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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26. 2022

토요타 2000GT : 세계를 향한 스포츠카 출사표

수요 명차 극장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영원한 라이벌과 같은 나라입니다. "금메달은 못 따도 일본은 이겨야 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한일 간에는 단순한 인접국 그 이상의 경쟁 의식이 적지 않은데요. 역사적 앙금에서 시작된 경쟁 심리지만, 이를 넘어 선의의 경쟁자로서도 일본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자동차 산업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일본이 우리보다 한참 먼저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것이 객관적 사실입니다. 국산차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21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일본차는 오래 전부터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죠.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오래 전부터 스포츠 모델 개발에 공을 들여 왔습니다.

대중차가 아닌 스포츠카 분야에서 양국의 격차는 훨씬 크게 벌어집니다. 우리나라가 겨우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할 즈음, 이미 일본 회사들은 유럽의 전통적 강호들에게 도전하기 위한 스포츠카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첫 국산 스포츠카라 할 수 있는 스쿠프는 1990년에야 출시됐지만, 일본 회사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스포츠 모델을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 소개할 2000GT는 토요타가 처음으로 세계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던 정통 스포츠카입니다. 선진적인 설계와 첨단 기술을 탑재해 당대 일본에서 가장 진보한 스포츠카이자, 오늘날 토요타 수프라, 나아가 렉서스의 GT카 라인업에 이르는 토요타 고성능 계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클래식카 중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하기도 하는 토요타 2000GT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토요타도 스포츠카가 필요해!
1950년대 일본은 모터리제이션에 성공하고 다양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주저앉았던 일본은 1950년대 한국 전쟁 특수를 거치며 공업 생산력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던 자동차 역시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대중화가 이뤄졌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다양한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 시기 여러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 스포츠 모델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모터리제이션이 이뤄지면 그 뒤에는 가장 확실한 마케팅 방법이 성능의 우위를 인정받는 것이니까요. 1959년 닷선 S211(오늘날 닛산 페어레이디 Z의 조상)을 시작으로 혼다 S500(1963), 토요타 스포츠 800(1965), 마쓰다 코스모 스포츠(1967) 등 각 회사마다 앞다퉈 스포츠 모델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토요타의 첫 스포츠카, 스포츠 800은 '스포츠'를 논하기엔 다소 민망했습니다.

이 시기, 토요타는 보다 '제대로 된' 스포츠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토요타가 스포츠카를 원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요. 우선은 이처럼 내수 시장에서의 스포츠카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이었습니다. 토요타는 퍼블리카, 크라운 등 승용차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스포츠카에 있어서는 닛산에게 뒤처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첫 스포츠 모델인 스포츠 800은 퍼블리카를 기반으로 해 성능의 한계가 뚜렷했던 반면, 닛산은 이미 2세대 페어레이디를 선보인 상황이었죠.


두 번째 이유는 수출 시장에서의 이미지 제고였습니다. 일본 내수 시장에서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 탄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건 일본 회사들의 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하던 선진 제조사들은 이미 그럴싸한 스포츠카를 내세워 기술력을 과시하고 있었죠. 메르세데스-벤츠의 300SL, 재규어 E-타입, BMW 507 처럼 빼어난 디자인과 강력한 성능을 지닌 헤일로 카(halo car)가 있다면 수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토요타의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토요타는 1964년 '280A'라는 코드명의 스포츠카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차세대 스포츠카는 강력한 엔진을 얹고, 유럽의 내로라 하는 GT 스포츠카들을 벤치마킹하기로 합니다. 디자인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핫'한 스포츠카였던 재규어 E-타입과 같이 긴 노즈에 프론트 미드십 엔진 배치가 이뤄진 2-도어 쿠페 스타일로 정해집니다.

토요타가 280A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때, 야마하 또한 스포츠카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한편, 악기 회사로 시작해 오토바이 분야에서도 명성을 날리고 있던 야마하는 1959년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동차 부문 진출을 검토 중이었습니다. 구동 가능한 시제 엔진까지 개발됐지만 모종의 이유로 자동차 산업 진출은 취소되고, 대신 기존 완성차 회사와 협업을 통해 고성능 스포츠카를 개발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힙니다.


초기의 파트너는 한창 페어레이디로 명성을 날리던 닛산. 이들과 함께 추진한 차세대 스포츠카 프로젝트는 'A550X'라는 코드명으로 프로토타입까지 빠르게 완성됐지만, 닛산이 고성능 스포츠카 대신 대중적 쿠페인 실비아를 양산하기로 하면서 이 프로젝트 또한 공중에 붕 떠버립니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야마하의 스포츠카 프로젝트는 토요타의 것과 합쳐집니다.

하지만 야마하는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 이 차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마침 280A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던 토요타에게 공동 개발을 제안합니다. 고성능차 개발 경험이 부족했던 토요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일본 자동차의 역사를 바꿀 드림팀이 결성됩니다.


토요타와 야마하, 손을 잡다
새로운 스포츠카는 토요타의 섀시를 바탕으로 개발됐습니다.

따로 진행되던 두 개의 프로젝트였지만, 원하는 바가 같았기에 토요타와 야마하의 협업은 막힘없이 진행됐습니다. 토요타의 섀시 설계가 거의 완성 단계였기에 밑바탕은 토요타의 것을 따랐고, 토요타 개발진이 야마하로 파견돼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해 나갔습니다.


차체 설계는 야마하의 프로토타입 단계에서도 양산차에 준하는 수준이었지만, 토요타는 이를 토요타의 색에 맞게 수정하기로 합니다. 기존 디자인은 독일의 알브레히트 폰 괴르츠(Albrecht von Goertz)가 맡았는데, 세련됐지만 토요타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이에 토요타 인하우스 디자이너인 노자키 사토루(Nozaki Satoru)의 수정안을 채택합니다.

야마하의 프로토타입과 달리, 2000GT는 E-타입을 닮은 유선형 바디를 채택했습니다.

기존의 프로토타입이 쉐보레 콜벳을 닮았다면, 새로운 알루미늄 바디는 재규어 E-타입에 가까운 유선형이었습니다. 전후면의 디자인은 앞서 출시된 스포츠 800과 비슷한 분위기로 바뀌어 패밀리 룩을 이뤘고, 팝업식 헤드램프를 적용했습니다. 더욱이 롱노즈 숏데크 스타일의 비례감은 우아하면서도 역동적이었습니다. 전고는 고작 1,160mm에 불과해 당대 일본차 중 가장 낮았죠.

야마하가 가공한 초호화 우드 트림이 2000GT에 고급감을 더했습니다.

토요타는 이 차가 강력한 성능만큼이나 고급스럽고 쾌적한 그랜드 투어러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인테리어 구성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요. 천연가죽 시트와 더불어 당대 일본차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호화로운 장미목 마감재가 대시보드와 센터페시아에 둘러졌습니다. 이 우드 트림을 만드는 데에는 악기를 만들며 목재 가공 경험이 풍부했던 야마하의 공이 컸습니다.


편의사양으로는 이때까지만 해도 보기 드물었던 오토 라디오 튜너가 탑재됐고, 최후기형 모델에는 에어컨 옵션이 적용됐습니다. 또 3속 자동변속기를 선택 사양으로 제공해 강력한 성능을 지니고도 편안한 그랜드 투어러의 콘셉트를 완성했습니다.

2.0L 직렬6기통 엔진은 그야말로 토요타와 야마하의 합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토요타 최초의 제대로 된 스포츠 모델인 만큼, 가장 공을 들인 건 엔진이었죠. 엔진은 크라운에 탑재되던 2.0L 직렬6기통 엔진을 바탕으로 개발됐습니다. 기존 엔진은 SOHC였지만, 고성능 바이크를 만들며 DOHC 설계 노하우를 쌓은 야마하가 헤드를 제작, 토요타의 첫 직렬6기통 DOHC 엔진으로 완성됩니다. 여기에 3개의 2-배럴 카뷰레터를 조합해 빠른 응답성을 구현했습니다. 150마력의 최고출력이 6,600rpm에서 뿜어져 나왔고, 최대토크는 17.8kg.m에 달했습니다.


변속기는 아이신에서 제작한 전용 5속 수동변속기를 기본 탑재해 최고속도는 217km/h에 달했고, 일본차 최초로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LSD)와 4륜 파워 디스크 브레이크를 기본 장착했습니다. 그 밖에도 4륜 코일 스프링과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 랙 앤 피니언 스티어링 시스템 등 세계 최정상급 스포츠카에 적용되던 설계를 모조리 쏟아부었습니다.

불과 11개월 만에 프로토타입이 완성된 차는 2년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스포츠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두 회사가 주행 가능한 프로토타입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공동 개발 시작으로부터 고작 11개월에 불과했습니다. 생산은 시즈오카 현의 야마하 공장에서 이뤄졌지만, 자동차 생산 경험이 전무했던 만큼 부품 공급과 품질 관리는 토요타가 담당합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협업 과정은 후일까지 이어지는 두 회사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총 3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마침내 1967년, 토요타의 첫 고성능 스포츠카이자 그랜드 투어러인 2000GT가 출시됩니다. 그리고 이 차는 토요타의 미래를 바꿔놓습니다.


토요타의 위상을 바꿔 놓은 '일본 최초의 본드카'
2000GT는 토요타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 시기 토요타는 승용차 시장에서야 확고한 입지를 다졌지만, 뻔하고 지루한 대중차 회사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파격적인 디자인과 강력한 성능을 지닌 2000GT의 등장은 토요타의 그런 이미지를 바꿔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럽의 내로라 하는 스포츠카들과 스타일이나 성능 모두 견줘볼 만한 차가 토요타에서 출시됐으니 말이죠.


해외에서의 평가도 좋았습니다. 미국 로드 앤 트랙(Road & Track)은 2000GT에 대해 "지금껏 타본 차 중 가장 짜릿하고 즐거운 스포츠카"라며 극찬했고, 또한 유럽차보다 고급스러운 마감에 대해서도 호평했습니다. 토요타의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겠다는 소정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2000GT의 높은 완성도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만 느껴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이 차의 진가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출시 가격은 238만 엔이었는데, 이는 고급 세단인 크라운의 2배, 대중차인 코롤라의 6배에 달했습니다. 당시 토요타의 기함이자 크라운의 고급 버전이었던 크라운 에이트(Crown Eight)가 165만 엔에 불과했으니, 지금의 물가로 환산한다면 억대를 호가하는 초호화 스포츠카나 다름없었죠.


미국에서의 판매 가격은 6,800달러로, 지금의 물가로 환산하면 5만 3,000달러가 넘는 가격이었습니다. 이는 동년식 포르쉐 911이나 재규어 E-타입보다도 비싼 것이었는데, 이미 검증된 유럽산 스포츠카 대신 성능도 떨어지고 브랜드도 낯선 일본산 스포츠카를 웃돈 주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2000GT의 공식 판매량은 337대에 그칩니다. 그러나 결코 아깝지 않은 투자였습니다.

이처럼 높은 가격 탓에 2000GT의 판매량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토요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70년 단종 전까지 판매된 2000GT는 고작 337대에 그칩니다. 페라리 같은 초고가 스포츠카에서나 볼 수 있는 판매량이죠. 이 중 미국에 수출된 건 고작 60대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비싼 가격을 받고도 토요타는 2000GT를 한 대 팔 때마다 손해를 볼 정도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2000GT의 판매 부진은 이 차를 통해 토요타가 얻은 이미지 개선 효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2000GT의 출시로 토요타의 이미지는 단숨에 뻔한 대중차 브랜드에서 세계구급 스포츠카를 만들 수 있는 역동적이고 저력있는 브랜드로 바뀌었으니까요. 내수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토요타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2000GT의 유명세를 더한 건 007 시리즈 출연이었습니다.

이 2000GT의 유명세를 더한 일이 있으니, 바로 1967년작 '007 두 번 산다'가 일본에서 촬영될 당시 본드카로 등장한 일입니다. 제작진은 고급 GT카를 선호하는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 차를 섭외했는데, 키가 188cm에 달하는 숀 코너리가 타기에는 2000GT가 너무 작은 게 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토요타에 차량 개조를 요청하자, 토요타는 "2주만 기다려 달라"며 단숨에 2000GT의 컨버터블 버전을 제작해 왔다는 야사가 전해집니다. 이렇게 제작된 2000GT 컨버터블은 단 2대 뿐이며, 일반 판매는 이뤄지지 않고 오직 영화 촬영에만 사용된 뒤 박물관에 보존 중입니다.

오늘날 토요타의 스포츠카, 나아가 렉서스의 LFA나 LC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건 2000GT 덕입니다.

2000GT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고성능차 수요를 확인한 토요타는, 이후 코로나의 쿠페 버전인 1600GT, 셀리카 등 저렴하면서도 운전의 즐거움을 갖춘 스포츠 모델을 잇따라 출시했고, 2000GT 단종 후 끊긴 플래그십 스포츠카 계보는 이후 스포츠카인 수프라와 GT카인 소어러로 계승됩니다. 더 길게 보자면 오늘날 토요타의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가 한정판 스포츠카 LFA나 럭셔리 GT인 LC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2000GT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또한 2000GT 프로젝트에서 합을 맞췄던 야마하와는 이후 꾸준히 협업을 진행해 왔는데요. 토요타 스포츠 모델에 탑재됐던 3S-GE/GTE 계열 엔진이나 렉서스 고성능 모델용 5.0L V8 2UR-GSE 엔진, LFA 전용의 4.8L V10 1LR-GUE 엔진의 개발에도 야마하가 참여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두 회사의 협업은 이어질 전망입니다.

2000GT는 역대 일본 클래식카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가치를 자랑합니다.

높은 희소성과 상징적 의미 덕분에 2000GT는 경매 시장에서도 가치가 높은데요. 지난 2013년에는 RM 소더비 경매에서 120만 달러(한화 약 14억 원)에 낙찰된 바 있고, 가장 최근인 2020년에는 91만 2,500달러(한화 약 10억 7,000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경매 시장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대략 10~20억 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역대 일본 클래식카 중에서는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합니다.


물론 2000GT의 가치는 가격표 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공산품인 자동차지만, 계산이 아닌 열정이 투입됐을 때 비로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동차는 과거에 비하자면 엄청나게 고도화되고, 전동화니 자율주행이니 하는 이야기로 바쁘지만, 그럼에도 결국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건 만드는 이들의 열정이 담긴 자동차가 아닐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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