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앞, 잠시 멈춘 시간

편리함의 다른 이름

by 수련

기계 앞에 선 순간, 가장 쉬운 일을 새롭게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 공원으로 향하는 길 위에는 막 겨울을 밀어낸 햇살이 내려앉아 있다. 춘분을 지난 빛은 조심스럽게 번졌고, 바람은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을 가만히 흔들었다. 산수유는 가지 끝에서 작은 별처럼 흔들리고 있고, 매화는 아직 다 피지 못한 얼굴로 봄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50분을 걷는 동안, 생각은 맑아졌고, 발걸음은 느려졌다.

운동을 마치고 벤치에 앉았을 때, 수영장에서 함께 운동하던 K를 만났다. 60대 후반의 그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앉자, 요즘 노인들이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있는데, 사람을 못 만나는 기분이야.”

며칠 전 고장 난 냉장고 때문에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는데, 상담사 목소리를 듣기까지 몇 번을 전화하고 오래 기다려야 했다고 했다. 보이는 ARS 기계음은 정확했지만, 그 속에는 시원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은 디지털 시대로 편리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편리함이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K는 은행 업무도 민원 업무도 직접 사람을 통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젊은이에게는 익숙한 방식이, 신중년에게는 매번 처음 접하는 일처럼 긴장되는 일이 된다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일요일 오전 패스트푸드 매장은 한산했고, 우리를 맞이한 것은 사람의 온기는 없고 인사 대신 서 있는 키오스크 두 대였다.

나는 태연한 척 기계 앞에 섰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낯섦을 알고 있다.

화면 속 메뉴는 길고 낯선 이름이 이어졌다.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주문은,

또 다른 선택을 계속해야만 한다.


빵은 구운 빵인지 호밀빵인지 고르고, 채소를 고르고, 소스를 고르고.

화면을 넘기며 선택은 이어졌고, 이조합이 맞는지 맛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었다.

결국 맨 처음화면으로 돌아와 추천 메뉴를 눌렀다.

선택이라기보다, 포기와 비슷한 결정이었다.

샌드.jpg


처음에는 신중하게 그와 의논하면서 추가메뉴를 터치했다.

우리 뒤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등 뒤에서 기척이 들린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몇 명이 내 뒤에서 길게 기다리고 있다.


특별히 말은 없었지만, 뜨거운 시선이 뒤통수가 뜨거워진다. 손놀림이 급해졌다.

같은 버튼을 다시 누르고, 이미 지나간 화면을 찾느라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결제 단계에 이르렀을 때, 샌드위치와 샐러드의 수량은 두배로 늘어나 있었다.

개수를 정정하고 카드를 끼웠지만, 한 번에 인식되지 않는다.


짧은 정적이 흐르며 등에는 식은땀이 난다. 그 순간, 나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시험받는 입장이 된 것 같았다.

다시 카드를 옆으로 긁으며, 방향을 바꿔보고,

겨우 결제가 끝났을 때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아닌 일이지만, 쉽게 지나갈 수 있는 순간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말없이도 충분히 애썼다는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응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사소한 샌드위치 하나를 사기 위해

마음속에서 작은 용기를 꺼내야 하는 일상이 되었을까.

호출 번호가 뜨고 잠시 후, 직원이 봉투를 건네며 말한다.

“맛있게 드세요.”

습관적인 짧은 말이었지만, 그 온기는 특별했다.

기계 앞에서 머뭇거리던 시간과 달리, 그 한마디는 곧바로 마음에 닿았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조용히 손을 마주쳤다.

작은 과제를 통과하면서 ‘그까짓 거 별거 아니네’였다.

아날로그의 시절에는 주문이란 단순한 일이었다.


눈 마주 보고 말 한마디면 충분했고, 망설일 이유도 많지 않았다.

지금은 더 많은 것을 고를 수 있지만, 그만큼 더 생각하고 오래 머무르게 된다.

낯선 이름, 복잡한 방식, 그리고 기계 앞에서의 짧은 침묵.


그 망설임은 뒤처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처음'이라는 낯선 경험이다.


K는 오늘 같이 해보며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며 “다음에는… 조금 덜 헤맬 것 같아.”라고 한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익숙함은 늘 그렇게 온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봄이 오듯이.


다음에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결제 버튼을 누르고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사람의 온기를 기억하는 손길로

세상을 만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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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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