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 (6)
에콰도르는 스페인어로 "적도"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적도를 가로지르는 나라 에콰도르는 국토 중앙에 안데스 고산 지대가 넓게 자리하고, 서쪽에는 해안 지대, 동쪽에는 아마존 우림 지대를 품고 있다.
서부 해안에 위치한 최대 도시 과야킬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시는 시원하고 살기 좋은 안데스 산지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 키토를 비롯한 안데스 지역의 도시들은 해발 2,500m가 넘는 곳에 있어 연중 서늘한 봄 날씨가 이어진다. 해발 1,700m의 설악산을 높다고 느끼는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안데스의 도시들은 대부분 4,000~5,000m급 고봉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처럼 높은 산들 가운데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산 세 곳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위는 에콰도르 최고봉, 해발 6,263m의 침보라소 화산(Chimborazo),
2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중 하나인 해발 5,897m의 코토팍시 화산(Cotopaxi),
3위는 적도 위에 정확히 위치하면서 만년설을 가진 유일한 산, 해발 5,790m의 카얌베 화산(Cayambe)이다.
침보라소 화산은 에콰도르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적도 부근의 지구가 불룩하게 팽창해 있기 때문에, 해발고도는 에베레스트보다 낮지만 지구 중심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있는 침보라소가 ‘우주에 가장 가까운 산’이라는 것이다.
침보라소는 에콰도르 제3의 도시 암바토 남쪽에 있다. 나는 남부 도시 쿠엔카에서 키토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산을 볼 수 있었다. 도로에서조차 5,000m 이상 지역의 만년설이 보일 만큼 압도적인 산이었다.
키토 남쪽에 위치한 코토팍시산은 지금도 활동 중인 활화산이다. ‘coto’는 케추아어로 목(neck), ‘paxi’는 달(moon)을 뜻하는데, 초승달 모양의 분화구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환태평양 화산대에 속하는 지역답게 1년에 수천 번의 지진이 발생하고, 정상부에서는 지금도 분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코토팍시는 키토에서 당일치기로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차량으로 해발 4,600m까지 올라간 뒤, 한 시간 남짓 걸으면 4,800m 이상 지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키토에서 출발하는 코토팍시 투어를 신청했다. 26명이 참가한 투어 버스는 코토팍시 국립공원으로 들어가 림피오풍고 석호(Laguna de Limpiopungo)에서 산을 조망한 뒤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인다. 구름이 많아 정상은 보이지 않았다.
해발 3,000m에서 4,600m까지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대형버스의 모습은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끝내 주차장까지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SUV 차량들이 꽤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호세 리바스 대피소(Refugio José Ribas)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갈 때는 경사면을 크게 돌아 지그재그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직선 코스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이라 생각보다 길은 잘 다져져 있었다.
다행히 구름 사이로 정상도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엄쉬엄 한 시간쯤 오르자 대피소가 보이며 하얀 빙하가 제법 가까워졌다.
갑자기 손톱만 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모자를 써도 맞으면 꽤 아플 정도였다. 점점 거세지는 눈발에 쫓기듯 대피소로 들어섰다.
입구에 고도가 표시돼 있다. 해발 4,864m에 오르다니, 내 인생 최고 고도를 찍었다. 안데스 산지의 도시에 한 달 가까이 머물러서인지 고소 증세는 없었다.
대피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간단한 음식과 간식도 팔고 있다. 따뜻한 코코아로 몸을 녹이려는 순간, 가이드는 우리가 꼴찌라며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그 사이에 눈이 제법 쌓였다. 내려가는 길은 푹신한 화산 흙 위를 미끄럼 타듯 가야 했다. 제대로 된 등산화도 없이 겁 없이 올라온 탓에, 신발 속으로 끊임없이 화산 흙이 들어왔다. 발바닥은 점점 아파오고, 눈과 흙이 섞여 신발 속은 온통 축축해졌다.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날이 개면서 코토팍시 산이 정상까지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아침 8시에 키토를 출발해 돌아온 시간은 저녁 7시. 길이 막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당일 코스로 5,000m 가까이 오를 수 있는 이 투어는 최고의 고산 체험이었다.
적도상의 최고봉인 카얌베 화산은 키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다. 나는 코토팍시를 오르기 전, 먼저 이 산을 찾았다.
카얌베 마을에서 사륜구동 트럭 택시를 타고 대피소까지 오른 뒤 걸어 올라가는 코스는 코토팍시와 비슷하지만, 난이도는 훨씬 높았다.
카얌베 대피소 역시 해발 4,600m에 위치한다. 대피소까지의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어 있고 마지막 구간만 비포장길이었다.
차로 오르는 길과 달리, 도보 코스는 전혀 수월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산이라 제대로 된 길이 없어 화산 모래와 돌무더기 사이를 조심조심 밟으며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J의 손을 꼭 잡고 눈앞의 땅만 보며 간신히 산등성이에 올랐다. 해발 4,763m까지 고도 150m를 오르는 데 50분이나 걸렸다. 그 지점에서야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올라가면 호수와 정상까지 볼 수 있다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갈 수가 없다. 구름 속에 들어선 듯 수증기 덩어리가 거센 바람에 실려 얼굴을 때린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카얌베 마을은 비닐하우스로 가득 차 있었다. 최고 품질의 카얌베 장미를 생산하는 비닐하우스들이다.
에콰도르는 네덜란드, 콜롬비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장미 수출국이다. 키토에서 한 시간 거리인 카얌베 주변은 고산 지대 특유의 서늘한 기후와 풍부한 일조량, 양분이 많은 화산 토양 덕분에 장미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키토 공항을 통해 빠르게 수출할 수 있다는 점까지 더해져, 세계적인 장미 산지가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에콰도르의 장미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프리미엄 장미 시장에 유통되는 장미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자칭 ‘로즈 가드너’인 J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장미 농원 방문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다한 살충제 사용에 따른 환경 문제, 저임금 노동 문제 등으로 농원들은 외부에 매우 폐쇄적이었다. 도로에서 보이는 농원들은 가림막으로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고, 예약 없이는 접근도 불가능했다.
J는 어렵게 장미 농원 투어를 운영하는 곳을 하나 찾아냈다.
하시엔다(Hacienda)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중남미에서 형성된 대규모 농장과 그에 딸린 저택을 의미한다. 우리가 방문한 하시엔다 라 꼼파니아(Hacienda La Compañía)는 수백 년간 목장을 운영하다가 30년 전 장미 농원으로 전환한 곳이다. 그곳에서 관리하는 ‘로사덱스(ROSADEX)’라는 농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은 물론 여권까지 제시해야 했다.
농원 주인 가족인 마틴은 우리를 맞아 거대한 비닐하우스로 안내했다. 분홍빛 장미가 줄지어 피어 있는 하우스 안에서는 물 주기부터 수확까지 모든 과정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다.
수확한 장미를 선별하고 포장하는 설비 규모도 상당하다. 이런 하우스가 무려 30개나 된다니 세계 3위 장미 수출국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현장이었다.
나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저택을 보고 싶어 점심이 포함된 75달러짜리 투어를 선택했다. 하시엔다는 중세 귀족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풍성한 정원에 장미나무가 보이지 않아 이유를 묻자, 마틴은 “농원과 집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며 웃는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실내에는 수십 송이씩 꽂힌 장미 화병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연말 가족 파티를 준비하던 여주인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다. 집안을 둘러보는 우리에게 벽지는 프랑스에서, 가구는 이탈리아에서 들여왔다고 설명해 줬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해 기차와 배로 운송한 뒤, 마지막 구간은 나귀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점심은 정갈하면서도 풍성했다. 식사 후에는 저택 바로 옆에 있는 가족 교회를 둘러봤다. 수백 년 전의 의복과 소장품까지 갖춘 모습은 마치 옛 영주의 영지를 방문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번 장미 투어는 에콰도르 장미 산업의 규모와 깊이를 실감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결혼식장에 가게 되면, 풍성한 장미를 보며 에콰도르의 고산과 장미 농원, 그리고 하시엔다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