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중고차를 사는 일은 언제나 설레면서 동시에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새 차를 들인다는 기쁨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불투명하고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중고차 시장에서 사기를 당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차를 비싸게 사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 마련입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봐도 싸게 잘 사서 큰 지장 없이 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싼 돈 주고 사서 고생했다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언론에서도 중고차 업계에서 발생한 사기나 허위 매물, 심지어 강력 범죄에 관한 소식까지 심심찮게 전해지면서 일반인들의 중고차 업계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고차 업계 특유의 복잡한 구조와 이해관계 등이 맞물려 제대로 된 범죄 근절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중고차 진출에 관한 논의는 몇 년째 진척이 없습니다. 완성차 회사를 위시한 대기업들은 계속해서 진출을 예고하고, 기존 중고차 업계는 강력히 반발하는 식의 평행선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대기업의 중고차 진출은 왜 계속 미뤄지는 걸까요?
사실 대기업과 영세 중고차 업자 간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첫 시작은 2000년, SK그룹이 'SK엔카'를 통해 중고차 사업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SK엔카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온라인 중고차 플랫폼과 동시에 오프라인 직영 판매를 실시하며 대기업 중고차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SK엔카의 공격적인 확장에 기존 영세 중고차 매매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2013년 중고차 판매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되며 제동이 걸렸습니다. 당연히 대기업의 신규 참여가 불가능해졌고, SK 역시 직영 판매 사업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게 되자 2018년 온라인 플랫폼(現엔카닷컴)과 오프라인 직영 판매업(現케이카)을 분할 매각하고 손을 뗍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된 뒤 문제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중고차 업계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고차는 전통적으로 레몬 마켓(lemon market)으로 분류되는데요. 레몬 마켓이란 겉보기에 맛있어 보이지만 너무 셔서 날로 먹기 어려운 레몬처럼(레몬은 영어권에서 '불량품'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구매자가 제품에 관한 정보를 구하기 어려워 불량품이 많은 시장을 말합니다.
판매자는 차량의 이력이나 사고 여부, 고장 부위 등을 잘 알고 있는 반면 구매자는 판매자가 제시하는 정보에 의존해 구입할 수밖에 없죠. 더구나 우리나라 중고차 업계는 6,000여 개에 달하는 소규모 영세 사업자로 이뤄져 이들을 일일이 통제하거나 단속하는 데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습니다.
업계의 자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 간 중고차 시장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납치, 감금, 폭행, 협박 등 여러 사건·사고가 터져 나왔고, 기존 중고차 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는 거의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기업이 시장에 참여해야 질서가 확립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019년 2월, 중고차 판매업의 중소기업 적합업종(현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이 만료됩니다. 업계는 생계형 적합업종 재지정을 신청했지만, 같은 해 11월 동반성장위원회가 중고차 판매업에 대해 생계형 적합업종 부적합 의견을 내면서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대기업의 중고차 시장 진출을 막던 규제가 사라지고, 이를 재지정할 필요도 없다는 동반성장위의 의견이 나온 것이죠.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동반성장위 의견을 받고 6개월 이내로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여부를 결정해야 하지만, 기한이 끝난 지 2년이 다 돼가는 현재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고차 업계의 여러 병폐에 대기업 진출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도, 말 그대로 생계 보장을 요구하는 기존 업계의 목소리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그 사이 대기업과 중고차 업계는 상생을 위해 여러 차례 자발적 합의를 시도해 왔지만,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커 대화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중기부는 대기업에 중고차 사업 개시 일시 정지 권고를 내려둔 채, 대선이 끝난 뒤인 오는 3월로 최종 결정을 미뤄둔 상태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우선 대기업 진출에 찬성하는 입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대기업 중고차를 찬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업계의 병폐 타파입니다. 대기업의 자금력과 품질 관리 역량을 바탕으로 한, "믿고 살 수 있는 중고차"가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기존 중고차 업계는 영세 매매상사가 대부분으로, 매물의 품질 표준화나 정보의 투명한 공개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국에 수천 개 매매상사와 수만 명의 종사원이 흩어져 있어 관계 당국이 이를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이른바 '메가딜러'가 등장한다면 차량의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하는 건 물론, 고객에게도 더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큽니다.
대기업들 입장에서도 중고차는 '짭짤한' 수입원입니다. 중고차 시장 규모는 연간 260만 대 수준으로 신차 시장 대비 1.4배에 달합니다. 중고차 판매업의 영업이익률은 1~2%대로 유통업 치고는 낮은 편이지만, 대기업이 뛰어든다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비용을 줄이고, 브랜드 신뢰도를 바탕으로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 실제로는 더 높은 이익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완성차 회사의 경우, 중고차 매입 후 자사의 서비스망과 부품 공급망을 활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상품화를 마칠 수 있습니다. 또 제조사가 품질을 보증하는 '인증 중고차' 형태로 판매하면서 금융 상품이나 보증연장(EW) 상품을 팔아 추가적인 이익 창출도 가능합니다. 앞서 인증 중고차 사업을 시작한 수입차 회사들이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만큼, 신차의 2배가 넘는 규모의 중고차 시장에 참여할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죠.
기존의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이 독과점 체제를 형성할 것이고, 이로 인해 기존 업계의 붕괴는 물론 생태계가 무너져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자금력을 바탕으로 품질이 좋은 중고차를 독점해 영세 업체들에게는 오래되거나 사고·고장이 많은 저품질 중고차만 남게 되고, 수익성 악화로 기존 업체들이 고사한 뒤에는 중고차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고차 업계의 고질적인 악습과 병폐, 사기와 허위매물 따위의 문제가 대기업 진출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제도적 허점이 있다면 대기업이 참여하더라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중고차 시장의 불투명성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오랫동안 시달려 온 소비자들은 이런 기존 업계의 주장에 냉소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기를 당하느니 웃돈 주고 믿을 수 있는 차를 사는 게 낫다"는 것이죠. 하지만 5만 5,000여 명에 달하는 중고차 판매업 종사원의 생계 문제나 대기업 진출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한 뒤 돌변하는 사례도 적지 않으니까요.
가장 이상적인 건 중고차 진출을 원하는 대기업과 기존 업계가 상생안을 도출하고, 중고차 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대기업과 기존 업계가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 분담을 통해 기존 시장의 문제를 해소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안인 게 사실입니다.
중고차 시장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이미 대기업의 진출 의지는 확고하고, 여론이나 전문가들의 견해도 이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불안한 중고차 시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합의를 통해 빠른 시일 내로 보다 투명하고 믿을 수 있는 중고차 시장이 만들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