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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26. 2022

푸조 504 : 아프리카의 짐꾼이 된 프랑스 세단

수요 명차 극장

흔히 프랑스를 '소형차의 나라'로 여길 만큼 프랑스에서는 소형차의 인기가 높습니다. 전체 신차 판매량의 과반을 A~B-세그먼트,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경차 내지는 소형차가 차지하고, 우리나라의 그랜저 급 이상에 해당하는 대형차는 전체 판매의 10%에 그치죠. 당연히 프랑스 회사들 역시 고급차보다는 소형차를 잘 만드는 회사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프랑스 회사들이 큰 차를 만들지 않은 건 아닙니다. D-세그먼트에 해당하는 중형급 모델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그 중에서는 우리에겐 익숙치 않아도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델도 많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푸조의 중형 세단, 504 역시 그런 글로벌 히트작 중 하나인데요.


504는 유럽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지만, 제3세계 국가에서 특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유의 뛰어난 주행 성능과 우수한 내구성 덕분인데요. 심지어 아프리카 몇몇 나라에서는 40년 가까이 생산돼 '아프리카의 짐꾼'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오늘은 프랑스에서 탄생해 아직도 아프리카 땅을 누비고 있는 푸조 504의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혁명 속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세단
1960년대 프랑스는 2차 대전의 참화를 씻고 빠르게 회복 중이었습니다.

1960년대,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복구를 마치고 과거의 강대국 지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었습니다. 프랑스 자동차 역시 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차였지만, 전후에는 미국차, 영국차, 독일차 등에 밀려난 상황이었습니다.


푸조는 프랑스 내수 시장에서 고급 중형차의 수요가 회복됐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려면 현대화된 중형 모델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차세대 중형 세단 개발에 착수합니다.

1960년 출시된 404는 아직 구닥다리는 아니었지만, 트렌드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푸조의 중형차는 1960년 출시된 404였습니다. 아직 완전히 기계적으로는 그리 노후화된 모델이 아니었지만, 60년대 말의 디자인 트렌드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카뷰레터 방식의 엔진은 출력도 부족했죠. 신형 모델은 몸집은 키우지 않더라도, 404보다 더 고급스럽고 주행 성능도 뛰어난 프리미엄 중형차를 지향했습니다.

피닌파리나의 걸출한 디자이너, 알도 브로바로네가 504의 터치를 맡았습니다.

외관 디자인은 피닌파리나의 알도 브로바로네(Aldo Brovarone)가 담당했습니다. 그는 이미 페라리 400 슈퍼아메리카 II, 디오 206 GT를 비롯해 여러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실력파였는데요. 트렁크 라인을 날렵하게 깎아 패스트백 스타일로 다듬고 70년대 푸조의 특징인 헤드램프 형태를 정립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형 세단에 붙여진 이름은 504. 맨 앞자리 숫자가 차급, 맨 뒷자리 숫자가 세대를 나타내는 푸조의 작명 규칙에 따르면 '405'가 돼야 했지만, 404보다 한 단계 윗급의 모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죠. 실제로 504 출시 후에도 404는 한동안 함께 판매됐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몇 년 간 함께 생산됐던 르노삼성의 SM5와 SM6 같은 관계랄까요?

1968년, 대학생이 주축이 된 '68 혁명'의 혼란은 504의 출시를 지연시켰습니다.

1968년 9월 파리 오토살롱에서 504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원래대로라면 6월에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같은 해 5월 발발한 '68 혁명'으로 인해 노동계도 큰 혼란에 빠진 와중이었죠. 이로 인해 개발과 생산이 지연됐고, 결국 혁명의 열기가 가신 뒤에야 출시가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파리 오토살롱에서 데뷔한 504는 곧바로 유럽 올해의 차에 오릅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출시됐지만, 504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평가는 호의적이었습니다. 우수한 성능과 현대적인 사양, 무엇보다 프랑스차 특유의 미적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디자인이 호평 받았는데요. 이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504는 BMW E3, 알파로메오 1750 베를리나, 재규어 XJ6 등을 꺾고 1969년 유럽 올해의 차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초기형 모델의 인테리어. 특이하게 변속 레버가 스티어링 칼럼에 붙어 있었습니다.

초기 사양은 햇빛을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의 취향을 반영해 선루프가 기본 사양으로 탑재됐고, 1.8L 엔진은 82마력을 내는 카뷰레터 버전과 기계식 인젝터를 적용해 97마력을 내는 고급형 등 두 가지 사양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칼럼 시프트 방식의 4속 수동변속기 또는 ZF제 3속 자동변속기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성능만 보면 504가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504를 '월드카'로 만든 건, 바로 높은 신뢰성과 경악할 만한 내구성이었습니다.


무엇이 504를 불사신으로 만들었나
504는 디자인 만큼이나 불사신급 내구성으로 유명합니다.

504는 매력적인 디자인 만큼이나 우수한 내구성으로 유명한데요. 초기 설계부터 도시가 아닌 어떤 환경에서나 부담없이 운용할 수 있는 차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장재만 보더라도 다른 나라의 고급차들이 푹신푹신하고 질감이 좋은 소재를 사용한 것과 달리, 504는 처음부터 긴 수명을 지닌 고강성 소재를 대거 투입했습니다.


대신 어떤 도로에서나 탁월한 승차감을 지녔는데요. 앞뒤 모두 독립식 서스펜션을 채택하고, 일반적인 승용차보다 훨씬 긴 서스펜션 스트로크를 지녀 포트홀이나 불규칙한 노면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당시 흔히 사용되던 웜기어 타입 대신 랙 앤 피니언 타입의 조향 장치를 채택, 핸들링 성능 또한 우수했죠. 이러한 특징들은 단단하고 묵직한 독일차의 승차감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습니다.

504는 매우 긴 서스펜션 스트로크를 지니고 토크 튜브 방식의 구동계를 갖췄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바로 토크 튜브 방식의 구동계입니다. 토크 튜브(torque tube)란, 프론트 엔진 후륜구동 차량에서 변속기와 후륜 디퍼렌셜을 연결하는 프로펠러 샤프트를 밀폐된 하우징으로 감싸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승용차의 경우 하부의 충격을 받을 일이 적어 이러한 토크 튜브를 사용하지 않고 프로펠러 샤프트를 노출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504는 구동계를 보호하고 토크 리액션(torque reaction)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토크 튜브를 채택했습니다. 그 결과 504의 구동계는 상당히 뛰어난 내구성을 지니게 됐고, 특유의 서스펜션 설계와 결부돼 승용 모델임에도 우수한 험지 주파력을 발휘했습니다.

뛰어난 험지 주파 성능과 높은 신뢰도 덕에 504는 랠리카로도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504 만의 언더바디 설계는 큰 인기의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도시의 포장도로든 시골의 자갈길이든 504는 시종일관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했고, 험한 길도 부담 없이 주파할 수 있었죠. 게다가 아무리 가혹한 환경에서 굴려도 구동계통의 고장은 거의 없었습니다.

출시 이듬해에는 이탈리안 스타일의 형제 모델, 504 쿠페와 카브리올레가 데뷔합니다.

504 세단이 출시와 동시에 큰 인기를 끌면서, 엔진 개선과 라인업 확장도 순차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출시 이듬해인 1969년에는 피닌파리나의 프랑코 마르티넹고(Franco Martinengo)가 디자인한 504 쿠페와 카브리올레가 추가됐고, 1970년에는 더 강력해진 2.0L 가솔린 엔진과 2.1L 디젤 엔진이 적용됩니다.


1974년에는 성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볼보, 르노와 공동 개발한 2.7L V6 가솔린 엔진 버전을 출시합니다. 최고출력은 기존 2.0 엔진의 105마력에서 138마력으로 높아졌고, 쿠페 버전은 186km/h의 최고속도를 기록하기도 했죠.

또 다른 형제, 504 픽업은 소형 상용차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출시 11년 차를 맞이한 1979년에는 픽업트럭 모델도 출시됐는데요. 차체 앞쪽은 세단과 같은 모노코크 바디를 사용했지만, 뒷쪽은 프레임 바디로 재설계, 큰 하중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됐습니다. 이 픽업 모델은 앞서 설명한 뛰어난 험지 주파력, 내구성과 맞물려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고, 무려 1993년까지도 신차로 생산됐습니다.


아직도 현역인 '아프리카의 짐꾼'
504의 다재다능함은 신흥 시장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504의 다재다능함은 본토인 유럽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보다는 신흥 시장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냉전 시대 프랑스는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지의 제3세계 국가들과 활발히 교류했는데요. 자연스럽게 푸조 역시 이들 국가에 진출해 있었습니다.

유럽에선 나름 고급진 중형 세단이었지만, 504는 아프리카에서 주로 이런 용도로 쓰였습니다.

유럽보다 개발이 뒤처져 있었던 나라에서 504는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아무리 길이 나빠도 승차감이 좋았고, 돌부리에 하체를 찍혀 프로펠러 샤프트가 망가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504는 내구성이 너무 좋아 정비소들이 망할 지경"이라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죠. 심지어 픽업트럭 버전이 추가되면서 승용은 물론 상용차로도 쓸 수 있었습니다. 점잖 빼는 고급 승용차보다 신뢰성 높은 생계 밑천이 필요했던 신흥 시장 운전자들에게, 504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504는 엄청나게 많은 나라에서 생산됩니다. 아르헨티나, 케냐,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만, 중국 등지에서 라이선스 생산됐고, 반조립 생산도 호주, 뉴질랜드, 칠레, 이집트, 포르투갈, 튀니지 등에서 이뤄졌죠. 그야말로 모든 대륙을 아우르는 '월드카'가 된 셈입니다.

504는 현지인들의 엄청난 신뢰를 등에 업고 40년 가까이 생산됩니다.

이들 나라에서 504가 받는 신뢰는 대단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983년 504의 승용 모델이 공식적으로 단종됐지만,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90년대까지도 504가 그대로 생산됩니다. 심지어 케냐에서는 2004년, 나이지리아에서는 2006년까지도 504를 생산해 전 세계에서 완전히 단종될 때까지는 출시 후 38년이 걸렸습니다. 후속 모델인 505의 마지막 생산이 1997년이었으니, 그보다도 9년을 더 만든 것이죠.

504는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현역입니다. "아프리카 도로의 왕"이라는 칭호는 괜히 받은 게 아니었죠.

흥미로운 건, 단순히 신모델을 도입하기 부담스러워서가 아닌 504가 정말로 열악한 도로 환경에 최적화된 모델이기에 오래도록 사랑받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나이지리아에서는 504를 "아프리카 도로의 왕(King of the African road)"라고 홍보했고, LA 타임즈에서는 아프리카의 자동차 산업을 분석하는 칼럼을 통해 "504는 아프리카의 짐꾼(Africa's workhorse)"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첫 출시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에서 504 택시나 트럭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504 브레이크 미국 사양. 미국 법규에 맞춰 원형 헤드램프와 5-마일 범퍼를 장착했습니다.

또한 504는 푸조의 미국 수출 전략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프랑스차가 전멸했지만, 1958년부터 1980년까지는 푸조도 미국에 딜러를 두고 있었는데요. 유럽의 주력인 소형차는 미국 시장에서 찬밥 신세였기에 중형 세단 504는 미국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유의미한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미국의 유럽차 마니아들에게는 소장가치 높은 차로 여겨집니다.

푸조가 미래차 콘셉트카의 디자인을 504에서 따 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

유럽을 넘어 세계인에게 사랑받은, 전무후무한 '월드카'였기 때문일까요? 푸조 스스로에게도 504는 각별한 모델입니다. 내연기관 시대를 넘어 전동화와 자율주행이 대두되는 오늘날, 푸조가 새 브랜드 로고를 처음으로 새겼던 자율주행 전기차 콘셉트카, e-레전드(e-LEGEND)가 504 쿠페를 오마주한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푸조는 '미래차 시대의 504'를 만들 수 있을까요? 관심을 갖고 지켜 볼 일입니다.

앞으로 푸조가 선보일 자율주행 전기차가 정말로 콘셉트카처럼 504의 디자인을 본딸 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아트와의 합병으로 스텔란티스 체제를 출범하고 유럽을 넘어 글로벌 메이커로 성장하고자 하는 푸조의 현재 상황이, 504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갈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 걸까요? 미래 시대의 504가 될 모델이 다시금 등장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 볼 일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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