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한 날의 쓸쓸함

낙화(落花), 그리고 남은 것들

by 수련

꽃이 화사하게 만개한 날, 왜 쓸쓸함을 느끼고 눈물이 흐를까요?


지나친 아름다움은 만족감이 아니라 마음의 슬픔을 낳는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어지듯, 꽃이 환할수록 그 소멸할 순간을 맞이할 서러움이 먼저 밀려온다. 몽글몽글한 꽃송이의 반짝이는 눈부심 앞에 마음이 서늘하다. 감수성의 결함보다는 시절에 따르는 유한한 삶의 진심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활짝 펴낸 절정에 이른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 마음이 비장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공원으로 나선다.

잔디밭에 부자(父子) 셋이 캐치볼을 한다. 챙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40대 아버지와 아직 힘이 부족한 우윳빛 볼이 발그레한 초등학생 막내는 다부진 '퍽' 소리로 아버지의 공을 받아내고, 키가 훌쩍 커버린 상고머리 중학생 형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공을 아버지 키를 넘어 멀리 날려 보낸다. 몇 번을 반복하자 "던진 놈이 주워 와!"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호통에 사춘기 아들은 투덜대며 뛰어간다. 성장하는 과정은 저렇게 넘치는 힘을 유연하게 다루는 법과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익히는 일인 듯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풍경을 렌즈에 담는 엄마가 입을 삐죽거리는 큰아이에게 손 하트를 보내며 웃고 있다. 그 미소 속에 응원한다는 사랑이 들어 있다.


허리 굽은 노부부가 마주 잡은 손에 의지해 느릿느릿 산책로를 걷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오랜 시간을 함께 견딘 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림이 눈부시다. 나무 위 직박구리가 짝을 부르고, 대여섯 살쯤 보이는 꼬마 서너 명이 놀이터 옆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상금을 주겠다는 젊은 아빠의 공약에 아이들이 허공을 향해 헛손질하며 까르르까르르 명랑하다. 인간과 새와 꽃이 한 공원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4월 봄날을 만끽한다.


공원 잔디 위 산비둘기 뒤뚱거리며 연한 냉이꽃을 쪼아 먹는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부리로 잔디를 톡톡 파헤치면 꿈틀대는 애벌레와 지나가는 개미는 특식이다. 사람이 바짝 다가가도 날아오르는 수고를 아낀다.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가, 지나가면 다시 돌아와 대지의 식탁에서 먹방을 즐긴다. 그 느린 행동은 나태인가 지혜인가. 공원의 까치나 비둘기는 동네 사람을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려움이 없다. 사람만이 쓸데없이 날아오르고, 앞만 보며 달리다가, 그 사이 자괴감에 지쳐간다.


시절에 따라 산수유가 지고, 매화가 지고, 벚꽃이 진다. 그 자리에 영산홍과 쌀밥 같은 조팝나무꽃이 핀다. 꽃의 교대는 조용하고 질서 있다. 어떤 꽃도 피고 지는 순서에 대하여 억울해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만이 지는 꽃잎을 슬퍼하고, 새로운 것을 아름답다 말하고, 그 아름다움 앞에서 또 쓸쓸하다고 한다. 이 순환하는 계절의 구조가 어쩌면 봄의 본질인 듯하다. 그늘진 둔덕에는 막대사탕 같은 토끼풀 꽃과 보라색 제비꽃이 소리 없이 피어 있다. 화려한 벚꽃 아래서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꽃들이 '나도 여기 있다'라고, 손짓한다.

해가 저문 공원은 낮과 다른 얼굴을 한다. 수은등 아래 봄밤의 꽃들에서 화려함이 걷히면 윤곽만 남는다. 그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산기슭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가지마다 연둣빛 새잎을 틔운다. 꽃보다 소박하지만, 오래 바라보게 된다. 여린 잎사귀들은 말하지 않아도 눈길을 끈다. 화려하지 않아도 사랑스럽다.


봄이 되면 산으로, 들로 꽃을 보러 나간다. 그러나 눈으로 채우는 호강이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꽃 앞에서 일렁이는 감정은 결국. '나도 저렇게 화려하게 피고 싶다'는 오래된 갈망. 자기 삶의 절정을 살고 싶다는, 한 번쯤은 환하게 만개하고 싶다는 욕망. 꽃 앞에서 슬퍼지는 것은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봄꽃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백설희의 노래다. 음률과 가사를 공감하는 감성을 이제야 받아들인다. 봄날이 지나간다는 것보다 봄날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잊혀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수많은 인연이다.


책상 앞에 앉은 나는, 오늘 바라본 감정을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 문장을 쓰는 것은 지나간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게 조각을 모으다 보면, 가슴속에 고여 있던 쓸쓸한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며 온기를 되찾는다.


꽃잎이 바람에 실려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 서운함을 느끼는 것, 그것을 문장으로 붙잡는 것.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또 한 번의 봄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강물에 낙화하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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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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