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 한 한국인 유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연구자료를 찾기 위해 여러 화랑이나 골동품점을 찾아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골동품점에서 우리에게는 익숙한 한복을 입은 그림을 발견한다. 명절날 대가족이 고운 한복을 입고, 마치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같은 이색적인 그림이었다. 파리의 골동품점에서 대가족이 입은 한복 그림을 보다니!
유학생은 그 순간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바로 배운성의 <가족도>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배운성, 가족도,캔버스에 유화, 200*140cm,1930년대, 대전 프랑스문화원소장
대청마루가 있는 한옥을 배경으로, 중앙에는 가족의 중심인물인 할머니와 아들 부부가 있고, 17명의 대가족 구성원들은 모두가 제각각의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어느 집에나 있던 흑백 가족사진처럼,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그리운 고향과 가족들의 사랑이 느껴지는 누구에게나 추억이 되는 그림이다.
<가족도>를 그린 작가 배운성(1901~1978)은 1999년 그의 그림이 파리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우리들에게 크게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 그런데 <가족도>는 어떤 이유로 파리의 골동품점에서 발견된 것일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미술 유학생이었다. 당시 서구로 유학을 갔다면 부잣집 자제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는 어린 나이에 당시 서울의 거부 백인기(白寅基)의 집안에 들어가 일을 도왔다.
22세였던 1922년 거부의 아들 백명곤이 독일 유학을 떠났을 때 동반하여 독일로 왔다가, 아들 백명곤이 와병으로 귀국할 때 항공료가 없어 혼자 독일에 남게 되면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바로 이 <가족도>가 백인기의 가족들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배운성의 <가족도>가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작가가 그의 얼굴을 이 그림에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림 왼쪽에 겸손한 자세에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다. 자신의 전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그린 모습에서, 자신이 그림 속에서 주목받지 않으려고 하는 배려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복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은 서구문화를 체험한 그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열리는 근현대미술품 전시에서 본 실물 그림은 다른 인물들의 얼굴보다 자신의 얼굴 눈동자의 모습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의식에 찬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의 이미지를 보면 실제의 얼굴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측은 그림속 배운성(1930년대), 우측은 화가의 실물사진(1946)
화가는 무슨 이유로 자신의 얼굴을 그림 속에 표현한 것일까? 바로 오늘의 이야기 '그림 속의 숨은 작가 찾기'다.
로마 바티칸의 사도 궁전 벽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유명한 프레스코화인 <아테나 학당>은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그러나 <아테나 학당>은 크기나 기법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배운성의 <가족도>처럼 그림을 그린 작가 라파엘로가 그림의 한쪽에 등장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유명하게 된 작품이다.
라파엘로, 아테네학당, 프레스코화, 1510~1511년, 5m*7.7m, 바티칸 사도 궁전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의 중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그림에서 왼쪽 무리는 플라톤의 사상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이, 오른쪽 무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계승한 철학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경과 원경을 기준으로 원경에는 철학자들이, 근경에는 과학자, 수학자 및 예술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모든 학문의 기본이 철학에서 시작되었다는 르네상스적인 사상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 왼쪽 플라톤, 오른쪽 아리스토탈레스
그림의 중앙을 확대한 위의 이미지에서 왼쪽에 있는 플라톤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이상세계의 관념론을 주장한 것을 상징한다.
오른쪽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 책을 들고 현실 세계의 행복을 중시했기에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는 몸짓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은 플라톤의 얼굴이다. 눈썰미 있는 독자들도 알 수 있듯이 어디선가 본 듯한 플라톤의 얼굴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이다. 아마도 라파엘로가 자신보다 연장자이며, 존경하는 선배인 다빈치를 이상세계를 주장한 플라톤의 얼굴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숨은 작가 라파엘로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그림의 전경 오른쪽 끝에서 관객들을 보듯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자화상에서도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곤 했는데, <아테네의 학당>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흡사하게 표현했다.
왼쪽은 라파엘로의 자화상, 오른쪽은 아테네학당 그림속의 검은 모자를 쓴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역사 속에서 시대정신을 주장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그린 <아테나 학당>에 자신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자신도 이들의 정신과 융합되기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자신을 그림 속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림 속에서 자신을 비극적으로 표현한 카라바조
라파엘로가 그림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반면, 카라바조는 극단의 비극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표현한 작가다.
주로 그가 사용한 표현방식은 고통받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가 죽기 직전에 그렸던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캔버스에 유화, 125*101cm, 1610,보르게세 미술관
위의 작품에서 그림 속의 화가얼굴은 누구일까요? 바로 목이 잘린 골리앗이다.
목이 잘려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골리앗의 모습을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차용하여 표현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방탕한 범죄자 수준의 사생활에 대한 참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치 연극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두 주인공 같은 장면은 카라바조가 즐겨 사용하던 극명한 빛의 대조를 통해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색다른 해석을 주장하는 이들은 다윗은 화가의 어린 시절 모습을, 골리앗은 화가의 성인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며, 이 작품을 이중적인 자화상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기도 한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의 또 다른 모습은 아래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카라바조, 예수의 체포, 캔버스에 유화, 133.5*169.5cm, 1602,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위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7명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요한, 예수, 유다, 세 명의 군인 그리고 오른손으로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카라바조이다. 그는 예수가 군인들에게 체포되는 순간, 그리고 그의 제자들인 요한의 외면과 유다의 가증스러운 키스 장면을 어둠을 깨는 등불로 밝히고 있다.
그는 체포를 돕기 위해 등불을 든 것이 아니라, 배반의 현장을 알리기 위한 목격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표현한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등불을 통해, 배반의 현장을 알리는 역할을 자신에게 부여함으로써 살인 등 사회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그의 사생활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으로 나폴레옹의 사랑을 받은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
독자들도 어린 시절 노트의 표지로 익숙하게 보던 그림 중에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고 땅땅하고 못생긴 나폴레옹을 멋진 말을 탄 기백 있는 장군으로 묘사한 작품을 그린 화가가 바로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이다.
그는 프랑스의 혁명 시기에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황제의 왕실 화가이자 선전화의 대가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궁정 화가가 되어 그린 그림이 유명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다.
루브르 미술관을 방문했던 독자라면 그림을 봤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정도로 그 크기나 디테일이 놀랍도록 크고 화려한 작품이다. 역사화의 교본 같은 작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 캔버스에 유화,6.21*9.73m,1805~1807, 파리 루브르미술관
그림은 1804년 12월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는데, 황제가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은 황후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포착해 그리고 있다.
황제의 실제 신체는 작고 뚱뚱한 모습인데, 이 작품에서는 키가 큰 건강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 중앙 2층의 높은 곳에는 황제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고, 대관식 현장은 많은 군인들과 여성들이 둘러싸고 있다.
많은 인물들 중에 작가인 다비드도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얼굴을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작가는 중앙의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있는 부분의 3층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 이미지는 그의 위치를 표시한 부분이다.
위와 아래왼쪽은 대관식 그림속 화가모습, 오른편은 다비드의 자화상
그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비교적 자화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장면은, 오른쪽 <자화상>에서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대관식 장면에서도 자신을 장미꽃 같은 훈장을 차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점이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 최고의 선전가로서 훈장을 단 그의 모습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화가들은 왜 그림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어을까?
화가들은 어떤 이유로 그들의 그림 속에 은밀하게 또는 대담하게 자신의 얼굴을 넣었던 것일까?
자화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자의식이 들어간 표현 방법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기에는 예술가의 자의식은 창의성을 중시하는 가치로 여겨졌다. 이런 까닭에 작가들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캔버스에 특별한 형식의 서명처럼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은밀하게 또는 대담하게 삽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운성의 <가족도>에도 서명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2013년 2월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다. 바로 그의 얼굴이 들어간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명이 없더라도 그의 얼굴이 작품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이다. 라파엘로나 카라바조, 자크 다비드가 그림들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얼굴인식이 본인을 인증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있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얼굴은 자기를 인증하고 자의식을 나타내는 표현 방식인 것이다. 바로 나의 자아가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