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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19. 2022

크라이슬러 콩코드 : 21세기 자동차 디자인의 시작

수요 명차 극장

자동차는 일상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공산품입니다. 때문에 기계적 성능이나 품질이 중요한 판단 지표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동차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에는 심미적 요소, 그러니까 디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매력적인 디자인은 자동차의 다른 흠결을 감춰줄 뿐 아니라 판매량을 끌어 올리고, 나아가 브랜드의 이미지마저 바꿔 놓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동차가 탄생한 이래로 디자이너들은 혁신적이고 참신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사랑 받을 수 있는 차를 만들기 위해 항상 고민해 왔습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혁신성을 모두 잡은 캡포워드 디자인의 주역을 만나볼까요?

오늘 소개할 크라이슬러 콩코드(기아 콩코드와는 무관한 찹니다!)는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크라이슬러를 90년대 미국 자동차 디자인의 리더로 만들어 준 모델입니다. 더욱이 세기말 콩코드가 남긴 유산은 21세기 자동차 디자인의 표준을 제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라이슬러의 디자인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 콩코드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혼돈 속에서 발견한 기회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의 재흥을 이끌었지만, 80년대 말에는 낡아버린 K-플랫폼처럼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크라이슬러의 경영 상황은 한 마디로 '복잡'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설적인 리더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의 지휘 하에 경영난을 해소하고, AMC와 람보르기니를 인수하며 '빅 3'의 명성에 걸맞는 부흥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자금 유동성이 떨어지고, 급격히 늘어난 브랜드 간의 '교통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 간판 브랜드인 크라이슬러와 닷지의 주력 모델들은 노후화 돼 경쟁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특히 핵심 시장인 대형 세단 부문에서 포드 토러스가 돌풍을 불러 일으키며, 구형 K-플랫폼을 사용하는 크라이슬러 뉴요커의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K-플랫폼은 80년대 크라이슬러 부활의 주역이었지만 이미 10년 가까이 사용되며 경쟁력이 많이 떨어졌고, K-플랫폼을 각별히 여기던 아이아코카도 이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죠.

AMC가 구상하고, 크라이슬러의 기획 하에 람보르기니로 공개된 '포르토피노' 콘셉트카. 캡포워드 디자인의 시작입니다.

혁신적인 차세대 세단을 개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크라이슬러는 최근 인수한 AMC와 람보르기니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뒤지던 중 흥미로운 콘셉트를 발견합니다. 바로 1986년 AMC에서 기획한 '나바호(Navajo)'라는 콘셉트카였습니다. 80년대의 각진 디자인을 대신해 유선형의 에어로다이내믹 디자인에 넓은 실내 공간을 강조한 차였죠.


이 나바호 콘셉트카는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AMC와 람보르기니가 크라이슬러 산하의 한식구가 된 뒤 손질을 거쳐 람보르기니 포르토피노(Portofino)라는 콘셉트카로 출품된 바 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이 콘셉트카의 디자인이 그룹의 차기 풀사이즈 세단에 적합하다 보고, 이를 바탕으로 개발을 시작합니다.


섀시 설계는 르노와 AMC를 거쳐 크라이슬러의 차량 개발 총괄 부사장에 오른 프랑수와 카스탱(François Castaing)이 맡았습니다. 그는 닷지에서 설계 중이던, K-플랫폼을 답습한 섀시의 초안을 완전히 폐기하고 완전한 신형 플랫폼 개발에 나섰습니다.

르노 기술력이 들어간 이글 프리미어의 설계가 차세대 플랫폼에 반영됐습니다.

신형 플랫폼은 르노의 기술력을 담은 유러피언 감성의 AMC 세단, 이글 프리미어(Eagle Premier)의 기본 설계를 따 왔습니다. 프리미어는 전륜구동임에도 엔진을 세로배치해 무게 배분이 뛰어났고, 선진적인 서스펜션 구조를 적용해 코너링과 승차감이 우수했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은 차세대 플랫폼에 고스란히 이식됩니다.


카스탱은 플랫폼만 새로 설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제품 개발 프로세스를 뒤집어 엎었는데요. 기존 크라이슬러의 연구소는 차의 각 부위 별, 담당 업무 별로 여러 부서가 쪼개져 있었고, 이들의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데에만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낭비됐습니다.


카스탱은 이런 시스템을 철폐하고 콘셉트부터 양산에 이르는 프로젝트 팀을 구성, 보다 적은 인원으로 빠르고 저렴하게 신차를 개발하는 방식을 도입합니다. 기존에 크라이슬러가 신형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에 1,000명 넘는 인원과 평균 50개월의 개발 기간이 소요된 것과 대조적으로, 카스탱이 주도한 차세대 플랫폼은 고작 700명의 인원으로 39개월 만에 완성됐습니다.

아이아코카와 두 대의 콩코드. 콩코드는 캡포워드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신형 플랫폼에 맞춰 구동계의 개량도 이뤄졌습니다. 구식 OHV 타입 V6 엔진 대신 4-밸브 SOHC 방식의 최신식 3.5L V6 엔진이 탑재됐고, 변속기 역시 세로배치 레이아웃에 맞는 신형 4속 자동변속기가 채택됩니다. 크라이슬러 그룹의 모든 역량을 총집결한 차세대 플랫폼에는 'LH'라는 이름이 붙었고, 마침내 1992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그 첫 양산차인 크라이슬러 콩코드(Concorde)가 데뷔합니다.


캡포워드 디자인, 그 대담함에 대하여
콩코드는 디자인과 설계 양면에서 파격적인 차였습니다.

콩코드는 여러 의미로 파격적인 차였습니다. 경쟁 모델들이 전형적인 3-박스 세단의 형태인 것과 달리, 콩코드는 날렵한 쐐기형 노즈와 유선형의 바디로, (당시 기준으로는) 시대를 크게 앞서간 미래지향적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질적이거나 거부감이 들지도 않고, 상당히 매력적이었죠. 또 경쟁 모델보다 월등히 넓고 안락해 패밀리 카로서의 덕목을 모두 갖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매력적인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캡포워드(cab-forward)' 설계 덕분입니다. 캡포워드란 말 그대로 캐빈룸이 앞쪽으로 전진한 형태로, 오늘날에는 쉽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설계적으로도, 디자인적으로도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K-플랫폼과 LH 플랫폼의 비교. 확연히 전진한 A-필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Danillo Almeida

캡포워드 디자인이 적용된 콩코드는 A-필러가 앞쪽으로 전진하면서 앞바퀴와 가까워졌고, 반대로 뒷바퀴는 C-필러보다 뒷편에 위치했습니다. 앞뒤 차축 사이의 공간을 오롯이 캐빈룸으로 활용함으로써, 같은 크기의 차체에서도 훨씬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죠.


장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캐빈룸이 전진하면서 A-필러와 C-필러가 통상적인 디자인보다 훨씬 눕혀졌는데, 이는 공기저항의 감소로도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콩코드의 공기저항계수(Cd)는 0.31로  당대 대형 세단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캡포워드 스타일은 거주성 뿐 아니라 주행 감각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었습니다.

탑승객이 차체 중앙에 위치하면서 고속 안정성과 승차감이 개선되고, 코너링 성능이 향상되는 것도 캡포워드의 장점이었습니다. 실내 공간을 넓히기 위해 억지로 휠베이스를 늘릴 필요가 없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작은 회전 반경의 이점을 가져왔습니다. 전장이 5.1m에 달했지만 운전하기에 부담이 없었죠.

세로배치 엔진 구조 덕에 정비성이 개선된 것도 장점이었습니다.

세로배치 엔진도 이점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륜구동 차량은 가로배치 엔진을 얹는 게 정석이었지만, 캡포워드 설계가 반영되면서 오히려 엔진을 세로로 얹는 쪽이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후드 높이를 낮춰 날렵한 전면부 형상을 만들 수 있고, 정비성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었죠. 후일 다임러와의 합병으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LH 플랫폼은 세로배치 엔진 덕에 후륜구동에도 대응할 수 있는 설계의 유연성까지 지닐 수 있었습니다.


콩코드가 이 같은 캡포워드 디자인을 처음 시도함에도 성공적으로 안착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설계를 담당한 AMC 출신 엔지니어들이 이미 캡포워드 디자인을 시도한 적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5년 출시된 AMC의 소형 해치백, 페이서는 캡포워드 디자인을 적용해 작은 차체에도 넓은 공간을 지녔습니다. 소형차 개발 노하우가 풍부한 르노와 제휴 관계를 맺으며 유럽식 차량 설계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21세기 캡포워드 디자인의 대표 격인 현대 아반떼 MD. 캡포워드 스타일은 소형차의 표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콩코드에서 시작된 캡포워드 디자인은 이후 10년여 간 크라이슬러의 모든 세단 라인업에 적용됐고, 포드나 GM 같은 경쟁사들도 뒤따라 캡포워드 설계를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다른 글로벌 제조사들도 이런 스타일링 공식을 따르면서, 특히 작은 차체와 공간 활용도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소형차나 준중형 차급은 오늘날까지도 캡포워드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크라이슬러, 트렌드 리더가 되다
콩코드는 크라이슬러 세단의 세대 교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습니다.

파격적인 디자인과 더불어 여유로운 실내 공간, 호화로운 편의 및 안전 사양으로 무장한 콩코드는 크라이슬러 그룹 세단의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알렸습니다. 천연가죽 인테리어, 자동변속기,파워 윈도우와 중앙제어식 도어락, 듀얼 에어백, ABS 등이 기본 사양으로 장착됐고, 1열 8-way 전동 시트, 리모콘 시스템과 인피니티 오디오, 트랙션 컨트롤, 2-way 전동 선루프 등의 옵션을 제공했습니다.

콩코드의 형제 모델인 이글 비전(왼쪽)과 닷지 인트레피드. 각 모델의 외장은 80% 이상 차별화됐습니다.

뱃지 엔지니어링 방식의 형제차도 여럿 등장했는데요.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의 이글(Eagle) 브랜드를 통해 출시된 비전(Vision), 크라이슬러보다 대중적인 이미지의 닷지(Dodge) 브랜드의 인트레피드(Intrepid) 등의 쌍둥이 모델이 속속 출시됐습니다. 이들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외장의 80% 가량을 차별화해 적은 비용으로 각 브랜드의 개성을 강화하고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혔습니다.

LH 플랫폼의 고급 모델, LHS와 뉴요커는 더 긴 전장과 호화로운 편의사양을 갖췄습니다. 사진은 LHS.

또 이듬해인 1993년에는 LH 플랫폼을 공유하는 고급화 모델, LHS와 뉴요커(New Yorker)가 출시됩니다. 이들은 카스탱의 주도 하에 도입된 컴퓨터 설계를 통해 차체 설계가 일부 변경되었음에도 굉장히 단기간에 개발이 완료됐는데요. 휠베이스는 동일하지만 고급 세단인 만큼 전장이 150mm 가량 늘어나고 루프 라인을 수정해 뒷좌석 거주성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LHS와 뉴요커는 콩코드의 상위 모델에 사용되는 3.5L SOHC 엔진이 기본 탑재됐고, 트랙션 컨트롤과 전동 시트, 오토 에어컨 같은 고급 사양이 기본으로 탑재됐습니다. 외관 상으로는 두 모델이 대동소이했지만, 뉴요커는 전통적인 미국차의 승차감을, LHS는 유럽 고급차와 흡사한 탄탄한 승차감을 지향했다는 것이 차이였습니다.

LH 카의 성공 이후, 크라이슬러는 중형급의 JA 카를 출시해 캡포워드 라인업을 확장합니다.

LH 플랫폼을 사용한 차량들이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크라이슬러는 중형급에도 캡포워드 스타일이 적용된 JA 플랫폼 모델들-크라이슬러 시러스, 세브링, 닷지 스트라투스, 플리머스 브리즈 등-을 투입합니다. 이 모델들 또한 세련된 디자인과 준수한 성능으로 호평 받았습니다.


물론 콩코드로 대표되는 LH 형제들이 크라이슬러 그룹의 부진을 한 번에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의 선전에도 크라이슬러는 GM이나 포드에 비하면 약체였죠. 하지만 시대를 앞서 간 선진적인 설계와 디자인은 크라이슬러를 미국 '빅 3' 중 가장 트렌디한 브랜드로 만들어 줬고, "미국차 중 가장 혁신적이고 스타일리시한 회사"라는 이미지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이어졌습니다.

LH 플랫폼은 한 번의 페이스리프트 이후, 2004년을 끝으로 단종됩니다.

1998년 다임러크라이슬러 체제가 출범하면서 이글과 플리머스 브랜드가 폐지되고, 메르세데스-벤츠 설계를 공유하는 후륜구동 LX 플랫폼 기반의 크라이슬러 300C와 닷지 차저가 데뷔하면서, 혁신적인 설계의 LH 플랫폼은 2004년을 끝으로 모두 단종됐습니다. 이 즈음에는 유선형 디자인의 유행이 끝나고 다시 각지고 강한 인상의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크라이슬러가 자랑했던 캡포워드 디자인도 자취를 감췄죠.

최신 전기차들의 디자인도 캡포워드의 공식을 충실히 따릅니다. 그 시작에는 콩코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콩코드에서 시작된 캡포워드 디자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특히 전기차 시장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요. 전기차의 경우 공간 배치가 비교적 자유로운 만큼, 테슬라 모델 3나 메르세데스-벤츠 EQS같은 전기 세단들은 아예 A-필러를 극단적으로 전진 배치해 실내 공간을 극대화한 캡포워드 디자인을 채택하는 추세입니다.


최신 전기차들의 이러한 캡포워드 스타일도 그 기원을 따져 보면 30년 전의 콩코드가 '원조'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첫 등장 때는 미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가 유행이 바뀌며 사라진 뒤, 다시금 시대적 요구에 따라 돌아오는 걸 보면, 역시나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활하는 크라이슬러에서 다시 한 번 캡포워드 디자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는 FCA와 PSA가 스텔란티스라는 거대 그룹으로 합병하면서, 빈사 상태였던 크라이슬러 브랜드에도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미국 시장을 정조준한 프리미엄 전동화 전문 브랜드로 부활시키겠다는 건데요.


어쩌면 크라이슬러를 트렌드 리더로 만들어 주고, 21세기 자동차 디자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콩코드 또한 근사한 전기차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또 하나의 혁신적 아이디어와 함께 말이죠.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니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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