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마음의 틈 <산책하는 침략자>

일본영화도 좋아하니?-(1)

by Mr Pink

글 특성상 산책하는 침략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영화를 감상하시고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침략'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침략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속 개념들을 조금씩 빼앗아간다.

사랑, 가족, 소유, 죄책감, 책임

이렇게 중요한 단어들을 너무 무심하게 가져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그걸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가 생긴 건 맞는데

'그게 왜 문제죠?'라고 되묻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그저 일상을 계속한다.


이 영화에서는 무서운 장면이 따로 필요 없다.

그냥 길을 걷다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뺏기고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장면만으로

이미 충분히 불안하다.

오히려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 방식 때문에 더 이상해진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침략자보다 더 이상한 건

'침략당하는 쪽'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서 무엇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습관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를 하나씩 잃는데

그걸 잃었다는 사실조차 흐릿해져 버리는 사람들

그 표정이 이 영화의 중심이고,

그 표정이 이 영화를 조용하게 잠식한다.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붕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아주 작은 틈이 생기고

그 틈이 조금씩 벌어지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풍경이 된다

사라져 간 개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시 떠올리려고 애쓰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미 빠져버린 파일처럼

그냥 찾을 수가 없다.


그게 더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잃어버린 감정을 대부분 그 순간엔 모른다

사라진 뒤에야 원래 있었던 자리의 공기를 기억한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거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서서히 사람의 내부를 파먹도록 만든다.

'나는 무엇을 잃고 살아왔을까?'

'누가 그걸 가져갔을까?'

'아니, 애초에 그게 내 안에 있었던 적은 있는 걸까'


침량이란 단어는 거창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침략은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사소하게 당하고 있는 종류의 일들이다

마음속 개념이 하나 사라져도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살아간다

그냥 조금 멍해질 뿐이다

그리고 그 멍함에 익숙해지면

그게 원래 나였던 것처럼 굴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꼈다

개념을 잃어버리는 게

이 영화처럼 조용하게 일어난다면

사람은 정말 많은 걸 잃고도

별일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점이 조금 씁쓸했고

조금은 현실적이었다


침략자는 결국 우리에게 물어본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나요?"

그 질문이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대답할 말이 없어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스스로 정의하지 못한 단어부터

가장 빨리 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 사라지는 과정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 아무렇지 않음이 가끔은 가장 무서운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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