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데려가는 방향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너 한국인인데 한국 영화는 안 좋아해?-(1)

by Mr Pink

글 특성상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영화를 감상하시고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폭력은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늘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의도도 없이 시작된다.

누군가 밀렸고, 누군가 기분이 나빴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어쩌다 있었던 것뿐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이 작은 순간들이 어떻게 사람을 다른 자리로 밀어 넣고,

그 자리가 어떻게 또 다른 폭력들을 만들어내며,

그 폭력이 결국 누구의 삶을 어디까지 데려가는지를

네 개의 단편으로 나눠 보여준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폭력을 비난하지도, 폭력이 생기는 이유를 분석하지도 않는다.

대신 폭력이 생기는 모든 순간에서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선택으로 움직인다고 믿지만 그 선택을 만들어낸 건

대부분 본인이 알지 못하는 자리와 상황들이다.

누군가를 향한 충동, 반복되는 행동, 사소한 동경,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건 늘 같은 것이다.

폭력이 지나가도 세계는 아무 변화가 없다.


이 글은

그 네 개의 조각을 여러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영화가 보여준 세계의 움직임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옮겨보려는 작업이다.

감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설명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영화가 보여준 순서대로,

사건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갈 것이다.


패싸움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들 비슷한 하루를 살았고, 비슷한 얼굴이었고,

비슷하게 심심했다.

한 명이 밀렸고, 누군가 발을 걸었고,

그다음 장면에서는 이미 몇 명이 서로 붙잡고 있었다.


싸움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생긴다.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고, 특별한 감정도 없다.

일단 시작되고, 일단 끝난다.

그리고 다음 날은 또 그대로 흘러간다.


그날 밤 몇 명은 피를 대충 닦고 집에 갔고,

몇 명은 다음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폭력의 시작은 늘 이 정도의 사소함이다.

사소한 순간이 문제를 만들고, 문제가 또 다음 문제를 불러오고,

그 과정에서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묻는다고 해도 대답할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악몽

싸움이 하루 두 번 반복되면 일상이 되고,

일상이 되면 감정은 사라진다.

누군가는 분노로 싸웠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몸의 습관이 먼저 움직인다.


반격하고, 도망치고, 붙잡히고, 다시 부딪히고

이 반복은 악몽이라기보다

그냥 '해야만 할 것 같은 행동'에 가깝다.

감정이 붙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지속된다.


이 단편에서 폭력은 분노의 표츌이 아니라

분노의 소명이다.

사람들은 아픈 걸 금방 잊고, 습관은 천천히 잊는다.

그러니까 폭력은 감정을 줄이는 방향으로 굴러간다.


이 단편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폭력이 잔인해서가 아니다.

폭력이 끝났을 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그저 계속되고, 계속된다는 이유만으로 유지된다.


현대인

세 번째 단편에는

드디어 '사람 위에 있는 세계'가 등장한다.

학교라는 공간, 위아래가 정해진 구조,

누가 누구보다 강한지 자동으로 구분되는 질서들.


폭력은 성격이나 감정으로 생기지 않는다.

이 단편에서 폭력은 위치에서 생긴다.

자리가 사람을 결정하고,

사람은 그 자리르 바꾸지 못한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


좁은 골목에선 밀리고, 좁은 방에선 도망칠 방향이 없고,

어떤 날은 상황이 먼저 움직이고 사람은 따라간다.

세계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자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해놓는다.


이 단편의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


사람이 시스템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배치한다.

한 사람이 빠지면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다.

세계는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마지막 단편은

폭력을 멋있다고 믿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세계를 잘못 이해했고, 폭력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고,

동경을 사실로 착각했다.


그는 자신도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버티는 자세, 맞고도 웃을 수 있다는 오해,

억울함을 품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라도 되는 줄 알았다.


동경은 보통 이렇게 만들어진다.

멀리서 반짝이고, 가까이서 보면 그냥 허깨비다.

누군가는 맞아야 하고

누군가는 때려야 하고

그게 다였다.


그는 결국 '칼받이'가 되어 죽는다.

영화는 그 장면을 길게 잡지도 않고,

감정을 붙이지도 않는다.

한 사람이 사라졌고 세계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편의 핵심은 죽음 자체가 아니다.

그 죽음이 세계에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폭력을 멋있다고 믿었지만

그 세계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폭력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반복되고,

어떻게 구조가 되고, 어떻게 개인을 삼키는지를

네 개의 단편으로 나눠 보여준다.


사람들은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충동에 밀리고, 습관에 끌리고,

구조에 갇히고, 동경에 속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건 폭력도, 감정도 아니라

세계의 무심함이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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