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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CCO Aug 15. 2024

영원한 누나 그리고 언니,
유관순 열사의 묘를 찾아서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감사한 분이신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유관순 열사는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위치한 망우리 공동묘지 무연고 합동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인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시는 유관순 열사님의 혼은 어쩌다 무연고 합동묘역에 있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되는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에 당시에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4월 1일에 고향이었던 천안에서 친지들과 함께 아우내 만세 운동을 주도한다. 



하지만, 그녀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게 된다. 하지만 옥 중에서도 그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20년 3월 1일에 같이 수감된 사람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다른 사람들도 유관순 열사를 따라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출소를 이틀 앞둔 1920년 9월 28일에 방광 파열로 인해 순국하게 된다.


(C) 롯데컬처웍스


이에 그녀의 모교였던 이화학당에서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한다. 하지만, 일본은 그녀의 묘역의 위치를 극비사항으로 분류해 알리지 않았으며, 묘비도 없이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당시에 그녀가 얼마나 대한독립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일본은 이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30년대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는 지방 빈민이 몰려와 주택난이 발생한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땅을 빼앗긴 지방 빈민들이 생계를 위해 일을 구하고자 도시인 경성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었다. 이에 일제는 이태원 공동묘지를 포함한 서울의 여러 공동묘지를 주거 지역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계획을 발표하고, 공동묘지의 묘들을 망우리로 이장한다는 공고를 낸다.


(C)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정해진 기간 내에 이장되지 못한 2만 8천 기의 무연고 묘들에 대해 일제는 함께 화장해 합장했는데 유관순 열사의 묘도 무연고 묘 중 하나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우내 만세운동 때 돌아가셨고, 그녀의 오빠인 유우석은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당시에 공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있어서 그녀의 묘를 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유해를 찾을 수도 그리고 식별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다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와는 달리,

(C) 대전도시재생지원센터

무연고 공동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망우리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때 태조가 본인의 능터를 마련하고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이제야 내가 근심(근심 우)을 잊는구나(잊을 망).” 말에서 유래해 지어졌다. 즉, 망우리는 근심을 잊는 곳인 것이다.


유관순 열사님은 국가의 근심을 덜어내기 위해 그녀의 젊음과 목숨을 불태웠다. 유관순 열사님께서 근심을 잊고 행복하실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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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기획팀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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