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도 좋아하니?-(3)
글 특성상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영화를 감상하시고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처음 보면 사랑이야기인 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방향이 생기고,
그 방향 때문에 관계가 만들어지는 이야기처럼 보이니깐
하지만 조금만 더 보다 보면
이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 흘러가며 만들어놓는 '자리'에 관한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
조제는 스스로의 세계를 만든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의 세계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다
낡은 책들, 오래된 장난감,
아침 햇빛이 들어오는 특정한 각도, 손에 닿는 사물의 촉감
그런 미세한 것들로 세계의 균형을 잡고 버틴다.
그 세계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건
초대의 느낌보다
구조가 흔들린다는 감각에 더 가깝다.
조제는 그 흔들림을 오래 바라본다.
츠네오가 조제의 세계에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이 어떤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되기도 한다.
츠네오는 조제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기 세계의 문 하나를 열어준다
문이 열린 순간부터
이 관계는 이미 끝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 씁쓸하지만,
이 영화는 원래 그런 결로 흘러간다.
이 영화가 나에게 인상적인 이유는
크게 흔들리는 장면보다
조용히 멈춰 있는 순간들이 더 강하게 나에게 남기 때문이다.
조제의 방 한가운데 굴러다니는 펜, 스치는 바람,
침묵 사이로 지나가는 조제의 아주 작은 표정들
그 모든 것들이
조제가 버티는 세계의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경계는
츠네오가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영화의 정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점이 온다.
조제가 너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대사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이 대사는 슬프지도 격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그 차분함이 깊게 기억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리와 그 자리를 잃어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섞여있다.
이 영화의 감정은 바로 그 얇고 조용한 층위에서만 움직인다.
조재의 선택은 '친구로 남기' 같은 간단한 형태가 아니다.
관계는 정리되지도 않고 결론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좋았던 순간과 불편했던 순간
둘이 잠시 기대어 있었던 구조만이 흔적처럼 남는다.
사라지는 건 관계지만
남은 건 그 빈자리를 둘러싼 공기다.
츠네오와 조제는 정확히 말하면
서로에게 잠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는 감정보다
그 필요가 만들어낸 '자리'가 더 중요했다.
그 자리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닳아 없어지고 사람은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은
조개껍질처럼 몸 어딘가 깊은 곳에서 계속 굴러다닌다.
부서질 듯 가벼운데 이상하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감정으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사라지는 감정의 모양을 다루는 영화다.
아프지 않아도 오래 남고, 오래 남아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이 영화를 조용하게 감싸고 있다.
조제는 끝까지 그 자리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남긴 여운도
그 조용한 세계의 일부처럼 오래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