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요즘 신차를 계약한 분들이 오랜 대기 기간에 지쳤다는 이야기를 종종 전해 듣습니다. 이미 여러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듯, 신차 시장에서는 역사 상 최악의 반도체 대란으로 지독한 출고 적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기 차종의 경우 최장 13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겨우 차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고, 비인기 차종도 짧으면 4개월에서 길면 6개월 가까이 대기하는 형국인데요. 비교적 '반도체 쇼크'의 영향이 적었던 수입차조차도 최근에는 출고 적체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심지어 신차 출고가 1년 이상 밀리면서 중고차 가격이 반등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데요.
자동차 업계를 휩쓸고 있는 반도체 대란은 어쩌다 일어난 걸까요? 그리고 언제쯤 해소될까요? 애끓는 마음으로 내 차를 기다리는 계약자 분들이 가장 궁금해 할 이야기, 반도체 대란의 원인과 경과, 향후 전망을 정리해 봤습니다.
반도체 대란이 가시화된 건 2021년 초의 일입니다. 업계에서 반도체 대란으로 인한 생산 및 출고 지연 소식이 돌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인데요. 이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범세계적인 규모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길어야 1년 이내로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현재는 빨라도 내년(2023년)에나 공급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및 자연재해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 미국 정부의 대중(對中) 제재로 인한 공급망 혼란, 그리고 반도체 수요의 구조적 증가입니다.
우선 코로나19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세계 각지의 반도체 공장들이 팬데믹으로 조업을 중단하거나 생산량을 줄였고, 이로 인해 반도체 생산량이 줄어들었죠. 또 2021년 하반기 들어서는 글로벌 물류 대란으로 반도체의 유통에도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가장 1차원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지난 2020년 코로나19가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향후 신차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주요 선진국이 이동 금지와 같은 강력한 거리두기 규제를 펼쳤고,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자동차를 사는 이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이었죠. 때문에 반도체 재고를 공격적으로 줄였고, 반도체 제조사들도 이에 맞춰 수익성이 낮은 차량용 반도체 감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신차 수요 감소는 일시적이었고, 당장 20년 말부터 예년 수준의 수요를 회복합니다. 오히려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자가용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신차 판매가 늘었고, 특히 반도체가 많이 들어가는 전기차가 역대 최대 성장세를 기록하는 등, 오히려 차량용 반도체 수요도 폭증한 것이죠.
이처럼 수요 예측이 실패한 상황 만으로도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데, 여기에 미국 정부의 강력한 대중 제재가 겹치며 파장이 커 졌습니다. 당시 트럼프 정부는 중국의 이른바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제재 조치를 실시했는데요.
주요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 비해 기술 수준이 낮은 중국 회사들(SMIC 등)은 상대적으로 기술집약도가 낮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제재를 당하면서 자동차 회사들은 다른 공급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가 또 다른 중국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는 우려가 겹쳐지면서 몇몇 자동차 회사들은 '반도체 사재기'에 나섰습니다. 또 일본 르네사스 공장 화재, 대만의 가뭄·미국의 한파 등 기상이변으로 인해 반도체 생산량이 줄면서 악재가 겹쳤고, 결과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초유의 반도체 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가중시키는 것이 '반도체 수요의 구조적 증가'입니다. 팬데믹과 가상화폐 채굴 열풍 탓에 IT 산업용 반도체 수요는 역대 최대 수준입니다. IT용 반도체는 차량용 반도체 대비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차량용 반도체의 생산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입니다. 때문에 총 반도체 수요는 늘었는데, 설비 규모가 크고 비용이 높은 반도체 특성 상 생산량의 증가는 더딘 편입니다.
게다가 전장화와 전동화로 차량 한 대에 사용되는 반도체도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최신 차량에는 각종 안전장치, 편의사양, 첨단 주행 보조 기능(ADAS) 등 일일히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다양한 전자 장비가 탑재됩니다. 전기 구동계를 탑재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이나 전기차에 더 많은 반도체가 요구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전기차의 경우 내연기관차보다 평균 2배 정도 많은 반도체가 사용된다고 합니다.
결국 주요 선진 시장의 신차가 빠르게 고급화 되고, 전기차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신차 판매량이 늘지 않더라도 반도체의 수요는 구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변수들이 얽히고설켜 발생한 반도체 대란의 영향은 막대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차의 출고 적체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과거에는 '주문제작' 차량 정도 돼야 1년 이상을 대기했지만, 이제는 웬만한 인기 차종의 대기가 1년을 넘깁니다. 신차를 출시해도 정상적으로 출고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에 제조사들은 아예 출시 일정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차 출고가 끊임없이 미뤄지자, 제조사들은 아예 일부 편의사양을 삭제한 '마이너스 옵션' 차량을 출고하고 있습니다. 열선 시트, 오토 에어컨 등 중요도가 낮은 옵션을 삭제하는 것이죠. 현대차의 경우 반도체가 탑재되지 않은 부품으로 우선 조립해 출고한 뒤, A/S 서비스를 통해 추후에 부품을 교체해 주는 방식의 생산을 추진 중입니다.
신차 출고가 밀리면서 중고차 시세도 요동치고 있습니다. 중고차 시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미국, 유럽, 우리나라를 비롯해 주요 국가의 중고차 시장에서는 오히려 시세가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출고된 지 얼마 안 된 신차급 중고차의 경우 신차보다 비싼 프리미엄이 붙기도 합니다. 렌트나 리스 만기 등으로 당장 새 차가 필요한 경우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웃돈을 주고 중고차를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업계에서는 2022년 연내에도 반도체 대란이 잦아들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반도체 회사들 입장에서는 코로나19의 여파가 잦아들면서 일시적으로 폭등한 반도체 수요에 맞춰 무작정 설비를 증설했다간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만큼, 설비 증설에 비교적 보수적입니다.
일부 회사들이 증산 계획을 발표하긴 했지만, 이 또한 빨라도 1~2년이 지나야 이뤄질 수 있는 이야기죠. 결국 작년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아질 지언정, 완전 정상화는 내년 이후에나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이번 대란으로 몇몇 제조사는 반도체 내재화를 구상하고 있기도 합니다. 토요타, 포드, GM 등이 이미 내재화 계획을 밝혔고,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모비스를 통해 반도체를 직접 공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자체의 진입장벽이 높아 이 또한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작업은 아닙니다.
신차를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애가 타고 답답한 일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공급망이 재편된다면 향후에는 더욱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모쪼록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지리한 반도체 대란이 끝나길 바라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