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 (5)
우리는 연말에 키토 북부의 작은 도시 아툰타키에서 두 번의 연말 축제를 경험했고, 연초에는 키토 남부의 도시 피야로에서 가면 축제를 함께했다. 에콰도르의 모든 축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잔치였다.
아툰타키에서 열리는 반도반도 축제는 흔히 ‘과부들의 축제’로 불린다. 에콰도르에서 말하는 ‘과부(Viuda)’란 실제 여성이 아니라 여자처럼 차려입은 남성을 뜻한다. 연말이 되면 에콰도르 전역에서 ‘과부 축제(Fiesta de las Viudas)’가 열리는데, 남성들이 여성 복장을 하고 짙은 화장을 한 채 과부 행세를 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유쾌한 행사다. 그중에서도 아툰타키의 퍼레이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 축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을 떠올리고, 새해를 유쾌하게 맞이하려는 에콰도르 특유의 전통이 담긴 퍼레이드다. 다양한 퍼포먼스와 유머가 거리 전체를 뜨겁게 달군다.
반도반도 축제는 내가 본 축제 가운데 단연 가장 흥겨웠다. 웃고 즐기겠다고 작정한 듯한 행렬은 관중을 끊임없이 퍼포먼스 속으로 끌어들이며 둘은 하나가 된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폭소와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참가자들의 흥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올해 축제의 주제는 '운동'이었다. 참가자는 수백 명이었지만 관중은 수만 명에 달해 구시가를 가득 메웠다. 두 시간 남짓 도심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참가자들은 온갖 장난스러운 운동기구를 들고 관중에게 악의 없는 장난을 걸며 행진한다. 맥주나 독주를 나눠 마시며 함께 즐기는 모습도 자연스럽다.
12월 31일이 되면 아툰타키는 물론 주변 도시까지 들썩인다. '이노센테스 축제와 연말 파티 (Fiesta de Inocentes y Fin de Año)'라는 이름의 성대한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거대한 인형 '이노센테스'는 순수함을 뜻한다.
가장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는 임시 관람석이 설치되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춤과 음악에 맞춰 화려한 복장과 다양한 캐릭터, 때로는 괴기스러운 분장까지 각자가 준비한 모습으로 즐겁게 행진한다.
이 축제의 진짜 주인은 관중이다. 행렬은 관중과 함께 사진을 찍고 술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지나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은 가족끼리 술과 간식을 챙겨 나와 먹고 마시며 웃음 속에서 한 해를 보낸다.
해 질 무렵 퍼레이드가 끝나면 거리는 모니고테(Monigote)가 주인공이 된다. 꼭두각시 인형을 뜻하는 모니고테는 에콰도르에서 ‘묵은해’를 상징한다. 한 해의 악운을 불태워 부정적인 기억과 나쁜 경험을 모두 떨쳐버린다는 의미의 정화 의식이다.
지푸라기나 톱밥을 채운 모니고테는 소박한 인형부터 정치인, 유명 인물, 사회적 이슈를 풍자한 모습까지 다양하다. 현직 대통령을 풍자한 인형이나, 넷플릭스 드라마〈나르코스〉의 주인공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달러를 쥔 모습으로 서 있는 모니고테도 인기 있는 소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인형을 불태운다. 폭죽을 터뜨리고 타오르는 모니고테를 바라보며 새해의 행운을 빈다.
의미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천연 재료로 만들던 과거와 달리 합성섬유로 된 헌 옷을 입은 인형이 타는 모습을 보는 건 마음이 불편했다. 하나만 태워도 매연과 고약한 냄새가 멀리 퍼지는데, 집집마다 태우니 숨이 막힐 정도다. 재치 있는 모니고테는 흥미로웠지만, 환경오염을 생각하면 이 전통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새해 첫날에는 키토 남쪽의 피야로 마을에서 가면 축제가 열린다. ‘피야로 악마의 춤 축제(Diablada de Píllaro)’라 불리는 이 행사는 에콰도르가 지정한 무형문화유산이다.
1월 1일부터 엿새 동안 매일 다른 팀이 화려한 악마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추며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 축제는 식민지 시대,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에게 강요한 가톨릭 신앙과 신체적·경제적·도덕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시작되었다. 거부의 상징으로 악마의 복장을 하고 행진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악마들은 지그재그 무늬의 반바지와 염소 발 장식을 착용하고, 머리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나 동물 가죽을 얹은 채 채찍을 휘두르며 행진한다. 마을 악단의 흥겨운 연주와 전통 노래에 맞춰 악마들이 울부짖고, 동네마다 만들어진 공연단이 거리를 채운다.
이 축제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담겨 있다. 과거 이웃 마을에서 처녀들에게 구혼하러 찾아온 순례 행렬을 막기 위해 마을 청년들이 악마 분장을 하고 쫓아냈다는 전설이다. 악마들 뒤에서는 화려하게 치장한 처녀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며 행진한다.
행렬마다 차이가 있어 잘 추는 팀의 춤 솜씨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본 탱고 댄서가 떠오를 만큼 흥겹고 근사하다.
피야로의 새해맞이 축제는 하루 만에 끝나는, 복장과 가면이 만화 캐릭터에서 좀비까지 자유분방하리만큼 다양하던 연말 축제와 다르다. 엿새 동안 매일 오후 네다섯 팀이 정해진 시간에 행진한다. 관람객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참여할 수 있어 인원이 분산되고, 비교적 여유 있게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우리는 에콰도르 제3의 도시 암바토에 머물며 축제의 마지막 이틀을 함께했다. 암바토는 17세기 무렵 중앙 안데스 계곡에 세워진 역사 깊은 도시지만,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도시와 대성당 대부분이 파괴되어 옛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오늘날의 암바토는 에콰도르의 전형적인 도시처럼 느껴진다.
암바토에서 피야로까지는 약 20km, 버스로 30분이면 충분하다. 깊은 계곡을 지나 피야로로 향하는 버스는 축제에 가는 사람들로 만원이었지만, 모두 들뜬 표정으로 유쾌해 보였다.
에콰도르의 축제는 대도시가 아니라 중소도시에서 열리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것 같다. 마을마다 고유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나라. 관객에게 장난을 치고 술을 권하는 모습은 다른 에콰도르 축제와 비슷하지만, 이 축제에는 ‘저항’과 ‘사랑’이라는 정신이 담겨 있어 더욱 특별하다.
‘서로 사랑하자’,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