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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26. 2022

트라반트 : 통일의 상징이 된 동독 국민차

수요 명차 극장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됐지만, 유럽 연합의 맹주국인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분단 국가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소련 점령지에서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1990년 통일 전까지 두 개의 독일이 존재했는데요.


냉전 당시 유럽에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최전선에 섰던 두 나라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통일을 이뤘습니다. 특히 1989년 수도 베를린을 가로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물밀듯이 몰려 오는 모습은 독일 통일 과정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고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히는데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서베를린으로 몰려오는 트라반트들.

당시 세계 최고의 승용차를 만들고 있던 서독 사람들은 거의 모든 동독 운전자가 예외 없이 파스텔톤의 장난감 같은 자동차를 타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동독에서 만들어진, 독일 역사상 가장 형편없는(?) 자동차, 트라반트가 그 주인공입니다.


분단 당시 공산주의 계획경제의 상징이었던 트라반트는 통일 후 통일의 마스코트로 떠올라 헌정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요. 오늘 [수요 명차 극장]에서는 동독 인민의 발이자 현재까지도 컬트적 인기를 끌고 있는 트라반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평작이었던 '인민의 동반자'
흔히 이야기하는 트라반트는 '601' 모델이지만, 실제로는 몇 번의 세대 교체가 있었습니다.

흔히 '트라반트'라고 하면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생산된 '601' 모델을 이야기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트라반트는 총 4종류의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등장한 건 1957년 생산을 시작한 트라반트 P50(또는 트라반트 500)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수습되면서 동독에서도 본격적인 공산주의식 계획경제 체제의 국가 운영이 시작됩니다. 당시 동독은 서독보다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 데다, 독일의 산업 기반은 대부분 서독 영토인 남부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 재건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공산 진영에서는 가장 뛰어난 공업 기술력과 노하우를 지닌 만큼 독자적인 자동차 개발에 나섭니다.

츠비카우 자동차 기업소를 나서는 트라반트들.

1954년, 동독 정부는 4인 가족이 탈 수 있고, 차량 무게가 600kg를 넘지 않으며, 18km/L 이상의 연비를 지닌 대중차의 개발을 지시합니다. 개발은 츠비카우의 옛 아우디 공장을 기반으로 한 국영 츠비카우 자동차 기업소(VEB Automobilwerk Zwickau)가 맡았습니다.


프로젝트 초기에는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삼륜차의 형태가 제안됐지만, 삼륜차는 안정성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멋있지' 않았습니다. 서방 세계에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서방 세계의 소형차를 참고해 온전한 4륜 자동차로 계획이 수정됩니다.

트라반트는 1957년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고, 이내 동독을 대표하는 차가 됩니다.

'타입 50(Typ 50)'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던 이 차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57년 라이프치히 물산 박람회였습니다. 작고 귀여운 이 대중차에는 '트라반트(Trabant)'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동반자'라는 뜻의 이름은 당시 갓 발사에 성공해 서방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와 같은 의미였죠. 즉, 스푸트니크처럼 공산 진영의 우수한 공업 기술력을 홍보하겠다는 야심이 담긴 작명이었습니다.


어딘가 허술한 겉모습만 보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사실 처음 등장한 1957년을 기준으로 트라반트는 꽤 진보적인 설계와 양호한 성능을 갖춘 차였습니다. 무게를 줄이면서 단단한 차체를 만들기 위해 철제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하고, 외관은 면섬유 강화 플라스틱(FRP)으로 된 바디 패널을 둘렀습니다.

트라반트의 2행정 엔진은 성능이 썩 좋지 않았지만, 당시 소형차 치곤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또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가로배치 프론트 엔진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츠비카우 공장의 원 주인이었던 DKW의 설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가로배치 전륜구동 대중차의 대명사인 BMC 클래식 미니가 1959년 탄생했으니, 그보다도 2년 앞선 것이었죠. 파워트레인은 17마력을 내는 2행정 P-50 시리즈 500cc 2기통 엔진과 4속 수동변속기가 조합됐습니다.


물론 서독에는 고급차를 만드는 메르세데스-벤츠 같은 회사도 있었지만, 대중차로 국한시킨다면 트라반트 P50은 평작이었습니다. BMW의 이세타, 피아트 500, 보크바르트(Borgward) 로이드 400 같은 차들과 견줘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른 회사의 차들은 세대 교체가 이뤄졌지만 트라반트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는 차
트라반트 P50은 1962년 엔진 변경, 1964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601로 진화합니다.

처음에는 트라반트도 나름의 모델 체인지가 있었습니다. 1962년에는 디자인을 일부 변경하고 배기량을 600cc로 높인 P60 모델이 출시됩니다. 최고출력은 23마력으로 높아졌죠. 연비가 조금 나빠지긴 했지만, 어짜피 소비자들은 선택권이 없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P60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트라반트 601이 출시됩니다. 601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다시 디자인을 일부 수정했는데요. 그러면서 전면부 디자인은 영국의 미니와 비슷한 형태가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트라반트의 외관은 이때 확립됐죠.

트라반트 601 우니베르잘의 홍보물. 이 시기 트라반트는 이미 시장에 뒤처진 차였습니다.

하지만 서방 세계에서는 자동차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60년대, 트라반트는 이미 '끗발'이 다한 상태였습니다. 서방의 소형차와 비교하면 한 물 간 디자인에, 성능도 형편없었죠. 2행정 엔진은 엄청난 매연도 내뿜었습니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2행정 엔진을 오토바이용으로나 사용하고, 자동차에서는 퇴출시킨 뒤였죠.


트라반트도 엔진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방켈형 로터리 엔진 탑재를 위해 연구를 진행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지 않았고, 결국 동독 정부는 트라반트 601을 1971년까지만 생산하고, 그 뒤에는 보다 현대적인 신형 대중차를 선보이기로 계획합니다.

동독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후속 개발은 미뤄지고, 트라반트의 수명은 강제로 연장됩니다.

그러나 공산 진영의 경제적 풍요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은 뒤, 구조적 문제로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트라반트의 후속 모델 계획도 무기한 중단되고, 20년 전 설계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제 소형차는 억지로 수명이 연장되며 계속해서 생산됩니다.


트라반트의 성능은 형편없었지만, 동독의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그나마도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바르트부르크나 소련에서 수입한 라다 같은 고급(?)차도 있었지만, 당 간부나 특권층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었죠. 그래서 많은 동독 주민들은 자가용으로 트라반트를 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트라반트의 생산량은 수요에 턱없이 못 미쳐 차를 받으려면 10년 이상 기다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츠비카우 공장의 생산량이 수요에 한참 못 미쳤다는 것이죠. 계획경제 체제에 따라 운영되다보니 연간 생산량은 10만 대도 안 됐고, 주민들이 기껏 돈을 모아 트라반트 배급을 요청해도 몇 년씩 기다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심지어 출고 적체가 심했던 시기에는 10~13년을 기다려야만 차를 받을 수 있어서,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때 트라반트를 주문하면 성인이 될 때쯤 차가 나왔다고 합니다.


동독 주민들은 마지못해 타던 차였고, 서방 세계에서는 형편없는 성능과 구닥다리 설계로 놀림거리가 됐지만, 그럼에도 트라반트는 30년 넘게 동독의 대표적인 자가용 승용차로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오토바이 수준의 성능에, 최고속도는 100km/h를 간신히 넘을 정도였지만, 구조가 워낙 단순하고 연비가 좋아 누구나 손쉽게 운전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딘가 어설프게 생겼지만, 트라반트 퀴벨바겐은 실제로 공수부대에서 운용됐습니다.

바디 타입은 총 4종류가 개발됐습니다. 기본형인 2-도어 '리무진(Limousine)', 왜건형의 3-도어 모델 '우니베르잘(Universal)', 우니베르잘의 상용 버전인 2인승 패널 밴(Panel Van), 그리고 공수부대 사양으로 개발된 퀴벨(Kübel) 등입니다. 소형 오프로더 형태였던 퀴벨은 이후 민수용으로도 판매됐고, 특히 그리스에 많은 양이 수출됐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트라반트는 수동변속기를 탑재했지만, 장애인용으로 유압식 반자동변속기가 탑재된 하이코마트(Hycomat) 모델도 개발됐습니다. 클러치를 밟지 않고 변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자동변속기 개발 노하우가 부족했기 때문에 주행 감각은 형편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공산주의 실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서독을 달리며 환호받는 트라반트들. 통일 후 트라반트는 대부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습니다.

1957년 탄생한 트라반트는 독일이 통일되는 1990년까지도 현역으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서방 세계의 최신 자동차를 접한 동독 주민들은 더 이상 트라반트를 찾지 않았고, 90년대 초까지는 주민들이 새 차를 사며 트라반트를 노변이나 숲속에 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마지못해 타던 트라반트는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습니다.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면서 트라반트는 더 이상 국영기업이 아닌 일반 자동차 회사가 됐습니다. 이제는 정부에서 운영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 좋은 차를 만들어 다른 회사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죠. 경영진은 급한대로 트라반트의 현대화 작업에 나섭니다.

급하게 트라반트의 현대화 버전이 마련됐지만, 경쟁력은 부족했습니다.

기존의 차체는 유지됐지만, 폭스바겐 폴로와 아우디 50 등에 사용되던 EA111 1.1L 4기통 엔진을 라이선스 생산해 탑재합니다(물론 EA111도 1970년대에 개발된 엔진이었지만...). 또 4륜 독립식 서스펜션을 적용해 주행 성능을 높이고, 공랭식이었던 구형과 달리 수냉식 냉각계를 적용해 여름철에도 차가 멈춰서는 일이 없어졌죠.


그 밖에도 변속 레버의 위치를 바꾸고, 엔진 위에 얹혀 사고 시 화재 위험이 높았던 연료탱크를 차체 뒷편으로 옮기는 등 대대적인 개선이 이뤄집니다. 이것이 바로 1990년 출시된 트라반트의 최종형, 트라반트 1.1입니다.

300만 번째 트라반트와 폭스바겐 폴로가 함께 선 모습. 폴로의 계보는 계속 이어졌지만 트라반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본 설계가 30년이 넘은 트라반트는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독일 내의 다른 자동차들과는 비교조차 민망한 수준이었고, 폴란드, 헝가리 등 구 공산 진영 국가 수출을 시도했지만 이미 개방된 이들 나라에서도 소련제 라다보다 나을 것 없는 트라반트를 살 이유가 없었죠. 그래서 트라반트 1.1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생산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1991년 4월 30일, 309만 6,099번째 차량을 끝으로 트라반트는 단종됩니다. 이 중 초기형 P50과 P60이 각각 13만여 대, 10만 6,000여 대를 차지했고, 최후기형 1.1은 3만 9,000여 대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281만 8,547대는 동독 주민들의 애증의 대상이었던 601이 차지했습니다. 츠비카우 공장은 폭스바겐에게 매각돼 현재는 I.D.3를 비롯한 전기차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영화 <트라비에게 갈채를>. 트라반트는 통일의 아이콘으로 다시 사랑받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당시에는 상술한 것처럼 길바닥에 버려지거나, 환경 규제를 충족하지 못하는 2행정 엔진 때문에 상당수의 트라반트가 폐차장으로 직행했습니다. 하지만 동독의 대중차이자 통일 당시 서독으로 쏟아져 들어온 자동차 행렬의 주인공이었던 트라반트는, 이내 역사의 한 장면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재평가받게 됩니다. 특히 통일 후 동독 주민의 생활을 담은 코미디 영화 <트라비에게 갈채를(Go Trabi Go, 1991)>이 개봉하면서 트라반트는 동독 출신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자동차이자 독일 통일의 상징이 됩니다.

츠비카우 박물관의 100만 번째 트라반트. 우리의 올드카도 다시 사랑받는 날이 올까요?

오늘날에는 베를린과 츠비카우에 트라반트의 역사를 기록하는 박물관이 세워졌고, 독일 내에 남아있는 약 5만여 대의 트라반트들이 동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아직까지 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비록 여전히 고약한 매연을 뿜으며 느리게 달리지만, 독일인들에게 트라반트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닌 자랑스러운 역사의 일부가 됐습니다.


공산주의 실패의 상징에서 통일의 아이콘으로 변신한 트라반트가 여전히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서, 각종 규제와 무관심 속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의 옛 자동차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동차는 단순한 공산품을 넘어 시대상과 역사를 담은 유산인 만큼, 이들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요? 트라반트처럼 과거의 우리 자동차들도 사랑받으며 계속해서 도로를 누빌 수 있길 바라 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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