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낙향하고 이곳의 개가 한때 9마리까지 늘어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인심 좋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사람들이 자꾸 개를 맡겼다. 이곳에 오면 모두 마당개 처지인 줄 모르고 말이다. 짧은 목줄에 묶여 다닥다닥 붙은 개집에서 녀석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종류도 크기도 다양한 개들은 종종 혈투를 벌였다. 일종의 서열 싸움이다. 지들끼리 서열 싸움을 벌여봤자 소용없다. 이곳의 서열은 아버지가 정하니까.
서열 1위는 풍순이라는 암캐였는데, 풍산개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사납기가 대단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새끼를 낳고, 아버지는 그 새끼를 장에 내다 팔아 용돈을 벌었다. 고라니도 잘 잡고, 싸움도 잘하니, 아버지 입장에선 제일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풍순이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제일 사랑을 많이 받던 개는 주인의 허벅지를 무는 바람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아 장에 팔렸다. 새끼를 낳아 예민해진 모양인데, 아버지는 그런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주인을 무는 개는 소용없다며, 언제든 서열 1위도 꼴찌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아버지 세상에선 개만 서열이 있는 게 아니다. 가족에게도 순위를 매긴다. 물론 기준은 아버지의 애정순이다. 이곳의 서열 1위는 당연하게도 아버지 자신이다. 아버지에겐 자신이 제일 소중하고, 귀하다. 다음 서열 2위는 엄마다. 부부니까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엄마는 자신이 2위인걸 좋아하지 않는다. 순위가 높을수록 집착은 심해지고 자유는 박탈된다. 엄마는 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다음 3위는 아들일 것 같지만, 아니다. 자식들을 모두 제치고 손녀다. 아버지에겐 첫 손녀이자, 나에겐 큰 딸.
첫 손녀가 태어나자, 키워준다는 명목으로 돌도 안 된 딸을 데려가셨다. 젊은 애가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일하라고. 나도 처음 해보는 독박육아가 힘들어 속으론 휘파람을 불었다.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며 결혼 전과 같은 자유를 누렸다. 친정과 신혼집은 지하철 끝과 끝이라 나는 주말에만 딸을 볼 수 있었다. 그땐 몰랐다. 아버지의 빅픽쳐를. 아버지 손에서 자란 내 딸은 점점 아버지의 늦둥이로 자라났다. 남편의 눈빛은 불안해지고, 나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이리하여 내 큰 딸은 자식들을 모두 제치고 서열 3위로 등극했다. 이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4위다. 분명 시골에 내려와 살기 전까지만 해도 나였다. 큰딸이자, 아버지 편을 가장 잘 들어주는 존재였으니까. 그 무렵 아버지는 아들보다 딸이 낫다는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에 내려온 지 몇 년을 못 넘겨 4위는 남동생에게 넘어갔다. 4위만 내어준 게 아니다. 내가 아버지와 심리적 거리를 넓히는 사이, 서열은 곤두박질쳤다. 심지어 아버지 핸드폰 단축키에서도 내 번호는 사라졌다. 바뀐 핸드폰 속 사라진 번호를 확인하고 살짝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열이 뒤로 물러날수록 전화 오는 횟수도 줄고, 그만큼 자유도 생겼다. 귀농 5년 만에 나는 내다 버린 자식, 그 언저리가 되었다.
순위가 내려가자, 아버지의 공격력이 높아졌다.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지적을 했으며, 재활용품이나 쓰레기봉투도 함부로 집밖으로 내놨다가는 공격이 들어왔다. 어느 해에는 외부에 설치된 기름통과 보일러를 연결하는 금속관에서 등유가 줄줄 새는 일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아버지였다. 쥐가 갉아먹은 것 같다며 금속관을 갈라고 했다. 확인해 보니, 정말 등유가 새고 있었다. 금속관을 갈려면 솜씨 좋은 아버지가 필요했고, 우리 부부는 아버지에게 납작 엎드렸다. 참,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애쓴다는 사실이다. 무의식에 저장된 '인정욕구'인데,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면 어느새 무의식이 작동해 아버지의 심사를 살피고 잘하려고 애쓰다는 것이다.
그다음 순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 도토리 키재기다. 이제 중요한 건 꼴찌. 과연 아버지 마음속 서열 꼴찌는 누구인가! 누구나 예상하듯 사위다. 아버지는 핏줄이 중요한 사람이고,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사위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위에게 박힌 미운털은 뽑히지 않았다.
남편은 꼴찌여도 상관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키우는 개 진순이보다도 자신이 서열이 낮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는 남편. 어떻게 해도 아버지 맘에 들기 어렵다면 차라리 눈에 안 띄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다 우연히 사위가 한 '닭볶음탕'을 맛보시고는 '사위는 일머리는 없지만, 요리는 잘한다'며 사위에게 심심하면 닭볶음탕을 주문했다. 그 후로 꼴찌는 면했다.
애들이 크고, 나와 남편이 늙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집구석에 박혀 창문을 닫고 문을 걸어 잠근 후, 아버지의 서열을 분석했다. 그 무렵 유튜브로 공부한 심리학적 지식을 토대로 우리는 아버지가 '나르시시스트'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의 '나르 지수'는 만점에 가까웠고, 아버지의 행동은 '나르 교과서'와 같았다. 나르 교과서 같던 아버지가 사라졌다. 서열을 정해주던 아버지가 사라졌으니, 이제 평화가 온 것이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사라진 자리에 아무르 표범이 나타났다."
어느 날 둘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딱 봐도 시베리아 호랑이는 아버지를, 아무르 표범은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내가 왜?"
그러자 딸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다들 엄마 눈치만 보잖아!"
헉, 내가 아무르 표범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