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캐던 날의 약속
어제는 강풍을 동반한 제법 많은 봄비가 내렸다. 전날보다 10℃ 이상 떨어져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아침이다. 며칠 온화한 날씨 덕에 꼭 다문 입술처럼 잠겨 있던 자목련이 마침내 속살을 열고, 겹겹이 벌어진 꽃잎 사이로 무지갯빛이 조심스레 스며들었다. 노란 개나리와 분홍 진달래, 벚꽃이 뒤이어 피어나며 세상은 순식간에 화원이 되었다. 그러나 봄의 끝자락을 시샘하는 한파주의보는 막 피어난 가녀린 꽃잎을 보라색으로 얼어붙게 한다.
산책길 끝, 햇살이 오래 머무는 구릉에는 분홍 누비 조끼를 입고 머릿수건을 두른 할머니 네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손끝에는 작은 봄이 들려 있다. 비닐봉지 속에는 어린 쑥과 냉이, 민들레, 씀바귀가 담겨 있다. 아직 손가락 반 마디밖에 자라지 않은 쑥은 진한 향이 올라왔고, 봉지는 봄기운으로 폭신하게 부풀어 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기억은 어린 시절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고향집 뒷산은 진달래꽃으로 분홍 물결이다. 보랏빛 제비꽃이 인사하는 둔덕과 보리 밭고랑, 발끝에 닿던 부드러운 흙의 감촉, 손끝에 스미던 풀 내음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아랫마을 이모 집은 부농으로 8남매와 일꾼이 시끌벅적하고 활기차다. 놀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족하여 놀러 가는 마음은 신나고 반가움으로 가득했고, 넓은 과수원의 나무는 우리를 반기듯 가지를 흔든다. 두 살 많은 사촌 언니와 동갑내기 명숙이와 함께 바구니를 들고 나서면 밭고랑 사이는 온통 봄나물이다.
달래와 냉이는 뭉툭한 칼로 주변 땅을 밀어 올린 후 살살 흔들며 뽑아 흙을 털어내고, 씀바귀는 여러 갈래로 깊이 박힌 뿌리를 따라 조심스레 호미를 사용하여 캐낸다. 우리는 경쟁하듯 각자의 바구니에 봄을 한 움큼씩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은 이모의 손을 거쳐 가마솥에서 삶아졌고, 쌉싸래한 나물로 밥상 위에 올랐다. 집 된장에 냉이와 달래를 듬뿍 넣고 땡고추 두 개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가 풍기는 냄새에 이끌려 식구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온다. 양푼 가득 담긴 나물비빔밥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더해 비벼 먹던 그 맛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함께한 계절의 보약이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며 숟가락을 부딪치며 다투던 순간은 기억 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모는 바가지에 나물을 가득 담아주시며 “아버지는 씀바귀를 좋아하시지.” 하고 더 얹어주시던 손길에는 말로 다 담지 못할 정이 스며 있었다.
유년 시절 그 모든 순간은 기억 속의 계절로 남았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명숙이는 여전히 봄 같은 60대 중반의 삶을 살아간다. 밝고 화통한 성격,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 우리는 가끔 만나 지난 시간을 꺼내 놓고, 하늘의 별이 되신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를 추억하며 그리움을 더한다. 동갑인 명숙이는 친자매 이상으로 서로 속마음을 나누는 특별한 이종사촌이다.
지난 1월, 숙의 생일에 다시 모였고 다가오는 봄, 사과나무가 하얀 꽃물결이 일 때 함께 고향에 내려가자고 약속했다. 쑥도 캐고, 살구꽃과 사과꽃 아래를 걸으며 어린 날을 재현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난달 그는 집에서 어지럽다며 쓰러진 후 '급성 림프 형 백혈병'이라는 춥고 삭막한 겨울이 찾아와 투병 중이다.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병상에 누워 있고 갑작스러운 '꽃샘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가족에게 헌신하며 딸 둘을 결혼시켰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다. 입원실에 머무는 시간은 잠시 쉬어가는 길목일 뿐이고. 가족에게 미안해할 필요도, 자신을 원망할 이유도 없다고 마음을 굳건하게 먹으라 이른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지금의 의술은 특별하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면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자고 했다. 가족의 도움으로 다행히 수술은 잘되었고 너무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온전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 정신을 모으라고 손을 꼭 잡아주었다.
봄은 계절을 건너 간신히 피워낸 꽃을 서슬 퍼런 '꽃샘추위'로 멍들게 심술을 부린 끝에 유순하게 온다. 수없이 움츠러들면서 끝내 꽃을 피워내듯, 명숙이도 고단한 삶과 투병의 격랑 속에 잘 관리하면 건강한 일상을 맞을 거라 믿는다.
이 추위가 물러간 자리에 더 깊어진 향기로 다시 피어날 꽃을 기대한다. 내년 봄 고향의 과수원 한복판에서 봄 마중하며 나물을 캐며 웃게 된다면, 그 웃음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함께 견뎌낸 시간의 무게만큼 단단해진 가족의 사랑이 될 것이다.
일상의 한가운데 변덕스럽고 뼈 시린 "꽃샘추위"는 소나기처럼 찾아오지만, 조만간 그친다. 오늘은 명숙이 좋아하는 고향의 맛, 냉이와 달래를 담뿍 넣어 된장찌개와 씀바귀나물을 준비하여 완연한 봄맛을 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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