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4일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되어있던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 수프가 뿌려진데 이어 열흘쯤 뒤인 27일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토마토 수프 투척을 당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지구 기후환경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환경운동가들이 미술관에 전시중인 명화들에 이물질이나 접착제를 붙이는 등 저항운동을 함에 따라 세계 각국의 미술관은 공격 예방에 비상이 걸렸다는 외신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미술품에 대한 공격이나 도난 사고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수난이 미술품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명화로 거듭난 예도 있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포플러 패널에 유채,53*77
도난으로 유명해진 모나리자
1911년 한 미술품 사기단은 진품인 미술품을 훔친 뒤에, 진품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사품을 진품인 양 팔려했다. 진품을 훔친 범인은 도난 방지 유리벽을 시공한 작업부였다.
범인은 그림을 자기 집 난로 밑에 숨겨두었다가 2년이 지난 1913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의 관리인 조반니 포그에게 판매를 시도하다가 붙잡힌다. 그리고 이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2주간 전시를 마친 1914년 1월 4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다.
1913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되찾은 모나리자
그런데 르네상스 당시 미술가들의 행적을 기록한 조르지오 바사리(G.Vasari)가 <미술가 열전>에서 모나리자에 대해 극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는 도난당한 1911년까지 지금처럼 루브르 박물관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지 않았다고 한다. 도난을 계기로 모나리자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되는 도난에 대한 후속 뉴스는 사람들에게 모나리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빈 공간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된다. 이런 관심은 뜻하지 않게 사람들에게 모나리자 열풍을 가져왔다. 급기야 모나리자 엽서와 인형이 판매되고, 심지어 속옷 브랜드도 모나리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정도로 모나리자에 대한 사랑은 폭발적이었다.
1914년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다시 전시되었을 때 처음 이틀 동안에만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려 들었다. 이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 도난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세계인이 사랑하는 모나리자로 재탄생한 것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르네상스 미술의 결정판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배경에는 도난에 따른 특별한 관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회화로서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모나리자는 르네상스 미술의 모든 특징이 들어간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초상화에 도입된 미소는 파격적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발전을 논할 때 처음으로 꼽는 것은 그리는 재료의 변화다. 당시 유화가 발명되기 이전에 대부분의 화가들은 색깔이 있는 암석 가루에 달걀을 섞어서 사용했다. 바로 '템페라화'다.
그러나 템페라화는 달걀의 특징 때문에 붓질이 자유롭지 못하고, 표현되는 질감은 딱딱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명암이나 질감의 다양한 표현이 잘 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성과가 유화의 발명이었다. 유화는 여러 색을 섞거나 한 색 위에 다른 색을 겹쳐 칠함으로써 대상을 더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었다.
다빈치의 또 다른 걸작 <최후의 만찬>은 템페라로 그린 그림이지만, 모나리자는 유화를 사용함으로써 풍부한 질감의 표현과 미묘한 스푸마토 같은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어 스푸마토(Sfumato)라는 말은 '연기와 같이(사라지다)'라는 뜻의 미술 용어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처음으로 이 기법을 사용하여, 색과 색 사이 경계선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함으로써 모나리자의 미소를 완성했던 것이다. 안개 같은 베일에 싸인 듯한 모호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표현하기 좋은 기법인데,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눈가에 이러한 기법을 사용했다.
눈과 입술 주위에 작용된 스푸마토 기법
위의 <모나리자> 그림에서 다빈치는 미소를 머금은 입술과 얼굴의 경계선을 모호한 음영으로 처리하여 입술과 얼굴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 명확한 선이 보이지 않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모나리자의 미소는 더욱 신비감을 드러내고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다. 그런데 다른 모나리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일부 미술사학자 사이에서 제기되어 온 의제다.
전문가들이 역사적 문서를 연구한 결과 우리가 아는 모나리자보다 몇 년 전에 첫 번째 버전이 그려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바로 아일워스(Isleworth) 모나리자의 발견이다.
다빈치, 아일워스 모나리자,캔버스에 유채, 84.5*64.5, 개인소장, 스위스
모나리자가 루브르에서 도난당해 톱뉴스가 됐을 무렵인 1913년, 영국 미술상 휴 블레이커(Hugh Blaker)는 영국 서머셋의 한 가정에서 이 그림을 구입한 후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한동안 진위 이슈에 놓여졌고 검증을 거친 뒤 27명의 저명한 레오나르도 전문학자 중 24명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 진품으로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라파엘로가 다빈치의 화실을 찾았을 때 묘사한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음은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저술한 G.바사리의 표현이다.
“눈은 현실의 삶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그 반짝임과 윤기를 지니고 있으며, 아름다운 코는 장밋빛으로 매력적이다. 입주위는 위아래의 붉음으로 인해 얼굴에 녹아들고,색으로 칠했다기보다 살아있는 육체 그 자체로 우리에게 느껴진다.”
이런 내용을 보면, 라파엘로가 보았다는 모나리자는 아마도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아닌 아일워스 모나리자일 가능성이 커진다. 아일워스의 모나리자는 훨씬 젊어 보이고, 활기찬 모습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미소는 붉은 입술로 젊어 보이되 신비로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여성의 당돌함이 보일 뿐이다.
또 다른 모나리자 버전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모나리자이다.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상당히 유사하다.
좌측의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배경이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2012년 미술관이 복원 작업을 한 후에 놀라운 반전이 펼쳐졌다. 배경이 나타났던 것. 그것도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유사한 배경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동시대에 다빈치의 제자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은 복원되기 전, 오른쪽은 복원 후의 그림이다.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이전의 모나리자에 비해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한 흔적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반면 이전의 모나리자에 비해 훨씬 선명하며, 윤곽선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얼굴의 붉은 기운은 아일워스 모나리자를 닮았다. 어정쩡하게 루브르와 아일워스 모나리자를 혼합한 느낌이다.
다빈치는 왜 모나리자의 미소를 많이 그렸을까?
다빈치가 활동하던 르네상스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미소를 띤 초상화 그림을 보는 건 흔하지 않다. 초상화가 으레 교황이나 왕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기에 일반인의 초상화가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빈치는 왜 세속 초상화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미소를 그렸을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빈치의 독수리 꿈'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다빈치가 직접 쓴 기록노트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요람에 있을 때 독수리가 옆으로 내려와 꼬리로 자신의 입을 열고 입술을 두드렸다"라고 적었다.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꿈에서 독수리 꼬리가 입술을 두드리는 장면에 주목하면서,다빈치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입술 주변의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미소를 혼외자로 태어나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헤어진 다빈치의 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다빈치는 1510~1511년 사이에 해부학에 대한 240개 이상의 상세한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에는 금지된 여성의 신체를 해부하고 여성의 생명 탄생에 대한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이 무렵 다빈치는 여성의 신체에서 특히 생명과 관련된 모성적인 특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나타내게 한 것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해석인 셈이다.
다빈치가 그린 태아의 해부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끝내 명작을 그리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연상시키는 다빈치의 또 다른 그림은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작품이다. 르네상스 당시 모두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또 다른 어머니 즉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너무나 흡사하다.
다빈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 나무에 우채, 130*168.4cm,1501-1519, 루브르
이 그림을 보는 독자들도 그림의 배경, 제일 뒤쪽에 있는 성 안나의 모습 등이 놀랍도록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의 방향은 물론 그림의 배경도 모나리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림을 그린 시기도 거의 동일하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모델로 알려진 조콘다 부인의 얼굴을 왜 미소를 머금은 성모의 어머니인 성 안나로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첫 번째 버전인 아일워스 모나리자의 모델이었던 조콘다 부인의 모습을 보면서, 기억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마도 두 번째 버전의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다시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그의 다른 그림에 비해 그림의 크기가 작아 가지고 다니기가 용이했고, 다빈치는 죽을 때까지 모나리자를 곁에 두고 있었다.
세상을 떠날 때는 자신의 자식같이 사랑하던 애제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줬다. 이런 까닭으로 처음부터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주문자가 없는 다빈치 자신을 위한 그림이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어머니의 미소가 되어 다빈치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