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얼마 전부터 언론을 통해 심심찮게 들리는 용어가 바로 '수소경제'입니다.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주요 에너지원을 화석연료에서 수소로 바꿔 수소 중심의 친환경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것을 일컫는데요. 이미 오래 전부터 구상은 있었지만, 친환경과 탄소 중립이 중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수소경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이자, 연료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화석연료의 이상적인 대안으로 여겨집니다. 또 기체 형태로 유통 및 보관이 용이하고 빠르게 충전할 수 있어 배터리 전기차(BEV)의 충전 속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수소 연료전지차(FCEV)의 연구 개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인데요.
수소 연료전지차는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전력을 공급하고 물을 배출하는 친환경 차량입니다. 그런데 수소로 달리는 자동차는 수소 연료전지차가 처음이 아닌데요. 그 이전, 자동차가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고민돼 온 것이 바로 수소 내연기관 자동차(Hydrogen Internal Combustion Engine Vehicle, HICEV)입니다.
현재 운행 중인 수소차는 거의 대부분이 수소 연료전지차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배터리 전기차의 가장 큰 단점인 충전 속도를 만회할 수 있는 데다, 항속거리도 길고 에너지 효율도 좋아 현재로선 가장 이상적인 수소차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소 연료전지차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요. 바로 가격입니다. 연료전지에는 백금, 금과 같은 고가의 원자재가 투입돼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현재 시판 중인 수소 연료전지 승용차의 경우, 차 1대를 팔 때마다 자동차 회사가 3,000만 원 이상의 손해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렇게 손해 보며 파는 가격에 수소차 보조금까지 더해야 겨우 내연기관차와 겨뤄볼 만한 가격이 되는 셈입니다.
신소재의 개발과 기술 발전을 통해 연료전지 가격을 낮추는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그럼에도 수익성이 낮은 소형차나 신흥시장용 차량에 연료전지를 탑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최근 다시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바로 수소 내연기관입니다.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수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료용으로 연구돼 왔습니다. 스위스 발명가 프랑수아 이삭 드 리바즈(Francois Isaac de Rivaz)는 1806년 산소와 수소 혼합기를 연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발명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수소는 너무 가볍고 보관이 까다로운 데다, 가솔린보다 훨씬 격렬하게 반응해 연소 특성 따위를 제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수소 자체의 생산성 문제 등이 겹치면서 수소 내연기관 연구는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러던 1990년대 초, 캘리포니아 대기환경청(CARB)이 친환경차 의무 판매 규제를 예고하면서, 자동차 회사들이 잊혀졌던 수소차를 다시 꺼내듭니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수소연료전지는 커녕 배터리 전기차도 상용화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미 사용 중인 내연기관을 수소 연료에 적합하게 개조해 친환경차로 만드는 방법을 택한 것이죠.
특히 BMW는 1970년대부터 수소차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온 경험을 살려 수소 내연기관 분야를 선도했는데요. 2004년 등장한 H2R 콘셉트카는 액화 수소 연료탱크를 채택하고 6.0L V12 수소 엔진을 탑재해 301.95km/h의 최고속도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바탕으로 2005년 세계 최초의 양산 수소 내연기관차인 하이드로젠 7(Hydrogen 7)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드로젠 7은 편의성을 고려해 수소와 가솔린을 병용할 수 있는 바이퓨얼 V12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BMW는 기술 실증용으로 100대의 하이드로젠 7을 생산했지만, 수소 충전소의 부재와 낮은 효율, 액화수소 탱크의 상용화 문제 등 여러한계로 인해 상용화는 좌절됐습니다.
이후 전자·전기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배터리 전기차가 친환경차 시장의 주도권을 쥐었고, 수소차 조차도 내연기관이 아닌 수소 연료전지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수소 내연기관은 사실 상 도태된 기술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수소 내연기관이 주목 받기 시작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소 연료전지의 경제성 문제입니다. 1990년대만 해도 1대 당 10억 원에 달했던 수소 연료전지는 기술 발전에 힘입어 효율이 크게 오르는 동시에 가격도 수천만 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석연료를 쓰는 전통적인 내연기관차나 배터리 전기차보다 훨씬 비쌉니다.
반면 수소 내연기관은 기존의 엔진 설계를 바탕으로 연료 공급 시스템을 수정하고, 수소의 강력한 폭발력을 견뎌낼 수 있도록 엔진의 내구성을 강화하는 정도의 변경만 가하면 제작이 가능합니다. 오랫동안 내연기관을 만들어 온 기성 자동차 회사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화석연료 엔진과 달리 유해 배기 가스를 배출하지 않으니 복잡한 후처리 장치도 필요 없습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훨씬 자유도 높은 설계가 가능합니다.
두 번째로, 그간 엔진 제어 기술 또한 고도로 발전했습니다. 수소는 가솔린보다 연소 속도가 8배나 빠르기 때문에, 가솔린 엔진보다 점화 타이밍 등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첨단 전자 제어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과거보다 정밀한 연료 분사 및 점화 타이밍 제어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수소 엔진을 만들기도 수월해졌습니다.
엔진의 정밀 제어가 가능해졌다는 건 당연히 성능과 효율도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BMW 하이드로젠 7의 경우 6.0L V12 엔진을 얹고도 최고출력은 고작 232마력에 불과했고, 수소 모드 연비는 무려 2km/L을 기록해 가솔린 모드의 1/3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최신 제어 시스템을 적용한다면 수소 엔진의 성능과 효율은 LPi 엔진 수준까지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소 보관 및 유통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수소는 가연성이 크고 분자가 작아 용기의 틈새로 잘 새는 데다, 끓는점이 -253℃로 액체 상태로 운반하거나 저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매우 관리하기 까다롭고, 보관 및 운송에 많은 비용이 듭니다. 특히 수소 내연기관의 경우 수소 연료전지보다 효율이 나쁘기 때문에 차량에 장착되는 수소 탱크도 더 크고 안전해야 하는데요.
하이드로젠 7의 경우 초저온을 유지해 액체 상태로 보관하는 방식을 채택했지만, 신뢰성과 비용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최신 수소차의 연료 탱크는 기체 상태의 수소를 초고압으로 충전하는 방식으로, 구조가 훨씬 간단하고 과거보다 안전합니다. 물론 액화수소에 비해 충전량은 적지만, 수소 충전 인프라가 200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을 합치면, 수소 내연기관차는 수소 연료전지차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상용화가 가능해 집니다. 배터리 전기차 충전소에 비하면 수소 충전 인프라가 아직 부족하지만, 장기적으로 수소 충전소가 지금의 주유소만큼 늘어난다면 수소 내연기관차의 대량 보급도 상상 속의 일은 아닌 것이죠.
특히 사회적 인프라가 부족한 신흥 시장에서는 수소 내연기관이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수소 충전소에도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긴 하지만 국가 전역에 걸쳐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차량 가격이 배터리 전기차나 수소 연료전지차보다 훨씬 저렴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선진 시장에서도 경제성이 중시되는 소형 승용차에는 수소 내연기관을 장착하고, 고가의 대형차에는 수소 연료전지를 장착하는 이원화를 통해 다양한 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소 내연기관의 잠재력이 재발견되면서 이미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토요타는 공개적으로 수소 내연기관차를 시연했고, 토요타 외에도 BMW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이 내부적으로 수소 내연기관 연구를 비공개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해결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우선 수소 내연기관에서는 소량의 오염물질이 배출됩니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폭발하면 물이 발생하기 때문에 무공해 차량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기 중의 질소와 산소가 고온·고압의 연소 과정에서 함께 반응하기 때문에 극미량의 질소산화물(NOx)이 생성됩니다. 또 내연기관의 엔진오일이 운행 중 조금씩 연소되면서 소량의 오염물질이 함께 배출됩니다.
물론 수소 내연기관의 오염물질 배출량은 화석연료 내연기관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고, 공연비 제어와 윤활유 개선을 통해 거의 배출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한 무공해 자동차가 되기 위해서는 수소 엔진에 적합한 후처리장치 등의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큰 장벽은 수소의 생산 및 공급입니다. 이는 수소 내연기관 뿐 아니라, 수소 연료전지 보급을 비롯해 수소경제가 실현되기 위해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한데요.
현재 세계 수소 공급의 95% 이상은 석탄이나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개질을 통한 생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연료를 만들기 위해 탄소를 배출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죠.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소위 '그린 수소'라 하는, 탄소 배출 없는 친환경 수소를 저렴하게 대량 공급하는 방안이 연구돼야 합니다.
또한 생산 뿐 아니라 이 수소를 현재의 석유만큼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며 안전한 방식으로 세계 각지로 운송하는 인프라가 완성돼야만 수소 내연기관, 나아가 수소경제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막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차나 자율주행차가 먼 미래의 일처럼 여겨졌다는 걸 생각해 보면 수소 시대도 어느 날 갑자기 성큼 다가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수소 연료전지가 엄청나게 보급되면서 굳이 수소 내연기관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연기관 특유의 감성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미래에도 내연기관과 함께 할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일 것입니다. 다가오는 수소 시대, 우리의 미래 자동차는 어떤 모습일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