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일주일 다녀오고서 이탈리아를 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적어도 한 달은 다녀본 후에야 이탈리아를 가 봤다고 할 수 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몇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나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지금은 각각의 도시들이 이탈리아라는 나라 속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시대를 풍미하는 국가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현지에 가보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베네치아, 천 년 역사 속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나는 베네치아를 세 번 가 보았다.
두 번은 그저 본섬과 무라노, 부라노 섬만 수박 겉핥기로 돌았었다. 산마르코 광장과 화려한 두칼레 궁전, 곤돌라를 젓는 뱃사공 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수상버스, 바포레토 종일권만 사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 그저 좋았다.
본섬 일주에는 2번 바포레토가 최고다. 카날 그란데를 통과하여 본 섬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어떤 시티투어 버스보다 편리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운 좋게 세 군데의 멋진 장소, 풍경이 추가됐다. 이래서 나는 갔던 곳을 또 가는 데 거리낌이 없다. 누구와 언제 가느냐에 따라 여행은 달라지니까.
첫 번째 장소는 같이 갔던 동행이 찾아낸 장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베네치아 어시장이다.
나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을 갈 때에는 숙소를 구도심으로 잡는다. 외곽에서 숙박하는 것과는 만족도가 다르다는 걸 수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숙소도 리알토 다리와 산마르코 광장 사이의 가장 중심지에 잡았다. 비록 1층 (우리 식으로 2층)까지 엘리베이터 없이 가파른 계단만 40개나 되어 오르내릴 때마다 고생은 했지만 물가 비싸고 공간이 한정적인 베네치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숙소와 가까운 리알토 다리 서쪽에 베네치아 어시장 페셰리아(Pescheria)가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어시장 일대는 전통 시장의 정취가 살아 숨 쉬는 멋진 곳이었다.
이태리의 대부분 전통 시장이 그렇듯이 이곳도 이른 아침부터 오전까지만 문을 연다. 14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페셰리아에 가면 신선한 생선과 해물들이 다양하게 진열돼 있다.
아침 일찍 어시장을 향해 산책을 나갔다. 아직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은 문을 열기 전이지만 카페나 빵집을 지날 때면 향긋한 빵 냄새와 커피 향이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어시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절한 규모다. 비닐 앞치마를 둘렀어도 이태리 아저씨의 세련미는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새우와 왕조개, 낙지를 샀다.
해물에는 야채와 과일을 곁들여야지.
바로 옆에는 야채시장 에르베리아(Erberia)가 있다. 샐러드 거리와 과일도 샀다. 같은 토마토, 고추도 진열된 모양새 만으로 예술 작품이 돼버리는, 눈까지 즐거운 전형적인 이태리 시장이다.
숙소에서 요리는 함께 간 주부 10단 전문가들이 했다. 요리도 적성과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 같다. 그저 남이 해주는 건 뭐든지 맛있는 내 입맛에도 특별한 저녁이다.
같은 새우도 소금에 굽기와 올리브오일에 굽기로 방법을 달리하니 두 가지 요리가 된다. 시장에서 함께 사온 특제 소스에 찍어먹으니 더욱특별한 맛이 됐다. 슈퍼에서 구입한 이태리 와인은 행복을 더해준다. 이러니 내가 와인을 못 끊지.
물가 비싼 베네치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만찬을 즐긴 시간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단했던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곳은 현재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arsenale).
1104년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영조선소다. 현재는 해군 기지로 사용되는 곳인데 2년마다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탈바꿈한다.
몇 백 미터 길이의 거대한 창고 같은 공간에 다양한 주제의 현대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현대 미술의 향기를 여유롭게 맛본 후 마지막 코스에서 전시장 밖으로 나가면 완성된 배를 출항할 수 있도록 모아두는 독(dock)이 보인다.
우리가 작품을 감상했던 전시장은 과거 제조 공정에 따라 조선소뿐만 아니라 무기고와 화약고였던 장소였다.
한 달에 수십 척의 배를 진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십자군 전쟁 때 수많은 범선과 갤리선을 만들어내며 지중해의 해양강국으로 그 위상을 떨친 현장이다.
이곳에서 수 천 명의 직공들이 분주히 배를 만들고, 건조된 갤리선들이 줄줄이 외해로 빠져나갔던 중세 시대를 상상해 본다.
아르세날레 앞 다리 위에서 비잔틴풍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작은 공화국이 강대국 투르크 제국에 맞서 수백 년을 버텨냈던 그 결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다음날 오전은 각자 자유롭게 본섬을 거닐기로 했다. 나는 산마르코 광장의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 플로리안을 가려고 길을 나섰다. 우리 숙소에서 산마르코광장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런데 광장에 가까워지면서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아예 길이 막혀버렸다.
고개를 빼서 앞쪽을 내다보니 길에 물웅덩이가 제법 보이고 50cm 정도의 높이로 임시다리 - 나무다리를 이어놨다. 광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가 좁은 나무다리로만 건너야 하니 병목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아쿠아 알타(Acqua alta).
원래 이태리어로 만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에서는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밀물과 썰물, 즉 물때에 따라 만조에 수위가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주로 가을부터 봄까지 나타나는데 만조 때 아드리아해의 북쪽에서 부는 계절풍인 시로코와 보라를 만나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말뚝 위에 세워진 도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먼저 아쿠아 알타가 시작되는 곳은 가장 낮은 지대인 산마르코광장이다. 해수면이 110cm을 넘으면 베네치아 일대에 경보가 울리고 140cm가 넘으면 구시가의 약 60%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바닥에서 물이 조금씩 퐁퐁 솟아오르는 듯싶더니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시내 광장은 10유로짜리 장화 없이는 임시 다리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원래도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인 광장이 옴싹달싹할 수도 없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쉬엄쉬엄 걸어도 5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1시간이 걸려 지나갔다.
우리가 이번에 만난 아쿠아 알타는 105cm. 나는 이 신비로운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광장 앞에서 물에 잠긴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연주자, 무릎까지 올라오는 비닐 장화를 신고 서빙하는 단정한 복장의 웨이터, 발을 올리고 물에 잠긴 야외 식탁에 앉아 맥주를 즐기는 관광객까지.
불과 두어 시간에 걸쳐 나타났다 사라지는,
태양과 달과 바람과 물이 적절히 만나 드물게 펼쳐지는 이 신기한 현상은 현대 과학으로도 불과 이삼일 전에야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J는 10유로 주고 장화를 신고는 신나게 촬영을 했다. 그리고는 선언을 했다.
"우리가 이태리에 있는 동안 센 아쿠아 알타가 온다면 나는 무조건 베네치아에 다시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