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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Feb 09. 2022

재규어 E-타입 : 황금기 영국 스포츠카의 아이콘

수요 명차 극장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는 독일차지만, 사실 유럽 각국의 자동차 산업은 어디 한 군데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저마다 저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중성과 럭셔리의 절묘한 균형, 고속 안정성이 강점인 독일차, 작고 실용적인 대중차와 혁신적인 엔지니어링, 감각적인 디자인을 앞세운 프랑스차, 소형차부터 슈퍼카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순수한 운전 재미와 아름다운 디자인을 지닌 이탈리아차 등이 그렇습니다.


영국차 역시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브랜드가 해외 자본에 매각되긴 했지만, 한 때는 전 유럽의 자동차 중 절반이 영국차였을 정도로 널리 사랑받아 왔습니다. 특히 주요 자동차 생산국 중 유일하게 왕실과 귀족 문화가 아직까지 이어지는 만큼 세계 최고의 럭셔리 카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귀족 스포츠인 모터스포츠 헤리티지까지 풍성한 것이 바로 영국 자동차입니다.

하나만 잘 하기도 어려운 자동차 산업의 전장에서, E-타입은 여러 과제들을 완벽에 가깝게 이뤄냈습니다.

재규어 또한 그런 회사 중 하나입니다. 우아하고 화려한 럭셔리 세단을 만들면서, 동시에 꾸준히 모터스포츠에서도 활약해 온 역동적인 브랜드인데요. 영국차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 재규어의 역사는 물론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스포츠카를 빚어냅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로 꼽히는 재규어 E-타입입니다.


E-타입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만한 요소들을 빠짐없이 모두 갖춘 차라 할 수 있습니다. 족보 있는 집안에서 탄생해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고,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들과 겨루기에 손색 없는 성능을 갖추고도 그랜드 투어러의 역할까지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적인 요소들을 얹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덕에 대중적인 인기까지 놓치지 않은, 영국 스포츠카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잿더미에서 탄생한 백조
2차 대전 이후 재규어는 본격적으로 스포츠카 만들기와 모터스포츠에 도전합니다.

1922년 스왈로우 사이드카 컴퍼니(Swallow Sidecar Company)로 시작한 재규어는, 초창기에는 아름다운 디자인을 내세우며 성장한 회사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48년 스포츠카 XK120을 출시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모터스포츠에도 뛰어들어 기술력을 홍보하는 동시에 인지도를 끌어올리고자 했죠.

D-타입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를 3년 연속 제패하며 압도적인 성능을 뽐냈습니다.

1950년대 모터스포츠에서 재규어는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며 페라리, 알파로메오, 애스턴마틴 등 전통적인 강호들을 긴장시켰는데요. 특히 1954년 등장한 레이스카, D-타입은 1955~1957년까지 3년 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를 제패하며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이렇게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한 D-타입을 매일 타고 다니기 원하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규어는 D-타입의 여분 부품을 활용해 XKSS라는 고성능 스포츠카를 만들었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D-타입의 설계와 각종 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대량 생산 스포츠카 또한 기획합니다.

1957년, 재규어의 공장은 원인 미상의 화재로 잿더매가 됩니다.

하지만 1957년 2월, 재규어의 브라운 레인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 계획들이 모두 꼬여버립니다. 당초 16대의 주문을 받았던 XKSS 중 9대가 전소됐고, 생산 시설과 각종 서류, 설계도면은 물론 한창 생산 중이던 차들도 모두 잿더미가 돼 버린 것이죠.


당장 공장을 재건하고 생산을 재개하는 데에 엄청난 돈을 쓰면서 재규어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XK 시리즈의 명성을 이을 스포츠카 프로젝트도 일단 재개는 했지만, D-타입과 같은 알루미늄 모노코크 바디, 기계식 연료 분사 시스템, 5속 수동변속기를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였습니다.


회사의 경영난 속에서 신형 스포츠카 프로젝트를 맡은 건 기술 총괄 윌리엄 헤인스(William Heynes)와 엔지니어 말콤 세이어(Malcolm Sayer). 각각 재규어 모터스포츠 활약의 주인공이었던 XK 엔진의 설계자와 레이스카의 에어로다이내믹을 다듬은 스타일리스트였습니다.

새 스포츠카 프로젝트는 첨단 설계와 현실의 타협점을 찾아 나갔습니다.

이들은 D-타입의 유산을 계승하되, 필요에 따라 타협하며 현실적인 스포츠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차체 설계는 엔진룸 주변을 D-타입과 유사한 스페이스 프레임 구조로 짜되 캐빈룸은 스틸 모노코크 구조를 도입, 재규어 최초의 현대적인 모노코크 바디 양산차로 만들어집니다.


엔진은 당시 재규어의 상징과 같았던 직렬 6기통 XK 엔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당초에는 D-타입과 같은 기계식 연료분사 시스템이 탑재된 고회전형 엔진을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기존에 사용 중이던 3.8L 엔진에 카뷰레터 연료 시스템을 조합하기로 합니다. 변속기 역시 기존과 같은 4속 수동변속기를 장착합니다.

재규어의 새 스포츠카는 선대 레이스카들의 이름을 계승하며 등장했습니다.

이렇게 공장의 잿더미 속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차에 붙은 이름은 E-타입. 르망을 휩쓸었던 선대 레이스카, C-타입과 D-타입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961년 3월 재규어의 주요 시장이었던 미국 수출 사양이 먼저 공개됐고, 같은 해 7월부터 본토인 영국에서도 E-타입의 판매가 시작됩니다.


미모 뒤에 감춰진 혁신
E-타입이 호평받은 첫 번째 이유는 디자인이었습니다.

E-타입은 출시와 동시에 큰 호평을 받습니다. 첫째 이유는 디자인이었죠. 매끈하게 뻗은 긴 후드와 짧은 캐빈룸의 비례는 이상적인 프론트 엔진 스포츠카의 것이었습니다. 곡면 디자인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우아했고, D-타입의 스타일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세련됐죠. 그 때나 지금이나, E-타입을 보고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E-타입의 진가는 아름다운 외모 안에 감춰진 엔지니어링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외모 조차도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죠. 외관 디자인을 맡은 말콤 세이어는 항공기 회사 브리스톨(Bristol) 출신으로, 공기역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스스로를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공기역학자(aerodynamicist)라고 소개할 정도였는데요.

E-타입의 아름다운 유선형 디자인은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습니다.

실제로 E-타입의 디자인은 그저 보기 좋은 유선형이 아닌, 철저한 계산의 산물이었습니다. 세이어는 후일 인터뷰를 통해 E-타입의 모든 디자인이 수학적 계산을 거쳐 완성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풍동 실험, 컴퓨터 설계(CAD)조차 도입되기 전엔 1950년대에 0.4의 공기저항계수(Cd)를 기록한 건 우연이 아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설계 사상의 결과물이었죠.

이미 검증된 직렬 6기통 엔진의 성능은 탁월했습니다.

이미 검증된 3.8L 직렬 6기통 엔진의 성능은 탁월했습니다. 엔진의 최고 출력은 265마력, 최대토크는 33.1kg.m에 달했는데, 저회전 영역 토크가 강해 일반인도 운전하기 편했죠. 게다가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해 1.2톤 정도로 억제된 중량에 뛰어난 공기역학 성능까지 더해져 0-97km/h 가속은 6.4초 만에 마무리됐고, 최고 속도는 당대 스포츠카 중 최고 수준이었던 241km/h를 기록했습니다.


그 밖에도 4륜 디스크 브레이크를 채택하고 후륜 독립 서스펜션을 적용하는 등, 파워트레인 성능은 선대 모델인 XK150과 대동소이했지만 전반적인 주행 퍼포먼스는 크게 향상됐습니다. 또 XK150 대비 더 가볍고 뛰어난 코너링을 발휘하는 동시에, 길어진 휠베이스는 주행 안정성을 향상시켜 레이서가 아닌 일반인이 운전하기도 부담이 없었죠.

무엇보다 E-타입의 가장 큰 매력은 합리적인 가격이었습니다.

물론 E-타입이 애스턴마틴이나 페라리, 마세라티 등 라이벌들의 스포츠카 대비 월등한 퍼포먼스를 낸 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무기는 저렴한 가격이었습니다. E-타입의 가격은 경쟁 모델들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대부분 장인의 손으로 수제작되는 라이벌들과 달리, E-타입은 대량생산되는 모델이었으니까요. 대부호나 귀족이 아니더라도 누릴 수 있는 정상급 성능의 스포츠카는 E-타입 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카"
1966년 출시된 2+2 쿠페. 2시터보다 긴 휠베이스와 높은 루프라인으로 구분됩니다.

E-타입은 2인승 쿠페와 2인승 로드스터 두 종류로 출시됐고, 두 바디 타입 모두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퓨어 스포츠카 외에도 보다 편리한 그랜드투어러를 요구하는 고객들을 위해 1966년에는 2+2 패스트백 쿠페가 추가됐고, 여기에는 3속 자동변속기 옵션도 제공됐죠.


E-타입을 유명하게 만든 일화가 있는데, 바로 페라리의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E-타입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카"라고 발언한 일입니다.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천하의 엔초 페라리가 인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니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인데요.

엔초 페라리는 고도의 돌려까기(?)로 E-타입을 깎아내렸지만, 결과적으로는 띄워 준 셈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발언에는 뒷부분이 더 있었습니다. "재규어와 달리 나는 엔진을 먼저 만들고, 거기다 바퀴를 단다"는 것이었습니다. E-타입은 예쁘기만 할 뿐, 구식 엔진을 쓰는 별 볼 일 없는 차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세간에는 디자인에 대한 칭찬만 알려졌고, 엔초 페라리 본인의 의도와 달리 E-타입의 명성만 높여 줬습니다. 어쨌든 예쁘다고 한 건 맞으니까요.


1964년에는 엔진 배기량을 4.2L로 늘리는 업데이트가 이뤄졌습니다. 새 엔진은 기존 대비 20% 가량 향상된 39.2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는데요. E-타입에 탑재된 세 종류의 엔진 중에서도 성능와 신뢰성 양면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이 엔진입니다.

E-타입 시리즈 2는 미국 안전 규제에 맞춰 외관이 바뀌고, 옵션이 강화됐습니다.

E-타입이 꾸준히 큰 인기를 끌면서 재규어는 E-타입의 업데이트도 계속했습니다. 1968년에는 페이스리프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시리즈 2' 모델이 시판됩니다. 엔진은 그대로였지만, 주요 시장인 미국의 인증 기준과 안전 규제에 맞춰 헤드라이트의 유리 커버가 삭제되고 앞뒤 범퍼의 형상이 바뀌었습니다. 또 실내 편의사양이 대폭 향상되고 파워 스티어링과 에어컨 옵션이 제공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즈 1(왼쪽)과 시리즈 3의 모습. 콜렉터들은 시리즈 1의 디자인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1971년에는 최종형인 '시리즈 3'가 출시됩니다. 외관 상으로는 시리즈 2와 대동소이했지만, 2인승 쿠페가 단종되고 2+2 쿠페와 로드스터 등 두 종류만 시판됐는데요. 가장 큰 변화는 직렬 6기통 XK 엔진 대신 '더블 식스(Double Six)'라고도 불리는 V12 엔진을 탑재한 것입니다. 레이스용 엔진에서 유래한 V12 엔진은 272마력의 최고출력을 냈고,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회전질감을 자랑했습니다.


이렇게 E-타입은 1961년부터 1975년까지 14년 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판매됐고, 최종 생산 대수는 7만 2,515대에 달합니다. 스포츠카가 극소수 마니아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E-타입은 그야말로 대 히트작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포르쉐 911처럼, 대중성과 럭셔리함, 뛰어난 성능과 유려한 디자인 등 모든 걸 갖춘 팔방미인 스포츠카의 위상이었다 할 수 있었죠.

극소량만 제작된 E-타입 라이트웨이트는 오늘날 수십 억 원대에 거래됩니다.

개중에는 재규어가 당초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제작한 한정판 모델, '라이트웨이트(Lightweight)'도 있었습니다. E-타입의 초기 구상처럼 알루미늄 바디 패널을 사용하고, 300마력을 내는 레이스용 엔진과 5속 수동변속기(초기형은 4속)를 조합한, E-타입의 최종진화형이라 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이 차는 오직 12대만 생산됐고, 일부는 레이스에 출전해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E-타입은 재규어 역사 상 가장 아름답고 성공적이었던 스포츠 쿠페입니다.

E-타입은 지금까지도 재규어 역사 상 가장 아름답고 성공적이었던 스포츠 쿠페로 기억됩니다. 특히 생산대수가 많은 만큼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수가 현역으로 거리를 누비고, 유럽과 북미에서는 동호인들의 활동도 왕성합니다. 수천만 원 정도면 접근할 수 있는 대중적인 클래식 카지만, 동시에 소장가치가 높은 희소 모델이나 민트급 소장용 차량은 수억 원대를 호가해 자동차 콜렉터들에게는 '필수 소장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타입은 재규어 스포츠카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모델인 만큼, 재규어 스스로도 헤리티지 복원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1964년 목표 생산대수를 못 채우고 단종된 E-타입 라이트웨이트의 잔여 수량을 생산, 판매하기도 했죠.

E-타입의 전기차 컨버전 모델은 해리 왕자의 결혼식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는 E-타입 로드스터를 전기차로 개조한 '콘셉트 제로'를 선보였는데요. 차대를 개조하지 않고 기존 엔진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배터리 팩을 탑재한 레스토모드(restomod)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1회 충전으로 270km를 달릴 수 있는 이 전기차는 영국 해리 왕자의 결혼식 때 사용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E-타입은 스포츠카이면서도 상업적 성공까지 거둔 보기 드문 모델입니다.

자동차의 역사를 돌아보면, 완생(完生)을 이룬 차는 많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기술적 진보, 뛰어난 성능과 시장성 등 여러 요소들은 서로 상충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스포츠카는 많은 경우 수익성보다 헤일로 카(halo car) 역할을 강요받기 때문에, 이런 미덕을 고루 갖춘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올해로 탄생 60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백조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E-타입은, 역사 상 처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뤄낸 명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를 이뤄낸 배경에는 세계 시장을 선도했던 60년대 영국 자동차 산업의 저력과 재규어의 열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회사의 위기 속에서 탄생해 영국차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아름다운 백조, 그것이 바로 E-타입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www.pcar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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