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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Jan 12. 2022

피아트 판다 : 청바지를 닮은 시티카의 탄생

수요 명차 극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차종은 대형 세단이나 패밀리 SUV지만, 자동차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여전히 소형차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좁은 옛 골목이 즐비한 이탈리아는 한국의 경차 급 차량인 A-세그먼트 소형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인데요. 오랫동안 소형차를 찾는 소비자가 많았던 만큼 이탈리아 제조사들은 소형차 개발의 역사도 길고, 노하우도 풍부합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형차 하면 열에 아홉은 피아트 500(친퀘첸토)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실 초대 누오바 500은 네 바퀴 달린 오토바이나 다름없었고, 최신 500은 아이코닉한 디자인을 재해석한 패션카에 가깝습니다. 튼튼하고 실용적인 서민의 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이탈리아인들의 진짜 일상을 대표하는 소형차를 고른다면 오히려 피아트 판다(Fiat Panda)가 더 적합합니다.

처음 봐도 친숙한, 기묘한 차. 판다의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왠지 귀여운 느낌이 드는 이름, 유행을 타지 않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모던한 디자인, 기본기에 충실한 성능과 놀라운 경제성까지 갖춘 판다는 20세기 말 가장 성공적인 대중차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마치 청바지처럼 튼튼하고 실용적이면서도 멋스러운 차, 판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주 만에 기획된 '프로제토 141'
오일 쇼크로 소형차 수요가 늘었지만, 피아트 126은 너무 구식 차였습니다.

때는 1976년, 오일쇼크로 유가가 치솟으면서 세계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불과 한 달 만에 유가가 4배 넘게 오르면서 석유를 거의 공짜로 쓰고 있던 서방 세계의 자동차 회사들은 연비 좋은 소형차 만들기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피아트는 전통의 소형차 강호였지만, 당시 팔고 있던 소형 시티카 126이 시대에 뒤처진 차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126은 오일쇼크 직전인 1972년 출시됐지만, 사실 상 누오바 500의 몸집을 키우고 외관을 바꾼 차나 다름 없었죠. 리어 엔진 레이아웃 탓에 공간 활용도가 나빴고, 조작성도 까다로웠습니다. 영국의 미니처럼 공간 활용도가 높으면서 현대화된 전륜구동 소형차가 필요했습니다.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피아트를 떠난 베네데티였지만, 그는 불세출의 명작 판다를 탄생시켰습니다.

유류비 부담에 허리띠를 졸라 맨 소비자들을 위해, 피아트의 새 CEO로 취임한 카를로 데 베네데티(Carlo De Benedetti)는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소형차를 구상합니다. 그는 컨테이너 상자처럼 넓고 실용적인 공간을 갖추면서도, 불필요한 장식은 덜어내 기존 모델인 126보다 비싸지 않고 유지 부담이 적은 차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아트는 공장 노동조합이 극좌파 테러 단체인 붉은 여단(Le Brigate Rosse)에 연루되는 등 내흉을 겪으면서 신차를 개발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베네데티는 창사 이래 최초로 신차의 기획부터 개발에 이르는 거의 모든 과정을 이탈디자인(Italdesign Giugiaro)에 위탁하기로 합니다.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1세대 폭스바겐 골프. 그는 모던한 터치로 70년대 떠오르는 스타 디자이너였습니다.

이탈디자인은 젊은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와 엔지니어 알도 만토바니(Aldo Mantovani)가 설립한 디자인 및 엔지니어링 회사입니다. 1968년 회사를 설립하고, 1970년대에는 폭스바겐과 협업하며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요. 전설적인 1세대 골프, 시로코, 파사트, 아우디 80 등이 모두 이탈디자인의 작품이었습니다.


1976년 여름, 베네데티의 의뢰를 받은 주지아로와 만토바니는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휴양 도시 포르토 체르보(Porto Cervo)로 떠납니다. 휴가가 아닌, 신차를 구상하기 위해서였죠. 두 사람은 이 낭만적인 도시에서 '제로(Zero)'라는 가칭의 아이디어를 실체화하기 시작합니다.

주지아로의 판다 디자인 스케치. 그는 만토바니와 함께 보름 만에 판다의 설계를 마쳤습니다.

두 사람의 콤비는 그야말로 대단했는데요. 주지아로는 패키징과 스타일링을, 만토바니는 그렇게 구상된 차의 기계적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차의 기본 콘셉트는 '청바지'였습니다. 튼튼하고 실용적이지만, 투박하지 않고 멋스러워야 했죠. 또 구조가 단순하고 정비하기 쉬워 유지 부담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디자인과 설계가 끝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15일. 그것도 두 사람의 손에서 완성됐습니다. 두 사람은 짧은 기한에 맞춰 기적처럼 신차를 설계했고,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딱 한 가지, 불과 세 달 전 취임해 이들에게 일을 맡겼던 베네데티가 돌연 사임한 것만 빼면 말이죠.

의뢰인 베네데티는 회사를 떠났지만, 판다 프로젝트는 살아남아 추진됩니다.

베네데티는 떠났지만, 다행히도 남은 경영진은 여전히 이탈디자인의 기획안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지아로와 만토바니는 풀스케일 모델과 디자인 시안, 소형차 시장의 동향 및 경쟁 모델 분석에 이르는 철저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이들을 설득했고, 피아트 경영진은 이를 받아들여 '프로제토 141(Progetto 141)'의 개발을 승인합니다.


다재다능한 서민의 발
판다의 프로토타입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시제차가 완성됩니다.

이탈디자인의 시안은 거의 그대로 양산에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기에, 프로제토 141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개발 승인으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운행 가능한 시제차 20대가 만들어졌고, 1978년부터는 비공개 품평을 거치며 완성도를 높여 나갔습니다.


1979년 말부터 생산이 시작됐고, 공식 데뷔는 이듬해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 이뤄집니다. 차의 최종 시판명은 판다(Panda)로 확정됐는데, 자이언트 판다에서 따 왔으리란 세간의 생각과는 달리, 이름의 유래는 로마 신화 속 여행자의 수호신인 엠판다(Empanda)입니다.

판다의 작명은 판다곰과 관련 없지만, WWF의 견제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요. 자연 보호 단체로 유명하며 자이언트 판다 로고로 유명한 세계자연기금(WWF)이 '판다'라는 작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환경을 파괴하는 자동차에 멸종위기 동물의 이름을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였는데요.


이들의 강력한 반발에, 피아트는 WWF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걸로 쿨하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법규 상 수표를 지급할 때는 종이가 아닌 어떤 물건에든 액면가를 기재할 수 있었는데요. 피아트는 갓 출시된 판다를 수표(!)로 사용해 WWF에 기증했고, 이후 WWF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지아로는 판다를 "군용차 같은 느낌으로 디자인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완성된 판다는 군더더기 없는 주지아로 특유의 스타일링에, 3.4m도 되지 않는 전장을 지니고도 놀라운 실용성과 경쾌한 주행 성능을 두루 갖춘 차로 완성됐습니다. 일상적인 퍼스널 시티카로 쓰기에 손색이 없었는데,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놀라운 실용성까지 갖췄죠.


주지아로는 후일담에서 "마치 군용차를 설계한다는 느낌으로 디자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쉽게 찌그러지지 않는 튼튼한 차체에 생산 비용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곡률을 아예 없앤 평평한 유리창과 철판을 두르고, 오디오나 에어컨조차 배제한 인테리어는 최대한 기능성에 집중했습니다. 심지어 원가 절감을 위해 도어캐치도 삭제하고, 열쇠 구멍을 누르면 문이 열리는 방식이었죠. 여기에 고탄성 플라스틱으로 만든 범퍼와 사이드 몰딩을 덧대 멋을 더하면서 원가는 낮추는 한편, 강성을 높이고 흠집이나 덴트를 막는 역할까지 했습니다.

독특한 판다의 직물 시트. 모든 시트를 펴면 간이 침대가 됐고, 2열 시트는 접거나 뗄 수 있었습니다.

시트는 마치 접이식 의자 같은 구조와 소재를 사용해 평소에는 편하게 앉을 수 있지만 간편하게 접거나 떼어내고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성인 4명이 넉넉히 앉고도 트렁크에는 50L 들이 와인통 2개를 실을 수 있었고, 폴딩 시에는 무려 1,000L의 적재 공간이 확보됐습니다. 이를 위해 모노코크 바디와 전륜구동을 채택하고 실내 바닥을 완전히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부 시장에서는 126에서 가져온 660cc 공랭식 2기통 엔진을 얹어 판매했지만, 주력 모델은 900cc 수냉식 직렬 4기통 엔진이 얹힌 모델이었습니다. 여기에 4속 수동변속기가 조합됐고, 후일 5속 수동변속기 옵션이 추가됩니다.

판다는 두 달 만에 7만 대의 주문을 받으며 단숨에 유럽 최고의 히트작이 됐습니다.

판다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출시 후 두 달 만에 7만 대의 주문을 받았고, 토리노의 미라피오리 공장과 아우토비앙키에 위탁 생산하는 물량도 모자라 인노첸티에도 위탁 생산을 맡길 정도였죠. 또 스페인의 세아트도 판다의 라이선스를 얻어 생산을 할 정도로, 단숨에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형차로 거듭났습니다.


피아트 판다, 최초의 역사
판다는 세계 최초의 가로배치 전륜구동 기반 4륜구동 시스템으로도 유명합니다.

보기에는 작은 꼬마 자동차처럼 보이지만, 판다는 큰 인기를 얻은 만큼 많은 진기록도 세운 모델입니다. 가장 유명한 건 세계 최초의 가로배치 전륜구동 기반 4륜구동 시스템을 탑재한 것입니다. 판다는 뛰어난 내구성과 우수한 적재 능력 덕분에 시골 농장에서도 애용됐는데, 구동 방식의 한계로 차가 진흙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험지주파력을 강화해 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피아트는 4륜구동 기술력이 풍부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푸흐에게 판다의 4륜구동 설계를 맡깁니다. 이렇게 1983년 탄생한 판다 4x4는 일반 모델보다 높은 지상고와 저속기어를 포함한 4륜구동 시스템을 탑재했습니다. 이 모델은 농촌이나 근교 지역 운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판다에는 기이한 순수 전기차 버전도 있었습니다.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피아트는 이 차를 끈질기게 팔았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기록이, 바로 판다의 전기차 버전입니다. 1990년 출시된 판다 엘레트라(Panda Elettra)는 19마력을 내는 전기 모터를 탑재한 전기차였습니다. 놀랍게도 단순 프로토타입이 아닌, 실제로 시판한 차였는데요. 최초의 전기차로 알려진 GM EV1보다도 6년이나 빨리 시판됐습니다.


물론 판다 엘레트라가 실용성 있는 차는 아니었습니다. 뒷좌석과 엔진룸 일부에 배터리를 가득 채워 넣어 짐을 실을 수도 없었고, 이 때문에 일반 판다보다 450kg나 무거워 엄청 느렸죠. 게다가 배터리 무게를 견디기 위해 서스펜션 감쇠력을 높이면서 승차감도 나빴습니다. 결정적으로 일반 판다보다 무려 3배나 비싸 이 차를 사는 괴짜는 거의 없었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피아트는 판다 엘레트라를 끈질기게 팔았고, 유럽 시장에서 판다가 거의 단종될 즈음인 1998년에야 엘레트라 또한 단종됩니다.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판다 엘레트라는 대량생산 제조사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전기차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기념비적인 모델입니다.

판다는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선보이며 20년 넘게 장수했습니다. 사진은 후기형 패널 밴 버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판다의 가장 근사한 기록은 '장수' 타이틀입니다. 소형차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개발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델 수명이 짧은 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본기에 충실한 세그먼트인 만큼, 꼭 필요한 요소만 잘 갖추고 있다면 의외로 '롱 런'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요. 판다는 이 중 후자에 속했습니다.


출시 7년차인 1986년 첫 번째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성능과 스타일을 업그레이드했고, 1991년에는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CVT 자동변속기(셀렉타) 옵션을 추가했습니다. 공랭식으로 시작된 엔진도 이 때에 이르러서는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로 바뀌고, 촉매변환기를 탑재해 배출가스도 줄였죠. 최후기형 1.1L 엔진의 최고출력은 51마력까지 높아졌습니다.

판다는 오늘날 미니처럼 다양한 한정판 에디션을 선보였습니다. 사진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에디션.

판다의 인기는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영국에서는 1995년 판매가 종료됐고, 이탈리아의 생산 라인이 멈춘 건 그로부터도 8년 뒤인 2003년 9월 5일의 일입니다. 총 생산대수는 449만 1,000대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미니, 시트로엥 2CV, 르노 4 처럼 40년 넘게 생산된 모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판다 역시 총 23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오랜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판다는 작지만 실용적이고, 강력한 4X4 옵션까지 지닌 시티카의 이미지를 잇고 있습니다.

탁월한 내구성과 우수한 공간 활용도, 4륜구동으로 대표되는 우수한 주행 성능은 판다 만의 고유한 개성으로 자리 잡으면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행 판다는 3세대 모델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테일게이트를 적용해 적재 능력을 높이고 '판다 크로스'라는 4륜구동 트림을 추가하는 등 오리지널의 특징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피아트 첸토벤티 콘셉트카는 전기차 시대 판다의 예고편입니다.

지난 2019년에는 오리지널 판다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소형 전기차, 첸토벤티(Centoventi) 콘셉트카가 공개됐습니다. 판다 고유의 심플한 디자인에 범퍼와 보디 패널 컬러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고, 주행거리를 100km에서 500km까지 조절할 수 있는 모듈형 배터리 팩을 탑재해 차량 가격을 낮춘 것이 특징인데요. 전기차 시대에도 작고 저렴하면서 실용적인 판다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모양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소비자들이 자동차에게 기대하는 것들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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