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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Feb 09. 2022

메르세데스-벤츠 W124: 현대적 비즈니스 세단의 표상

수요 명차 극장

차급 불문 SUV가 세단의 시장을 집어삼키는 2021년이지만, 아직까지 세단의 입지가 공고한 차급도 있습니다. 이른바 '비즈니스 세단'이라 불리는 E-세그먼트 세단 이야기입니다. 4.8~5m 안팎의 길이에 탄탄한 주행 성능과 넉넉한 공간, 고급스러운 마감 품질을 고루 갖춘, 프리미엄 브랜드의 척추와도 같은 핵심 모델인데요.


이런 비즈니스 세단들은 오너 드리븐과 쇼퍼 드리븐, 데일리 카와 패밀리 카, 컴포트와 스포츠, 대중성과 럭셔리함의 절묘한 밸런스를 갖췄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그 만큼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가장 치열하게 맞붙기 때문에, BMW 5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 아우디 A6, 제네시스 G80 등 쟁쟁한 모델들이 이 시장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W124는 세단, 쿠페, 에스테이트 등 다양한 형태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현대적인 비즈니스 세단의 표준을 제시한 차는 꼽을 수 있습니다. 바로 메르세데스-벤츠 W124 시리즈입니다. 오늘날 E-클래스의 직계 조상이자, 80년대 수입차 개방이 이뤄지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1세대 수입차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각지고 보수적인 외모와 달리, W124는 첨단 기술을 대거 투입해 비즈니스 세단의 세대 교체를 이뤄낸 모델입니다. 또한 당대 메르세데스-벤츠의 오버 엔지니어링 설계에 힘입어 자동차 역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명차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세단
1977년, W123 시리즈 출시 1년 만에 후속 모델 개발이 시작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때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중형 세단, W123 시리즈가 나온지 갓 1년이 지난 시점. 아직 10년은 지나야 출시될 차세대 세단, W124의 개발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립니다.


요즘에야 4~5년마다 세대가 바뀌는 게 당연하지만, 70년대만 해도 모델 체인지 주기는 그리 빠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경쟁이 심하지도 않았고, 지금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이뤄지는 많은 계산과 작업이 일일히 수작업으로 이뤄졌으니까요. 반대로 그만큼 여유를 갖고 개발됐기 때문에 차 한 대에 들이는 정성과 노력은 지금보다 훨씬 컸습니다.

W124는 오버 엔지니어링의 수혜를 입은 모델 중 하나입니다.

더욱이 70년대 말은 자동차 개발 프로세스가 이러한 수작업이 조금씩 컴퓨터로 옮겨지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빨리 처리할 수 있게 됐음에도 여전히 오랜 시간에 걸쳐 개발이 이뤄졌으니, 자연스럽게 상당히 높은 완성도를 얻을 수밖에 없었죠. 덕분에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만들어진 메르세데스-벤츠 모델들은 필요 이상으로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지닌, 이른바 '오버 엔지니어링'의 수혜를 입었습니다.


W124 또한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베르너 브라이트슈베르트(Werner Breitschwerdt)가 이끄는 프로젝트 팀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오랜 승용차 개발 노하우와 발전된 설계 프로세스를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중형 세단을 기획합니다.

서스펜션 구조는 현대적인 전륜 맥퍼슨, 후륜 멀티 링크 방식을 채택합니다.

서스펜션 구조는 앞서 개발이 한창이었전 컴팩트 세단, W201 190 시리즈(오늘날 C-클래스의 시조)와 동일하게 리어 멀티 링크 방식을 채택합니다. 오랫동안 사용해 온 세미 트레일링 암 방식에 비해 구조는 복잡하지만, 훨씬 뛰어난 승차감과 주행 안정성을 지녔죠. 이 차급에서 멀티 링크 방식을 도입한 건 W124가 최초였습니다. BMW 5시리즈가 멀티 링크 서스펜션을 도입한 게 W124보다 11년이나 늦은 1995년의 일이니, 메르세데스-벤츠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건지 알 수 있습니다.

일견 각져보이는 외견이지만, 공기역학 성능은 탁월했습니다.

외관 디자인은 다임러 그룹의 디자인 총괄 브루노 사코(Bruno Sacco)가 맡았습니다. 디자이너이자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그는 간결한 선과 면의 조합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스타일을 빚어냈는데요. 특히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낮은 공기저항계수(Cd) 0.29를 달성해 공기역학적으로도 진일보했습니다.


그 밖에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여러 첨단 장비가 마련됐고, 5종의 엔진과 3종의 변속기가 투입됐습니다. 장장 7년에 걸쳐 준비된 메르세데스-벤츠의 차세대 비즈니스 세단은 1984년 11월 베일을 벗습니다.


W124가 개척한 자동차 산업의 표준들
W124는 첨단 기술의 경연장 같은 모델이었습니다.

마침내 공개된 W124는 첨단 기술의 경연장과도 같은 모델이었습니다. 아주 세세한 요소부터 서스펜션, 구동계에 이르기까지 신기술이 빠지지 않는 곳이 없었죠. 경쟁 모델이었던 BMW 5시리즈(E28), 아우디 100(C3)와 비교해도 족히 10년은 앞서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현대적인 서스펜션 설계, 세련된 디자인과 낮은 공기저항계수가 전부가 아니었죠. 기본형인 200을 제외한 모든 가솔린 엔진은 당대 최신 방식의 기계식 연료 분사 장치인 보쉬 KE-젯트로닉(KE-Jetronic) 시스템을 사용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정밀한 연료 제어를 통해 뛰어난 성능과 효율을 자랑했습니다.

W124에 처음 도입된 파노라믹 싱글암 와이퍼는 이후 20년 넘게 사용됩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신기술이 와이퍼에 적용됐습니다. 바로 파노라믹 싱글암 와이퍼인데요. 일반적으로 2개의 와이퍼가 윈드실드의 빗물을 제거하는 반면, W124에는 하나의 와이퍼만 장착됐습니다. 이 와이퍼는 길이가 늘어나는 편심 캠기구를 활용해 일반 와이퍼보다 훨씬 넓은 면적의 빗물을 닦아낼 수 있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W124 이후로 20년 가까이 이 싱글암 와이퍼를 사용합니다.

에스테이트 모델에는 셀프 레벨링 서스펜션과 소프트 클로징 테일게이트가 적용됐습니다.

또 2열 헤드레스트를 운전석에서 버튼 하나로 접어 후방 시야를 확보하는 기능, 왜건 버전의 테일게이트 개폐 안전성과 정숙성을 높인 전동식 소프트 클로징 기능, 트렁크에 짐을 실어도 차체 뒷쪽이 처지지 않는 유압식 셀프 레벨링 서스펜션, 차체 하부의 공기 흐름을 개선해 연비를 높이고 풍절음을 줄이는 언더커버 디자인 등 다양한 신기술이 적용됐습니다.

W124에는 메르세데스-벤츠 최초의 전자식 4륜구동 시스템이 탑재됐습니다.

1987년에는 메르세데스-벤츠 최초의 전자제어식 4륜구동 시스템, 4매틱(4Matic)이 W124에 탑재됩니다. 슈타이어(Steyr) 사에서 개발한 이 시스템은 아우디 콰트로의 등장 이후 주목받은 승용 4륜구동 시스템의 시험작이었는데요.

1세대 4매틱은 잦은 고장 탓에 금방 단종됐지만, 승용 전자식 AWD를 개척한 시스템으로 평가받습니다.

구동력을 일정하게 배분하는 기계식 4륜구동 시스템 '콰트로'와 달리, 4매틱은 트랙션 컨트롤 기능과 연동해 주행 상황에 따라 구동력을 유동적으로 배분했습니다. 평상시에는 후륜구동으로 운행하다가 슬립이 감지되면 유압 제어를 통해 앞바퀴에 최대 50%의 구동력을 배분하고 리어 디퍼렌셜 락까지 자동으로 체결하는, 당대로선 최첨단의 4륜구동 시스템이었죠. 다른 회사들이 전자식 AWD를 도입한 것이 빨라야 90년대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앞서 있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포르쉐와 협업을 통해 고성능 버전 500 E를 선보입니다.

또 BMW가 M5를 선보이며 고성능 비즈니스 세단 시장을 열자, 메르세데스-벤츠는 1991년 포르쉐와 협업을 통해 W124의 고성능 버전인 500 E를 선보여 맞섭니다. 500 E는 500 SL 로드스터에 사용된 5.0L M119 엔진을 탑재한 모델로, 메르세데스-벤츠 중형 세단 최초로 V8 엔진을 탑재한 모델입니다.


이 고성능 엔진의 출력을 받아내기 위해 차체와 조향 시스템, 구동계통의 설계 변경이 이뤄졌고, 스포츠카 개발 노하우가 풍부한 포르쉐가 이를 맡았습니다. 또 와이드 바디가 적용돼 기존의 W124 생산 라인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생산 역시 포르쉐가 담당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메르세데스 최초의 중형 세단은 AMG와의 협업이 시작된 후 탄생한 E-클래스 AMG의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0 E는 영화 '택시'에서도 악역으로 등장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500 E는 뤽 베송의 1998년작 영화 '택시(Taxi)'에서 악역 차량으로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비록 프랑스 영화인 만큼 주인공이 탄 푸조 406과의 배틀에서 패배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극중 추격전은 지금까지도 영화 속 최고의 카 체이스 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최초의 E-클래스, 한국에서 부활한 사연은?
W124는 페이스리프트와 동시에 가장 먼저 새 작명 체계를 적용받습니다.

사실 W124는 메르세데스-벤츠 내부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모델입니다. 바로 현재까지 사용 중인 '알파벳+숫자' 패턴의 알파뉴메릭(alphanumeric) 작명 체계를 가장 먼저 도입했기 때문인데요. 1993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W124에는 새로운 작명 체계에 따라 'E-클래스'라는 새 이름이 붙습니다.


이전까지 메르세데스-벤츠의 작명 체계는 제법 복잡했습니다. 세 자리 숫자는 배기량, 그 뒤의 알파벳은 차체 형태나 연료 분사 방식을 나타냈는데요. 가령 '300 D'는 3.0L 디젤(D) 엔진이 얹힌 차, '560 SEL'은 5.6L 인젝션 방식(E) 엔진의 대형(S) 롱휠베이스(L) 차량인 식이었습니다. 향후 라인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차급에 따른 '클래스' 구분을 시작했고, 그 첫 대상이 W124였던 것이죠.

새로운 작명 체계에 따라 W124에는 'E-클래스'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오늘날 메르세데스-벤츠는 이전의 중형 세단 라인업을 모두 E-클래스 역사의 일부로 보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E-클래스'라는 이름은 W124 후기형에 이르러서야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름이 바뀌어도 가장 인기있는 중형 세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후기형 모델에서는 많은 부분이 바뀝니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라이트 형상이 세련되게 바뀌었고, 인테리어도 현대화 됩니다. 특히 정비성이 나빴던 KE-젯트로닉 연료 분사 시스템이 완전 전자 제어식 모트로닉(Motronic) 시스템으로 대체됩니다. 또 기계식 4속 자동변속기 대신 5속 자동변속기가 탑재돼 주행 성능이 크게 향상됩니다.

마지막 연식인 '마스터피스' 모델에는 호화로운 편의사양이 적용됐습니다.

1995년에는 파이널 에디션인 '마스터피스(Masterpiece)' 모델이 출시됩니다. 마스터피스 모델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듀얼 에어백, 강화된 편의사양을 갖춰 상품성을 끌어올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IMF 직전 많은 마스터피스 차량이 수입돼 국내 개체수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995년 8월, W124 세단은 공식적으로 생산을 종료합니다. 왜건과 쿠페는 1996년, 카브리올레는 1997년 이어서 단종됩니다. 11년 간 전 세계에서 256만 대의 W124가 팔리며 큰 성공을 거뒀고, 두 개의 원형 헤드램프를 적용한 W210 E-클래스가 뒤를 잇습니다.

W124는 단종됐지만, 2년 뒤 지구 반대편에서 그 후계자(?)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W124는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질 줄로만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지구 반대편의 작은 자동차 회사에서 기술적 후계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쌍용자동차의 체어맨입니다.


SUV 전문 회사였던 쌍용차는 1993년 메르세데스-벤츠와 승용차 기술 제휴를 체결하고 승용차 개발에 몰두합니다. W124는 단종이 임박한 차였지만 당시 어떤 국산차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고, 이 플랫폼의 길이를 늘려 대형 플래그십 세단을 만든 뒤 중형차와 소형차까지도 라인업을 확장할 계획을 세웁니다.

체어맨은 개발 당시 신형 S-클래스로 오인받을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습니다.

4년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1997년 출시된 체어맨은, 그런 연유로 W124와 기술적 유사점이 많았습니다. 하체를 비롯한 많은 부품들이 호환됐고, 파노라믹 싱글암 와이퍼도 그대로 채용했죠. 심지어 엔진과 변속기 역시 W124에 탑재됐던 M111 직렬 4기통 엔진과 M104 직렬 6기통 엔진, 5G-트로닉 5속 자동변속기가 탑재됩니다.


체어맨은 앞선 설계와 메르세데스-벤츠를 빼닮은 디자인으로 한국 시장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았습니다. 심지어 메르세데스-벤츠 엔지니어들이 체어맨의 우수한 품질에 놀라 해외 수출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죠.

W124의 플랫폼은 출시 후 35년 만에 은퇴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체어맨의 하체 설계를 기반으로 한 미니밴 로디우스가 2004년에 출시되고, 로디우스를 바탕으로 만든 코란도 투리스모가 2013년 출시되며 W124는 강제로(?) 수명이 연장됩니다. 코란도 투리스모가 단종된 건 2019년, 처음 출시된 1984년으로부터 장장 35년이 지나서야 W124의 플랫폼은 은퇴를 맞이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개선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단종된 차의 플랫폼을 재활용한 설계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용될 수 있었던 건 그 만큼 오리지널인 W124가 시대를 앞섰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주행 성능과 안전성 양면에서 W124는 21세기 자동차와 견줘도 손색 없는 수준이었고, 후대의 많은 자동차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W124는 중산층이 꿈꾸는 차의 이상적인 형태를 제시한 차였습니다.

비즈니스 세단은 중산층의 드림카입니다.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안정을 상징하는 차가 바로 비즈니스 세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W124은 현대인의 꿈의 형태를 제시한 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W124의 설계 사상과 기술적 혁신은 그 자체로서 현대인들이 원하는 차의 표상이자, 후대 비즈니스 세단들의 벤치마크가 됐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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