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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Feb 09. 2022

BMW E32 7시리즈 : V12와 타도 벤츠의 꿈

수요 명차 극장

최근 BMW가 최상급 모델에 탑재해 왔던 V12 엔진의 단종을 선언했습니다. BMW 라인업 중 유일하게 M760Li에만 탑재되는 V12 엔진이 2022년 7월 단종되고, 차세대 7시리즈에서는 V8 이하의 엔진과 전동화 파워트레인으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계획입니다.


V12 엔진이 단종되는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 갈수록 높아지는 배출가스 규제의 벽을 넘기 어려울 뿐더러, 사용할 수 있는 차종이 극히 제한되는 반면 엄청난 개발 비용이 투입돼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유수의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12기통 엔진을 포기하지 않은 건, 복잡한 구조와 엄청난 성능을 지닌 V12 엔진은 그 자체로 회사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헤일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프리미엄 브랜드들의 V12 엔진 경쟁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BMW였습니다.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져 잊혀져 가던 V12 엔진을 다시 꺼내들고 프리미엄 시장의 왕좌에 있던 메르세데스-벤츠에게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차,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BMW 2세대 7시리즈(코드명 E32)의 이야기입니다.


삼각별의 왕좌에 도전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프리미엄 시장의 독보적 1위는 메르세데스-벤츠였습니다. 사진은 W116 시리즈.

오늘날에야 세간에서 메르세데스-벤츠·BMW·아우디를 묶어 '독일 3사'라고 부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메르세데스-벤츠는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한 회사였습니다. BMW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존폐 위기에 몰렸다가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뒤 조금씩 몸집을 불려가며 프리미엄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1968년 출시된 코드명 E3, 소위 '뉴 식스' 세단은 501/502 이후 끊겼던 BMW 럭셔리 세단의 계보를 잇는 모델이자 BMW 기함으로선 처음으로 현대적인 3-박스 세단 형태를 적용한 모델이었습니다. 뉴 식스는 스포티한 디자인과 우수한 주행 성능으로 호평 받습니다.

뉴 식스 세단은 우수한 성능으로 호평받았지만, 럭셔리 세단이라고 하기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뉴 식스는 오너 드리븐 성향의 대형 세단에 가까웠고, BMW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기함과 정면 대결할 수 있는 본격적인 럭셔리 세단을 추구했습니다. 새로운 작명체계 하에서 '7시리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뉴 식스의 후속 모델은 더 화려한 첨단 기능과 고급 사양을 두르고 1977년 데뷔합니다.


1세대 7시리즈, 코드명 E23은 여러 면에서 혁신을 주도한 모델입니다. 전자식 속도계와 속도감응형 스티어링 시스템, 전동식 사이드미러, 전자식 차량 모니터링 시스템 등 첨단 기능을 잔뜩 탑재하고 BMW의 기술적 기함(technical flagship)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크고 고급스러우며 잘 달리기까지 했던 7시리즈는 유럽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요.

E23 7시리즈는 여러 면에서 혁신을 주도한 플래그십 세단입니다.

그럼에도 BMW가 메르세데스-벤츠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엔진이었습니다. E23 7시리즈의 엔진 라인업은 2.5L~3.5L급 배기량의 직렬6기통 엔진 일색이었습니다. V8 엔진을 탑재한 메르세데스의 기함 W116·W126과 대등하게 경쟁하려면 호화로운 첨단 기능 뿐 아니라, 더 강력한 엔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을 깜짝 놀래킨 V12 엔진
BMW는 6기통 엔진에 터보차저를 얹었지만, V8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같은 첨단 전자제어가 없었던 시대, 엔진의 성능을 끌어올리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배기량을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직렬6기통 엔진의 구조 상 3.5L~4L 이상으로 배기량을 늘리는 건 무리가 있었습니다. 직렬6기통 엔진에 터보차저를 얹은 745i가 있었만, 당시의 터보 기술력으로는 신뢰성이나 주행질감의 한계가 뚜렷했죠.


V형으로 실린더를 배치한 8기통 엔진을 만들면 되는 일이지만, BMW는 1950년대 이후로 V8 엔진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V형 엔진은 헤드가 두 개로 나뉘는 만큼 훨씬 복잡한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고, 강력한 성능 만큼이나 내구성과 신뢰성이 밑받침돼야만 만들 수 있는 엔진입니다. 현대적인 오버헤드캠 구조를 갖춘 대배기량 V형 엔진은 그 존재 자체로 브랜드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E23의 후속에는 더 크고 아름다운 V12 엔진을 얹기로 합니다.

BMW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E23의 후속에는 더 크고 강한 엔진을 얹기로 합니다. 하지만 V8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깜짝 놀래키고 신형 플래그십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크고 아름다운, V12 엔진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1910년대 처음 등장한 V12 엔진은 전간기 시대 럭셔리 카의 상징이었습니다. 마이바흐, 링컨 제퍼, 캐딜락 같은 당대 최고급 차들이 V12 엔진을 탑재하고 기술력과 성능을 과시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양산차에서 점차 그 자취를 감추고, 주로 포뮬러원(F1)과 같은 레이스에서나 사용됐습니다.


물론 이때라고 승용 V12 엔진을 만드는 회사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스포츠카 제조사들이 V12 스포츠카를 만들고 있었고, 영국의 재규어도 E-타입과 XJ의 최상급 모델에 탑재하기 위한 소위 '더블 식스' 엔진을 만들고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이 모터스포츠와의 연계를 위해 V12 엔진을 제작했을 뿐, 오롯이 승용차를 위해 V12 엔진을 만드는 회사는 없었습니다.

BMW의 첫 V12 엔진이자 전후 독일의 첫 V12 엔진, M70.

하지만 BMW의 입장에서는 백지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V8보다 V12를 만드는 편이 더 쉬웠습니다. 오랫동안 만들어 온 BMW의 장기, 직렬6기통 엔진을 좌우로 이어붙이면 됐으니까요. 이렇게 BMW의 첫 승용 V12 엔진인 M70이 개발됩니다.


M70 엔진은 헤드 설계를 앞서 출시된 신형 직렬6기통 엔진, M20과 공유했습니다. SOHC 구조를 채택하고, 보어 84mm×스트로크 75mm의 숏스트로크 구성도 그대로였죠. 압축비도 8.8:1로 M20과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헤드의 기본 설계를 공유할 뿐, 블록은 완전히 새롭게 설계됐습니다. 주철 블록을 사용하는 M20 엔진과 달리, M70은 거대한 V12 엔진의 경량화를 위해 알루미늄 합금 블록을 채택했고, 여기에 두 개의 헤드가 60도의 뱅크각으로 조립됐습니다. 또 유압식 밸브 리프터와 타이밍 체인을 적용해 정비 소요를 크게 낮췄습니다.

M70 엔진과 신형 7시리즈에는 당대 최고의 첨단 전자장치도 대거 탑재됩니다.

엔진 전자제어 시스템이 갓 도입되던 시기인 만큼, 당대의 첨단 전자장치도 대거 탑재됐는데요. 구식 AFM 방식 대신 최신 MAF 센서를 도입해 공연비를 정밀하게 제어했고, 이를 통해 뛰어난 연비를 실현했습니다. 또 시대를 앞선 전자식 스로틀 장치를 도입했으며, 최신 전자식 연료 분사 시스템인 보쉬 모트로닉 1.7 ECU를 각 뱅크에 하나씩 탑재해 성능과 연비를 끌어올렸습니다.

V12 엔진을 얹은 750i는 와이드 키드니 그릴이 적용됐습니다. 이는 훗날 BMW 키드니 그릴의 표준이 됩니다.

M70 엔진은 1986년 출시된 2세대 7시리즈, 코드명 E32 750i에 처음으로 탑재됩니다. 이로써 7시리즈는 2차 대전 전후 독일차로썬 최초로 V12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럭셔리 세단 시장을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현대적인 기술로 개발된, 승용차 전용의 V12 엔진은 차원이 다른 주행감각을 지녔습니다. 최고출력은 296마력으로 메르세데스-벤츠의 5.6L V8 엔진(300마력)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구조적으로 밸런스가 뛰어난 V12 쪽이 훨씬 부드러운 회전질감을 자랑했습니다.

BMW가 야심차게 준비한 V12 엔진은 자동차 업계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럼에도 첨단 전자제어 시스템을 도입한 덕에 750i의 연비는 경쟁 모델보다 더 뛰어났고, 배출가스 규제도 준수했습니다. 그렇게 메르세데스-벤츠의 공고한 독주 체제였던 프리미엄 플래그십 시장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플래그십 전쟁의 서막
E32 7시리즈의 혁신은 엔진 뿐이 아니었습니다.

V12 엔진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지만, E32 7시리즈의 혁신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선대 모델의 오너 드리븐 성향을 이어 받아 직접 운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면서, 동시에 기사가 운전하는 의전용 차량으로 쓰기에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클라우스 루테의 디자인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BMW 첫 'L'형 테일램프 또한 E32에 적용됩니다.

80~90년대 BMW의 스타일링을 정립한 클라우스 루테(Clasu Luthe)가 디자인 총괄을 맡았으며, 앞서 출시된 E30 3시리즈보다 더 현대적이고, 우아하면서도 BMW 고유의 스포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BMW 모델 중 최초로 'L'형 테일램프를 적용한 게 E32인데, 이는 다른 모델에 확대 적용되면서 지금까지도 BMW의 핵심 디자인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E32는 오너 드리븐과 쇼퍼 드리븐 모두 손색 없는 차였습니다.

E32는 BMW 플래그십 최초로 롱휠베이스(LWB) 버전이 추가된 모델입니다. LWB 버전은 모델명 뒤에 'L'이 붙고, 휠베이스가 114mm 늘어나 뒷좌석의 안락함을 누리기에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당시 최첨단 모바일 통신 기기였던 카폰과 차량용 팩시밀리 옵션도 제공됐습니다.

하이라인 패키지는 오늘날의 익스클루시브 시트와 같은 초호화 4인승 옵션이었습니다.

최상급 모델에서는 '하이라인(Highline)'이라는 옵션 패키지를 고를 수 있었는데, 하이라인 모델에는 차량용 냉장고와 크리스탈 글래스, 전동 리클라이닝 열선 시트와 레그레스트, 후열 선셰이드, 듀얼 라디오 및 독립 공조장치 등 VIP를 위한 첨단 편의사양이 대거 투입됐습니다. 다양한 편의사양을 작동시키기 위해 하이라인 옵션을 선택하면 추가 배터리와 보조 알터네이터가 탑재됐습니다.

E32는 안전성과 주행 성능 면에서도 크게 진일보했습니다.

안전성 측면에서도 크게 진일보했는데요. BMW 최초로 운전석 및 동승석 에어백이 탑재됐고, 전자제어식 액티브 서스펜션 기능이 주행 안정성을 높였으며, 메르세데스-벤츠에는 없었던 프로젝션 타입 헤드램프(1986년)와 세계 최초의 HID 헤드램프(1991년)를 탑재했습니다.


E32는 BMW 최초로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인 ASC(Automatic Stability Control)를 탑재한 차량이기도 합니다. 연료분사 제어로 슬립을 억제하는 ASC는 후기형에서 브레이크 제어에도 개입하는 ASC-T로 발전했고, 이는 오늘날 BMW 전 모델에 탑재되는 전자식 자세 제어 장치 DSC의 토대가 됩니다.

부분변경을 거치며 V8 엔진이 추가돼 E32는 6-8-12기통 풀 라인업을 갖추게 됩니다.

1991년에는 부분변경을 거치며 일반적인 직렬6기통 라인업과 최상급 V12 모델 사이에 V8 엔진을 탑재한 730i와 740i가 추가됩니다. 구식 OHV V8 엔진이 단종된 이후 약 25년 만에 부활한 M60 엔진은 DOHC 구조에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과 코일-온-플러그 설계, 전자식 노크 센서 등이 적용돼 강력한 성능을 발휘했습니다. 이로써 7시리즈는 플래그십 세단 최초로 6-8-12기통의 풀 라인업을 갖춘 모델이 됐습니다.

살짝 정신나간(?) V16 엔진의 골드피쉬 프로토타입. 양산은 되지 않았지만 BMW의 기술력을 널리 알렸습니다.

E32 7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흥미로운 프로토타입도 있었는데요. 바로 V16 엔진을 탑재한 일명 '골드피쉬(Goldfisch)'입니다. 스몰 실린더 엔진의 기술 실증용으로 개발된 이 차량은 M70 엔진을 바탕으로 한 6.7L V16 엔진을 탑재했는데, 엔진이 너무 커서 원래 엔진룸에 들어가야 할 냉각 계통이 트렁크에 실리는 등 기형적인 구조를 지녔습니다. 골드피쉬는 구조적 한계와 엔진 경쟁의 과열을 막기 위해 양산되지 않았지만, 408마력을 내는 V16 엔진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도 BMW의 엔진 기술력을 홍보하는 좋은 수단이 됐습니다.

E32는 '괴물', 'S-클래스의 왕'으로 불리는 메르세데스-벤츠 W140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31만 대 넘게 팔리며 크게 성공한 E32 7시리즈는, 그간 BMW를 의식하지 않았던 메르세데스-벤츠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도전자를 압도하기 위해 메르세데스는 압도적인 크기와 성능, 오버 엔지니어링으로 점철된 차기 플래그십 개발에 몰두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S-클래스의 왕'이라 불리는 W140 S-클래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전까지 최상급 모델에 V8 엔진을 탑재해 왔던 메르세데스-벤츠가 W140에는 M120 6.0L V12 엔진을 탑재한 것도 다분히 E32를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E32 7시리즈는 현대적인 BMW의 토대를 마련한 첨단 플래그십이었습니다.

E32는 1990년대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BMW 브랜드 이미지의 토대이자, 처음으로 메르세데스-벤츠를 '라이벌'로 지목할 수 있을 만한 완성도를 지닌 BMW 모델로 기억됩니다. 이후 출시된 모델들은 매번 메르세데스-벤츠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빼어난 완성도와 디자인을 앞세워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 메르세데스-벤츠를 턱 밑까지 추격합니다. 그 시작에는 E32 7시리즈가 있었습니다.


환경 규제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해 진 오늘날, BMW는 35년 만에 V12 엔진을 단종시키기로 결정했지만, 공교롭게도 메르세데스-벤츠는 완전 전동화 이전까지 V12 엔진의 생산을 속행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V12와 E32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7시리즈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메르세데스가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보이고, 또 어찌 보면 35년 전처럼 BMW가 먼저 새 시대를 위한 심장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음 세대의 플래그십들은 어떤 혁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까요? 내연기관의 황혼기를 맞아 떠나가는 V12 엔진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만, V12와 E32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7시리즈가 있을 수 있었음을 많은 이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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