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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음식 이야기

정월 세시풍속

by 수련

팥시루떡을 찌는 일은 정갈한 몸가짐과 정성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가마솥에 물이 끓으면 떡시루를 올리고,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시루 본을 매끄럽고 꼼꼼하게 붙였다. 시루 본이 떨어지면 떡이 설익는다는 속설이 있어, 어머니는 정성을 다하여 그 앞을 떠나지 않고 불조절을 하며 뜸을 들였다. 떡이 완성되면 떡시루를 통째로 들어다 뒤뜰 장독대에 두고 정화수를 떠놓고 어머니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정월 대보름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이웃과 정을 나누고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다. 새해 인사를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친지들에게 문안드리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오곡밥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다. 산골의 아이들에게 정월 대보름은 기다리던 축제였고, ‘내 더위’라며 장난스럽게 더위도 팔고, 논두렁에서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면, 쥐불놀이의 불빛이 마을을 수놓던 밤은 달빛보다 환했다.


대보름 전날이면 동네 언니들이 모여 집마다 밥을 가져와 큼지막한 양푼에 담고,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었다. 그 옆에서 나는 잔심부름을 하며 언니, 오빠들의 웃음소리를 따라다녔다. 첩첩산중 작은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한데 어우러지는 큰 명절이었다. 어른들은 윷놀이 한판을 벌이며 흥을 돋우었고, 아이들은 손에 깡통 횃불을 들고 마을을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정월 보름이 지나면 손 없는 날을 골라 붉은팥 시루떡을 쪘다. 지난해 가을 논에서 거둬들인 멥쌀을 물에 불려 방앗간에서 빻아온 쌀가루를 체로 한 번 더 내린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절구를 이용하여 가루를 만들고 체에 여러 번 걸러 곱게 쌀가루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가을에 수확한 무, 배추를 땅을 파고 저장한 움집에서 무를 꺼내어 무채를 쳐서 쌀가루에 섞어놓는다. 떡시루 밑에 면 보를 깔고 무채를 섞은 쌀가루를 두툼하게 얹고 팥고물을 얹는다.


팥고물을 듬뿍 얹은 떡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가족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성 어린 고사떡이다. 이웃과 나누는 감사의 선물이었다. 떡이 쪄지는 동안 부엌 가득 퍼지는 구수한 팥 냄새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정월의 얼음장 같은 추운 날씨를 안마당까지 온화하게 했다.


떡이 완성되고 어머니는 기도를 마치면 1시간 정도 놓아두었다가, 떡을 접시마다 나누어 광에, 마당에, 헛간에, 우물 등 집안 곳곳에 한 접시씩 놓았고, 올해도 무사하고 가정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는 의식을 한다. 이웃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며 "가족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길 바라네"라고 덕담을 건네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따뜻한 정이 묻어났다.


무를 넣은 팥시루떡은 찹쌀이 아닌 멥쌀로 두툼하게 만들었다. 무에 들어 있는 효소가 쌀의 소화를 돕기에 체할 염려도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떡 한 조각에 시원한 동치미 한 술을 곁들이면 보들보들한 식감과 어우러져 속이 따뜻해졌다. 이 떡은 봄을 앞두고 농사의 시작을 준비하며,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머니는 매년 음력 10월 상달에도 보름이 지나면 좋은 날을 선택해 부엌에서 팥시루떡을 만들었다. 먼저, 농사지은 찹쌀가루를 준비하고 햇볕에 말린 호박고지를 물에 살짝 씻어, 검지 마디만큼씩 잘라 쌀가루에 섞는다. 엄마의 작은 시루에 찹쌀가루와 팥고물을 얹어 얇게 편 후 몇 번을 반복한다. 무시루떡은 두툼하지만, 찹쌀로 만든 팥시루떡은 얇은 게 특징이다.


떡이 얇아서 낭창낭창하다. 찹쌀로 만들어져 찰기가 쫀득하면서 떡 위에 얹힌 팥고물은 고소하고, 달콤한 호박고지가 들어가 있어 세상에 없는 특별한 어머니의 손맛이다.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만든 떡을 내오시며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아무 탈 없이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떡이란다"라고 말씀하시며 입에 넣어 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팥은 몸속의 불필요한 수분을 빼주고, 찹쌀은 비위를 튼튼하게 하여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했다. 찹쌀과 팥을 함께 섞어 떡을 찌면 궁합이 잘 맞아 속이 편안하다.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붉은팥 시루떡을 만들고 집안 곳곳에 팥을 뿌렸다. 붉은팥이 잡귀를 막아주고 액운을 피하게 해 준다는 믿음이었다.


지금도 전통시장을 거닐다 떡집을 보면, 붉은팥시루떡과 달큼한 호박고지가 들어있는 찹쌀 시루떡을 눈여겨보게 된다. 농사를 지으며 6남매를 건사하는 고단한 몸으로 철마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정성을 들였던 숭고한 모정, 방앗간에서 편하게 떡을 주문할 수도 있는데, 정성으로 하는 일이라고 어머니는 하늘에 별이 되던 그해에도 손수떡시루를 앉혔다. 시골집에는 아직 어머니의 떡시루가 광속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 보기에도 아담하고 작은 떡시루에 한 겹, 두 겹 정성을 담아 쪄낸 정성 어린 손길과, 떡 한 조각 속에 담긴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엄마의 귀한 사랑이었음을 생각한다.







팥고물 만들기

팥은 깨끗하게 씻어 삶아준다, 처음 삶은 물은 버리고 찬물로 헹군다. 찬물로 헹군 팥을 냄비에 넣고 센 불에 끓인 후 중불에서 40분 정도 푹 끓여주고 물기 없이 고슬고슬할 때까지 계속 저어준다. 보슬보슬하게 되었을 때 설탕과 소금을 조금 넣고 고루 섞어 식힌다. 방망이로 짓찧으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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