 지난 1975년 한일 문화교류차원에서 진행된 일본 동경화랑의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Hinsek)>에서 처음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전시에 참여한 5명의 한국작가는 박서보, 권영우, 이동엽, 서승원, 허황이다.
그 전시는 이우환과 박서보의 합작으로 이룩한 첫 한일 문화교류전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백색 모노크롬 회화를 일본 미술계에 알리는 기회가 됐다.
서승원 Simultaneity
이동엽 사이
권영우 무제
이처럼 이우환을 매개로 한국 단색화와 일본 모노하는 직접적으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단색화가 물성을 탐구하는 점에서는 일본의 모노하, 즉 물파(物派)와의 연관성은 특히 그렇다.
한국 단색화는 독창적인 '한국의 것'
한국 단색화는 K-한류를 타고 세계 속으로 우리 미술의 예술적 가치를 알리는 첨병이 되고 있다. 그들이 70년대 한국 미술의 아방가르드를 자처했듯이 지금은 한국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전위부대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 나가고 있다. 이는 우리 미술의 자긍심이자, 자랑이다.
그러나 단색화가 현재 우리나라 미술의 전부로 인식되거나 혹은 오롯이 우리의 독창적인 미술형태로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하는 부분이다.
한국단색화에 대해 혹자는 서양 모더니즘의 ‘평면성’을 재해석한 시도는 좋지만, 왜 그런 시도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답은 찾기 힘들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서양 모더니즘의 '평면성’은 그들의 미술사 흐름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단색화는 이런 개념을 비판적 성찰이나 철저한 분석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단색화는 서구의 미술사상을 비판이나 자기화하는 과정없이 받아들인 것이므로 모방이고 껍데기라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러할까? 비판하는 이는 서구의 평면성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단색화는 평면성만 모방한 것이 아니다. 중국청자가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의 고려청자가 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청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후 우리가 독창적으로 상감기법과 비취색을 구현했듯이, 1970년대 서구미술의 도입기에 모노크롬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일본의 모노하를 바탕으로 우리 미술가들이 한국 고유의 단색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모노크롬과 닮은 듯 다른 것이고, 메마른 미니멀리즘과 다른 것이고, 사물성을 탐구하는 모노하와도 다른 것이다. 한국 단색화는 여러 미술적 요소들이 한국의 토양위에서 우리 미술가들의 손에 의해 '한국의 것'으로 재탄생한 우리 유산이다.
이런 점에서 이름도 이제는 모노크롬의 단순 번역어인 ‘단색화’가 아니라, 중국 도자기가 한국에 건너와 고려청자가 되었듯이 ’한국 단색화’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름이 우리의 정서가 녹아든 단색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더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