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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26. 2022

르노 클리오 V6 르노스포츠: 다시 없을 광기의 핫해치

수요 명차 극장

자동차는 적당한 성능과 품질, 가격을 갖춰 많은 소비자에게 선택 받아 팔리는 것이 목적인 제품입니다. 더구나 자동차는 개인이 구입하는 소비재 중에서는 손에 꼽게 비싼 데다 개발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제조사들도 설계나 디자인에 있어 가급적 보수적인 경향을 띱니다. 기껏 큰 돈 들여 만든 자동차가 거하게 망해버리면 회사가 휘청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제조사들은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차를 만들어내곤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차는 상업적으로 성공하긴 어렵지만, 오래도록 마니아들에게 회자되곤 합니다.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고 만들어 낸 광기어린 자동차 만큼 멋진 건 없으니까요.

어찌 보면 무식하고, 어찌보면 호기로운 차, 클리오 V6를 만나볼까요?

지난 세기말에 탄생한 르노 클리오 V6 르노스포츠도 소위 말하는 "똘끼 충만한" 차였습니다. 지극히 대중적이고 평범한 소형 해치백의 뒷좌석을 들어내 6기통 엔진을 얹은, 어찌보면 무식하고 어찌보면 호기로운 이 차는, 자동차 역사 상 다시는 없을 광기 어린 핫해치로 기억됩니다.


우리 심심한데 레이스나 할까?
1990년대, 르노는 만성적인 재정난 해소를 위해 F1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합니다.

1990년대의 중반을 갓 넘긴 시점, 르노는 안팎으로 복잡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국영 기업이었던 르노의 악화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회사를 민영화하고 체질 개선에 나섭니다. 자동차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두 가지, 구조조정과 돈 많이 드는 모터스포츠 프로그램을 줄이는 것이죠.


산하의 고성능 브랜드(였지만 돈은 별로 못 벌던) 알피느(Alpine)를 폐지하고, 포뮬러원(F1)의 엔진 개발 예산을 삭감하고, 훗날 회장직에 오른 카를로스 곤 당시 부사장의 지휘 하에 구조조정과 더불어 생산성 향상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돈 세는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다행히 이 시기 르노가 재미있는 차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르노의 모터스포츠 프로그램과 고성능차 개발을 담당하는 르노스포츠(Renault Sport)는 알피느 폐지 후 공장과 인력을 인수받아 르노의 역동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홍보할 차를 꾸준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르노스포츠 스파이더는 나름 파격적인 경량 미드십 로드스터였지만, 로터스 엘리스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합니다.

르노스포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첫 차는 르노스포츠 스파이더. 구 알피느의 디에프 공장에서 수작업으로 조립된, 알루미늄 섀시에 고성능 2.0L 엔진을 미드십으로 얹은 이 경량 스포츠카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경량화를 위해 윈드실드조차 옵션으로 만든 퓨어 스포츠카는 너무 불편했고, 가격도 제법 나간 데다, 무엇보다 하필 같은 해 데뷔한 경량 스포츠카의 전설, 로터스 엘리스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레이스카 버전까지 합쳐 연 평균 600대 남짓의 스파이더를 근근히 만들어 팔고 있었던 르노스포츠는 새로운 지시를 받습니다. 갓 출시된 2세대 클리오의 판촉과 커스터머 레이싱 프로그램을 위해 클리오 레이스카를 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하드코어한 버전으로 말이죠.

2세대 클리오의 커스터머 레이스를 위해, 르노스포츠는 전설적인 R5 터보를 부활시키기로 합니다.

다른 회사였다면 기껏해야 전륜구동 플랫폼에 집어넣을 수 있는 적당히 큰 엔진이나 터보차저를 얹는 정도에서 그쳤겠지만, 르노스포츠는 달랐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비슷한 차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죠. WRC에 출전하기 위해 르노 5(R5)의 뒷좌석에 미드십으로 터보 엔진을 얹은, 르노 5 터보 말입니다.


마침 클리오는 르노 5의 직계 후속이었고, 일반 도로가 아닌 레이스용 머신이라면 안전성이나 편의성 같은 요소들을 크게 신경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르노스포츠는 당장 클리오의 뒷좌석을 몽땅 뜯어내고, 르노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3.0L V6 엔진을 가져다 얹습니다. 흡기 효율과 엔진 배치, 주행 안정성을 고려해 R5 터보처럼 과격한 와이드 휀더도 적용했죠.

클리오 V6 트로피가 등장하자마자, "당장 로드카로 만들어 달라"는 고객들의 요구가 빗발쳤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트랙 전용 레이스카, 클리오 V6 트로피는 르노 창립 100주년을 앞둔 1998년 파리 오토 살롱에서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습니다. 전설적인 호몰로게이션 스페셜의 오마주이자, 대형 세단에 들어가던 엔진을 미드십으로 얹은 기상천외한 레이스카는 뜨거운 반응을 얻습니다.


이듬해부터 시작된 클리오 V6 트로피 원메이크 시리즈는 많은 관심을 얻었고, 클리오의 이미지 제고와 모터스포츠 마케팅 양면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르노의 예상대로였습니다. 딱 한 가지, 클리오 V6의 시판을 원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만 빼고 말이죠.


밀레니엄에 되살아난 80년대의 광기
1군 모터스포츠 급은 아니지만, 클리오 V6 레이스카를 탈 만큼 돈 많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클리오 V6 레이스카는 작고 귀여운 클리오를 유럽에서 가장 핫한 소형차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R5 터보의 복각 버전이라 해도 될 이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건 1년에 몇억 원 정도는 쓸 수 있는 선데이 레이서들 뿐이었습니다. 285마력을 내는 미드십 레이스카는 아무리 클리오의 외형을 하고 있다 해도 아무나 덤빌 가격이 아니었으니까요.


생각보다 많은 고객들이 클리오 V6의 로드고잉 버전을 요구했고, 예상 밖의 뜨거운 반응에 르노스포츠는 모터스포츠와 로드카 개발 경험이 풍부한 영국의 톰 워킨쇼 레이싱(Tom Walkinshaw Racing, TWR)에 클리오 V6의 로드카 제작이 가능할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TWR은 레이스 뿐 아니라, 르망 레이스카 기반의 XJR-15를 만들 만큼 엔지니어링 역량도 뛰어났습니다.

TWR은 이미 재규어의 르망 레이스카 기반 로드카 XJR-15를 개발해 본 경험이 있는 만큼, 클리오 V6의 양산은 그리 어려운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능할 것 같다"는 TWR의 답신을 받은 뒤, 르노 경영진은 클리오 V6를 양산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미 2년여 간 레이스가 진행되며 많은 데이터를 쌓은 만큼, 클리오 V6의 개발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트로피 시리즈에서 얻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이 막무가내의 차량을 보다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클리오 V6 페이즈 1의 단면도. 구조적으로는 레이스카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외관의 스타일링은 레이스카와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많이 과격해지긴 했지만 클리오의 뼈대를 공유하고 있는 만큼, 인증 법규에 맞춰 등화류나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더하면 됐죠. 뒤집어 말하면, 양산차의 탈을 쓴 레이스카나 다름 없었다는 뜻입니다.


엔진 역시 레이스카와 동일하게, PSA 그룹과 르노가 공동 개발한 2.9L V6 엔진을 미드십으로 탑재했습니다. 다만 7,000rpm이 넘는 최대 회전수에 285마력을 내던 레이스용 엔진은 양산 버전에서 230마력으로 디튠됐고, 시퀀셜 변속기 대신 6속 수동변속기가 적용됐습니다. 여기에 강력한 토크를 통제하기 위해 LSD가 기본 장착됐습니다.

엔진 커버를 벗긴 클리오 V6의 내부. 엄청난 엔진열이 차내를 가득 채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양산 버전에는 롤케이지 대신 내장재가 부착돼 대시보드만 보면 평범한 클리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툼한 버킷 시트 바로 뒷편에는 뒷좌석 대신 엔진을 억지로 덮어놓은 커버 뿐이었죠. 시동을 걸면 실내에는 엔진의 사운드와 진동, 그리고 엄청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아무리 양산차의 탈을 쓰고 있어도, 이 차는 제 정신이 아닌 레이스카였죠.


사실 클리오 V6의 수치 상 퍼포먼스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전륜구동 클리오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을 냈던 172 컵(Cup) 모델과 비교하면 출력이 60마력이나 높았지만, 원래 제 것이 아닌 미드십 설계를 적용하면서 차대를 보강한 결과 중량도 300kg나 늘었기 때문이죠. 0-100km/h 가속 시간은 고작 0.5초 빨랐고, 최고속도도 235km/h로 13km/h 빠른 데 그쳤습니다.

클리오 172(왼쪽)와 클리오 V6. 수치 상의 성능 차이는 대단치 않았지만, 주행 감각은 천지차이였습니다.

하지만 두 차의 주행 경험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짧은 휠베이스와 일반 클리오보다 300mm나 넓은 전폭, 이 차급에서 경험할 일 없는 대형 엔진의 기이한 무게배치와 뒷바퀴에 전달되는 강력한 토크는 클리오 V6를 가장 아찔하고 흥분되는 스포츠카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무한 경쟁이 펼쳐졌던 80년대 그룹 B의 광기를 현대적으로 멋지게 재해석한 클리오 V6의 또 다른 매력은 현실적인 가격이었습니다. 출시 당시 클리오 V6의 가격은 한화 약 4,200만 원(*영국 기준) 정도로, 물론 일반 클리오보다는 훨씬 비쌌지만, 230마력짜리 미드십 스포츠카 치고는 매우 저렴했습니다. 선택받은 이들만 살 수 있었던 과거의 호몰로게이션 카들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었죠.


다시는 볼 수 없을 낭만 핫해치
2003년 출시된 페이즈 2 모델. 헤드램프 형상이 달라지고, 편의사양 강화와 성능 개선이 이뤄졌습니다.

일반 클리오의 페이스리프트에 이어, 클리오 V6도 2003년 페이스리프트를 맞이합니다. 전면부 디자인이 변경된 건 물론, 레인 센싱 와이퍼와 에어컨, 오토 헤드램프, CD 체인저와 6-스피커 오디오 시스템 등 기본 편의사양이 대폭 강화됐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엔진의 성능이 강화된 것이었죠.


클리오 V6 페이즈 2(Phase 2)의 최고출력은 255마력으로, 당대 시판 중인 어떤 해치백보다도 강력했습니다. 심지어 몸집이 더 큰 알파로메오 147 GTA, 세아트 레온 쿠프라 R, 폭스바겐 골프 R32보다도 높은 출력을 내 당대 최강의 핫해치로 군림했습니다.

클리오 V6는 전작 스파이더보다 훨씬 인기가 높아 총 3,000대 이상 생산됐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데다, 적재공간이라고는 손가방을 겨우 넣을 만한 전면 트렁크 뿐이고, 한겨울에도 차내에서 땀이 날 정도로 엔진열이 뿜어져 나왔지만, 클리오 V6는 르노스포츠의 전작인 스파이더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고, 2001년 출시 후 2005년 단종 전까지 트랙 전용 버전을 포함해 총 3,023대가 생산됐습니다.


해치백 차체에 미드십으로 엔진을 얹은 차가 클리오 V6 이전에 없었던 건 아닙니다. 선대 모델이라 할 수 있는 R5 터보를 비롯해 푸조 205 T16, MG 메트로 6R4, 란치아 델타 S4 등 컴팩트 해치백의 탈을 쓴 미드십 호몰로게이션 카들이 종종 있었죠.

클리오 V6가 기술적 조상들과 다른 점은, 소비자들의 열망에 일반도로에 나온 차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레이스카를 위해 최소 수량만 억지로 판매되고, 그나마도 엄청나게 비쌌던 것과 달리, 클리오 V6는 괴짜 같은 레이스카가 열화와도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일반도로로 나온 차였습니다. 워낙 소량만 생산됐고, 그마저도 100% 수제작으로 만들어져 수익을 내는 차는 아니었지만, 클리오 V6는 르노의 기술력과 퍼포먼스를 향한 열정을 소비자들에게 강력히 각인시켜 마케팅적 관점에서는 성공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자동차 관련 법규는 훨씬 까다로워졌기에, 현 시점에 클리오 V6 같은 차가 다시 등장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자동차 회사들은 갈 수록 첨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며, 과거처럼 광기나 낭만으로 점철된 자동차는 만들려고 하지 않죠. 어쩌면 클리오 V6는, 사라져 가는 20세기 자동차의 낭만이 담긴 마지막 자동차일지도 모릅니다.

온통 전기차와 자율주행 이야기 뿐인 시대에, 우리는 이런 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합리적인 자동차는 대중적인 사랑을 받지만, 마니아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어딘가 나사 빠진 발상과 똘끼로 가득한 자동차에 대한 갈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결국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럭되는 건 그런 차들입니다. 자율주행과 전동화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한 2020년대, 우리는 다시 클리오 V6 같은 차를 만날 수 있을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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