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키르기스스탄의 노상강도들

by Bora

영국에서 날아온 과태료를 완납하고 나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옛날이 좋았지.


몇십 년 전 미국에서 과속으로 걸려 딱지를 받았을 땐 모른 척 귀국하면 끝이었고, 이십 년 전 호주 여행 후 과속 통보서가 날아왔을 때도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호주에선 집요하게 5년 동안 편지를 보내왔지만 결국 제풀에 나가떨어졌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렌터카와 연계된 신용카드 정보가 있어 걸리면 벌금이 자동으로 결제된다.


여행 중에 과속으로 걸린 얘기를 하다 보면 꼬리를 물고 키르기스스탄의 악몽이 생각난다.


7년 전 여름 카자흐스탄에서 렌터카를 빌려 키르기스스탄에 들렀다.

J는 전에 혼자 키르기스스탄에 갔다가 현지 교통경찰에게 당한 얘기를 몇 번이고 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빌린 렌터카를 몰고 키르기스스탄에 들어갔다가 당일 반나절만에 7번이나 교통경찰에게 뜯겼다는 얘기였다. 나중에는 아예 현금을 준비하고 있다가 경찰이 세우면 그냥 줬다나?


설마 지금은 달라졌겠지. 우리도 옛날에는 운전면허증 뒤에 오천 원 지폐를 끼워두고 다녔잖아?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카자흐스탄에서 차를 빌려 아름다운 콜사이 호수와 카인디 호수를 보고 이틀의 시간이 남길래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 이시쿨 호수나 가보자고 방향을 잡은 게 사단의 시초였다.

카인디 호수
콜사이 호수


늦은 오후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어 어두워진 후에 이시쿨 호숫가 마을의 호텔에 무사히 들어섰다. 유명한 관광지라더니 우리나라 30년 전 유원지 같은 풍경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제법 비싸면서도 냄새나는 침구와 빈약한 호텔방은 그러려니 했다. 한국 식당이 많은 걸 신기해하면서 밤길 산책도 잘했다. 첫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차를 몰고 호텔을 나와 마을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경찰이 차를 세운다.

'왜 그러지?'

"너 음주했지?" / “No!”

위아래로 한참을 훑어보더니 그냥 보내줬다. 이게 유일하게 그냥 빠져나간 케이스.


이번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신나게 달리다 보니 저 앞에 경찰이 스피드건을 들고 서 있다. 아차!

‘너 50km 도로에서 62km로 달렸어.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내놔. 범칙금은 4000 솜 (약 8만 원)이고 블라블라...’

“8만 원? 한 번만 봐줘. 우리 외국인이야.”

지갑을 뒤져 몇 장 남지 않은 키르기스스탄 돈 1000 솜 (약 2만 원)을 쥐어주며 부탁하니 호주머니에 쓱 집어넣더니 조심해서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한다. 여기까진 내가 과속했으니 할 수 없지 싶었다.


그러나 그 뒤 20-30분마다 마주친 교통경찰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불러 세웠고 별 핑계를 다 대며 돈을 뜯어댔다.


"50km 도로에서 51km로 달렸잖아.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내놔."


"오른쪽 차선이 점선이 아니라 실선인데 차가 실선을 지나갔잖아.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내놔."

이 실선을 밟았다고 딱지를 끊는다.


"여기는 20km 속도로 달리는 지역이야.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내놔."


도로 어디에도 여기는 제한속도 얼마라는 표지판은 없다. 다 지들 멋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먼저 만난 경찰들에게게 다 뺏기고 더 이상 키르기스스탄 돈이 없다고 했더니 미국 달러도 받는단다.

- 환전 서비스


아예 영어룰 전혀 못 알아듣는 척을 해 봤다. 그랬더니 자기 휴대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어 바꿔준다.

유청한 한국말이 나왔다. 고려인이었다.

"한국분이세요? 교통경찰한테 걸렸죠? 그냥 돈 줘버리세요." 한다.

- 통역서비스까지.


나중엔 정말 열받아서

"그냥 딱지 끊어! 우리 현금 하나도 없어!" 하고 버텼다. 한 20분을 실랑이하더니,

"솔직히 말해. 지금 얼마 있니?"

“200 솜(4000원)”

"그거라도 줘." 한다.

- 할인 서비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현금 하나도 없어. 오다가 너네 경찰에게 다 털렸어.” 했더니

주섬주섬 카드결제기를 꺼낸다.

‘카드도 돼.’

- 신용카드 서비스!


하도 당해서인지 이곳의 운전자들은 반대편 차에 하이빔으로 전면에 경찰이 있다는 주의 신호를 보내곤 한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왕복 6차선 뻥 뚫린 도로에서 쌩쌩 달리던 맞은편 차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교통경찰 앞에서 시속 10km의 속도로 줄여가며 일제히 기어가던,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했던 기이한 광경이.


결국 치를 떨며 카자흐스탄 국경을 넘을 때까지 세 시간 만에 일곱 번을 뜯겼다.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을 만나자 살 것 같았다.


나는 키르기스스탄 교통경찰을 '제복 입은 노상강도'라 부른다. 명실상부한 노! 상! 강! 도!



뒷이야기.

우리는 교통경찰들이 주로 외국차를 잡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키르기스스탄에서 기사 딸린 차를 빌렸던 분을 만나서

“현지 차는 경찰에 안 걸리나요?” 물었더니

"웬걸! 하루에도 과태료를 몇 번이나 끊었는지 몰라." 한다.


이어서

"그런데 내가 키르기스스탄 숙소에서 영국애들을 만났거든. 걔들한테 교통경찰 얘기를 했더니 둘이 눈을 찡긋하며 웃는 거야. 자기들은 한 번도 안 뜯겼대. 비결을 물어보니 계속 어떤 말도 다 못 알아듣는 표정으로 버텼대. 경찰들이 지나가는 차 잡느라 바쁘거든. 딴 차 딱지 끊고 와서 말 걸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고, 한 20분 있다 또 오면 또 그렇게 버티고 했더니 나중엔 그냥 가라고 하더래."


키르기스스탄 가는 분들은 시간을 여유 있게 넉넉히 잡고 가서 이 방법을 한 번 써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