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시간 위에 문장을 놓다

봄날의 강의실

by 수련

몽따다


수련


살며시 눈을 뜬다.


프리지아 꽃잎

납작한 민들레
목련의 봉우리에서


봄이


새초롬하게 곁눈을 뜬다.


여기저기 발산되는 남의 향기는
무시하고 고개를 내민다.




어제 내린 봄비는 공기를 한층 맑게 씻어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축축한 흙냄새와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에 스며든다. 나무마다 연둣빛 새잎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햇살을 머금은 벚꽃은 진주처럼 반짝인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잎이 흩날리며 볼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학습관 건물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하늘 거리는 꽃잎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우러진다. 문학인의 삶이란, 이렇게 잠시 멈춰 서서 그윽한 눈으로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행복한 글쓰기 프로젝트 ON!’ 수업을 모니터 하는 날이다. 이 수업은 3년 이상 지속 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지난해부터 모니터단으로 인연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 참관 수업을 한다. 강의실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한 수강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따뜻한 목소리와 잔잔한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이곳은 단순한 배움의 자리를 넘어,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쉼터 같은 곳이다.


수강생들은 5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다. 손등에 새겨진 주름과 느린 몸짓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만, 눈빛만큼은 유난히 맑고 투명하다.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 여전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몽따다’. 동사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뜻'의 낯선 단어다. 학습자들은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즉석 시를 완성하고 칠판에 쓰고 낭송하는 방식이다. 종이 위에 펜이 스치는 사각거림이 교실을 채운다. 잠시의 침묵 뒤, 시어들이 물 흐르듯 흘러내린다. 머뭇거림 없이 써 내려가는 모습에 오랜 시간 참여하여 연습한 실력의 깊이가 느껴진다.


칠판에 적힌 시들은 순수하며 투박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꾸밈없는 진심이 살아 숨 쉰다.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 사이로 지나온 시간이 묻어난다. 좋은 글이란 결국 얼마나 오래 품고 완숙된 생각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이미지 AI

한 어르신은 조용히 말한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자서전을 쓰고 싶어요.” 그 말끝에는 떨림이 묻어 있고, 눈빛은 깊고도 아련하다. 또 다른 73세 수강생은 정년퇴직하기 일 년 전부터 글쓰기반에 참여하여 버킷리스트인 책 한 권 집필하기로 다짐했고 이미 출간을 했다고 한다. “꾸준히 읽고, 꾸준히 쓰는 게 비결입니다.” 담담한 목소리 속에서 굳건한 생활이 엿보인다.


강사는 칠판의 시를 하나씩 짚어주며 말한다.

“꽃을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오늘 김 선생님이 진달래이고, 박 선생님이 목련이에요.”

순간 교실 안이 환하게 밝아진다. 옷의 색깔과 계절을 연결 짓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작은 제비꽃 하나에도 눈을 맞추고 꽃잎 수를 세어보는 마음, 그것이 문학의 시선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간다. 스쳐 지나가는 꽃의 향기, 어제와 다른 오늘의 공기,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 문학은 걸음을 늦추게 한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한다. 흩어진 시간을 문장으로 엮어내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강의실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에 씻긴 공기 속에서 벚꽃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바람이 스치며 꽃잎 하나가 손등 위에 내려앉는다. 그 가벼운 감촉 속에서 문득 깨닫는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나이는 열정을 막지 못한다는 것. 몸은 세월 따라 수발황락 하지만, 마음과 생각은 언제든 봄날 새잎처럼 다시 돋아날 수 있다. 오늘도 새로운 문장을 찾는다. 서툴더라도, 흔들리더라도. 언젠가 나의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기를 바라면서.



#수필 #봄 #문학교실 #감성에세이 #시 #몽따다 #브런치 #모니터링 #버킷리스트

수요일 연재
이전 11화키오스크 앞, 잠시 멈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