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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Mar 16. 2022

포르쉐 카이엔 : 포르쉐를 구원한 변절자

수요 명차 극장

포르쉐는 아주 독특한 브랜드입니다. 퓨어 스포츠카와 럭셔리 그랜드 투어러 양면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거뒀고, 탁월한 기술력과 독보적인 감성을 고루 갖춰 대중적이면서도 유니크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스포츠카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세단, SUV, 전기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춰 다른 스포츠카 제조사들에게는 라인업 확장의 롤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포르쉐를 상징하는 모델이 리어 엔진 스포츠카, 911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911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장르가 된 신화적 모델이자, 포르쉐 그 자체나 다름없습니다. 자동차를 잘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레이서든 사업가든 누구나 차고에 세워두고 싶은 차가 바로 911이죠. 오늘날 포르쉐 브랜드의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에도 911의 역할이 적지 않았습니다.

포르쉐의 상징은 911이지만, 포르쉐를 살려낸 게 카이엔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징적인 911과는 별개로, 포르쉐가 니치 마켓인 스포츠카 시장을 벗어나 수익성을 확보하고 지금과 같은 종합 제조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포르쉐의 첫 SUV이자 첫 비(非)스포츠카였던 카이엔의 공이 지대했습니다. 출시 당시에는 포르쉐의 순수성을 해치는 변절자라고 비난 당했지만, 카이엔은 '9회말 2아웃'의 위기에 처했던 포르쉐의 극적인 회생을 주도한 구원타자이자, 스포츠 SUV 장르의 개척자입니다.


스포츠카 밖으로 눈을 돌리다
포르쉐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928을 비롯한 여러 모델의 연이은 부진으로 오랫동안 경영난을 겪었습니다.

포르쉐의 찬란한 헤리티지를 보면 언제나 성공가도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사실 포르쉐에게도 힘든 시기는 있었습니다. 911의 꾸준한 인기와 모터스포츠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1970년대까지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엔트리 스포츠카 924와 야심차게 개발한 차기 플래그십 스포츠카 928의 잇따른 실패로 적자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나마 1980년대에는 벌어놓은 돈을 까 먹으며 버텼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개발한 2인승 로드스터 박스터(986), 그리고 수냉식 엔진과 현대적인 설계를 도입해 대중성을 높인 신형 911(996)이 잘 팔리며 가까스로 파산 위기를 넘겼지만, 업계에서는 "포르쉐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주를 이뤘죠.

벤델린 비데킹은 포르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르쉐의 생산 총괄을 거쳐 1993년 CEO 자리에 오른 벤델린 비데킹(Wendelin Wiedeking)이 깊은 고민에 빠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애물단지가 된 928과 968을 단호하게 단종시키고, 박스터와 수냉식 911 프로젝트를 주도해 포르쉐 회생의 단초를 마련했지만, 빠듯하게 적자를 면하는 수준으로는 거대 경쟁사들의 최신 모델과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개발비는 많이 들고 적게 팔리는 스포츠카 외에, 많이 팔아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차가 필요했습니다.

포르쉐의 세단 프로토타입 989. 훗날 출시될 파나메라의 원조 격입니다.

포르쉐 내부에서도 보다 대중적인 차를 만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습니다. 911이나 928 설계를 바탕으로 한 세단의 프로토타입을 만든 적도 있었지만, '퓨어 스포츠카 브랜드'라는 정체성을 흔드는 도전에 적잖은 열성 팬과 고객들이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특히 911의 아버지이자 창업주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아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 이사회 의장은 포르쉐가 문 네 짝 달린 차를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 페리 포르쉐가 1998년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데킹은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세상에 없던 포르쉐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차, SUV를 만들기로 한 것이죠.

90년대 후반은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여러 회사가 SUV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너도나도 SUV 만들기에 여념이 없지만, 1990년대는 이제 막 프리미엄 SUV 시장이 태동할 때였습니다. 프레임 바디의 투박한 오프로더 대신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해 가볍고 승차감도 좋은 도심형 SUV가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죠. 렉서스 RX, 메르세데스-벤츠 ML-클래스, BMW X5 등 프리미엄 브랜드들도 새로운 시장 개척에 막 나선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차종을 만들어 온 종합 제조사가 SUV를 만드는 것과, 창사 이래 줄곧 스포츠카만 만들어 온 포르쉐가 SUV를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노하우가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결정적으로 제로 베이스에서 새로운 세그먼트의 신차를 개발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데킹은 친척지간이나 다름 없었던 폭스바겐에게 SUV 공동 개발을 제안합니다.


폭스바겐과 함께 만든 첫 SUV
포르쉐와 폭스바겐은 같은 뿌리를 둔 만큼, 오랫동안 협업을 이어 왔습니다.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해 그룹 산하에 두게 된 건 한참 후인 2011년의 일이지만, 포르쉐와 폭스바겐은 오래 전부터 크고 작은 협업을 해 온 관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폭스바겐의 뿌리인 타입 1 '비틀'을 개발한 장본인이 포르쉐의 창업주인 페르디난트 포르쉐였고, 포르쉐의 첫 차인 356이 타입 1의 뼈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첫 베이비 포르쉐인 914, 그 후속 모델인 924는 개발 단계부터 폭스바겐이 깊이 관여했을 정도였습니다.


마침 폭스바겐도 SUV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두 회사의 협업은 쉽게 성사됩니다. 차의 기본 아키텍처 설계와 생산 라인을 공유하되 디자인이나 퍼포먼스에는 둔 각자의 SUV를 만들기로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폭스바겐의 PL71 플랫폼으로, 훗날 아우디까지 숟가락을 얹어 총 3종의 SUV가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하게 됩니다.

'UFO'라고도 불렸던 라이프치히 공장 본부 건물. 이곳은 포르쉐 첫 SUV의 고향이 됩니다.

기본 뼈대와 4륜구동 시스템은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에서 생산됐지만, 포르쉐는 적어도 최종 조립만큼은 독일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슈투트가르트의 추펜하우젠 공장은 대량생산 SUV를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기에 라이프치히에 새 공장이 지어집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반조립 상태의 차체를 전달받기 좋은 위치였을 뿐 아니라, 구 동독 지역의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카이엔의 디자인 스케치. 형제 모델인 투아렉과 달리 날렵한 D-필러 형상을 지녔습니다.

두 회사 SUV의 기본 설계는 대동소이했지만, 결과물은 꽤 달랐습니다. 우선 포르쉐로선 브랜드 첫 SUV가 너무 투박하고 지루해보이지 않길 원했습니다. 어짜피 스포츠카 브랜드의 SUV를 사는 사람이라면 실용성이나 적재 용량 같은 건 우선순위가 아닐 것이라 판단했고, 따라서 D-필러를 훨씬 예리하게 다듬어 스포티한 실루엣을 더했습니다. 전면부에는 911, 박스터와 디자인 큐를 공유하는 헤드램프와 거대한 흡기구를 배치해 "SUV의 형태지만 이 차는 포르쉐 스포츠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포르쉐 SUV는 투아렉보다 후륜에 더 많은 구동력을 배분하고, 강력한 V8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폭스바겐 투아렉이 전후 50:50의 구동력 배분을 통해 SUV 고유의 주행 안정성에 집중한 것과 달리, 포르쉐는 전후 구동력 배분을 38:62로 맞춰 보다 후륜구동에 가까운 거동을 더했습니다. 또 3.2L VR6 엔진이 주력이었던 투아렉과 다르게 포르쉐 SUV의 주력 엔진은 4.5L V8 엔진으로 정해졌습니다. 928에 탑재됐던 V8 엔진의 후신으로, 드라이섬프 윤활 방식과 수냉식 알터네이터를 채택하고 당대 SUV 중 최강인 340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했죠.

신차는 '포르쉐'이자 'SUV'였던 만큼, 오프로드 성능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고성능 스포츠카처럼 내달릴 수 있는 SUV였지만, 'SUV'인 만큼 오프로드 성능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ML이나 BMW X5와 달리, 포르쉐의 SUV는 감속비 2.7:1의 저속 기어가 탑재됐습니다. 또 지상고 조절이 가능한 에어 서스펜션과 오프로드의 불규칙한 노면에 대응하는 전자제어식 오프로드 ABS 브레이크 시스템이 탑재돼 험지 주파력을 높였습니다. 여기에 선택사양으로 리어 디퍼렌셜 록, 안티롤바 분리 기능, 언더바디 프로텍터 등이 제공됐습니다.

초기형 카이엔의 인테리어.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며지고 편의사양도 대거 투입됩니다.

포르쉐 최초의 '패밀리 카'이자 럭셔리 스포츠 SUV인 만큼 편의사양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고급스러운 가죽 마감재는 물론이고 GPS 내비게이션, 파노라마 선루프, 속도감응형 스티어링 휠, 풋 파킹 브레이크 등 다양한 옵션이 마련됐고, 루프 바나 루프 박스 같은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도 함께 준비됩니다.


회사의 명운을 걸고 새 공장까지 지어가며 만든 완전히 새로운 세그먼트의 차에 붙여진 이름은 카이엔(Cayenne). 프랑스령 기아나의 수도이자 그 지역에서 나는 매콤한 고추 카옌 페퍼(cayenne pepper)에서 따온 이름이었죠. 지루한 SUV가 아닌, 화끈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작명이었습니다. 카이엔은 그렇게 2002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변절자에게 쏟아진 비난, 그리고 성공
카이엔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잘 만든 SUV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카이엔은 시대를 크게 앞선, 잘 만들어진 차였습니다. 폭스바겐 그룹의 자본력으로 만들어진 최신 SUV 섀시를 스포츠카 엔지니어들이 예리하게 세팅했고, V8 자연흡기 엔진과 V8 터보 엔진이 마련돼 각각 최고출력 340마력, 450마력의 차고 넘치는 성능을 냈습니다. 온·오프로드 양면에서 뛰어난 주행 성능을 여과없이 드러냈고, 편의사양이나 고급감도 충분했죠.

포르쉐는 카이엔이 SUV 형태의 스포츠카라고 주장했지만, 마니아들은 그저 변절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정통 스포츠카 브랜드의 '도전'은 골수 마니아들에겐 그저 '변절'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박스터와 수냉식 911의 스타일 변신과 원가 절감에 쌓여 온 마니아들의 불만이 카이엔에서 터져버린 것이었죠.


박스터는 '신세대 포르쉐'이자 914의 후예라는 명분이 있었고, 공랭식 엔진을 포기한 건 환경 규제와 성능 향상이라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대중차 브랜드와 함께 만든 4도어 포르쉐, 그것도 SUV였던 카이엔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낯선 콘셉트에 낯선 외모를 지닌 카이엔은 전문가들에게도 혹평받습니다.

전문가들도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원형 헤드램프를 탈피한 박스터와 996의 디자인에 대한 평은 썩 좋지 않았는데, 그것이 몸집 큰 SUV에 적용되니 당시의 기준에서는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지금에야 재평가가 이뤄졌지만, 출시 당시에는 '가장 못 생긴 차' 랭킹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였죠.

세간에서는 카이엔이 철저히 실패하고 브랜드를 망하게 만들 거라는 저주가 쏟아졌습니다.

SUV 치고는 훌륭한 성능이었지만, 당연히 "포르쉐 치고는" 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골수 마니아들은 그런 걸 정상참작하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나온 결과물은 못 생기고 둔하며 전혀 포르쉐답지 않다는 혹평이 쏟아졌고, 영국 탑기어에서는 "멍청이들이나 살 만한 차"라고 맹비난했습니다. 카이엔 자체의 실패는 물론, 여기에 사활을 건 포르쉐조차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저주까지 들어야 했죠.

전문가들의 혹평과 달리, 카이엔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마니아와 언론의 평가가 항상 모든 소비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카이엔은 세간의 혹독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보란듯이 '대박'이 났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당시 시장은 프리미엄 SUV의 수요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젊은 신흥 부자들은 실용적이면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주행감각을 지닌 SUV를 원했고, 그 차가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포르쉐 뱃지를 달고 있다면 금상첨화였습니다.

카이엔은 포르쉐 판매량의 과반을 차지하며 스포츠카 개발을 위한 자금을 벌어들입니다.

카이엔의 판매량은 박스터와 911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고, 출시 첫 해에 미국에서만 1만 3,000대 가량이 팔리며 성공가도를 이어나갔습니다. 1년 뒤에는 투아렉에 탑재된 3.2L VR6 엔진 버전이 추가됐고, 쏟아지는 주문에 차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됩니다. 포르쉐 전체 판매량의 절반 이상이 카이엔일 정도였습니다. 미래 시장을 내다보고 SUV라는 새로운 세그먼트에 '올인'한 비데킹의 안목이 빛을 발한 셈입니다.


카이엔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은 포르쉐 스포츠카를 개발하는 밑천이 됐습니다. 2004년 출시된 911(997), 2005년 출시된 2세대 박스터와 1세대 카이맨(987)은 카이엔이 없었으면 완성되기 어려운 모델들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안정적인 자금 여건 하에서 개발된 만큼 우수한 완성도를 자랑했고, 판매도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포르쉐는 지독한 경영난을 탈출해 자생력을 지닌 브랜드로 거듭나게 됩니다.

2008년 출시된 페이스리프트 모델(957)은 디자인과 성능을 일신했습니다.

카이엔은 2008년 페이스리프트를 맞이합니다. 보다 공격적인 디자인과 현대화된 사양을 탑재하고, 엔진 라인업이 일괄 업데이트됩니다. 6기통 모델은 배기량을 3.6L로, V8 엔진의 S와 터보, 터보 S는 배기량을 4.8L로 늘렸고, 자연흡기 V8 고성능 버전인 GTS와 포르쉐 최초의 디젤 모델인 카이엔 디젤(2009년)이 추가되며 라인업 또한 확장됐습니다. 비록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판매량은 전기형 모델보다 적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인기를 끌며 2년 간 판매됩니다.

파이널 에디션인 '트랜스시베리아'. 2010년 카이엔은 2세대로 풀체인지를 맞이합니다.

1세대 카이엔은 2010년 2세대(958) 모델의 출시와 함께 단종 수순을 밟습니다. 첫 출시 당시만 해도 포르쉐의 포트폴리오에는 박스터와 911 뿐이었지만, 8년여가 지난 시점에는 박스터와 카이맨, 911, 그리고 포르쉐 첫 세단인 파나메라까지 패밀리에 합류했습니다. 카이엔의 성공이 포르쉐 브랜드를 살려냈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제는 SUV를 만들지 않는 브랜드를 찾기가 더 힘들 정도로 프리미엄은 물론 고성능 업계에서도 SUV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습니다. 이제 와서 결과론적인 이야기로 "SUV 유행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말하는 건 쉽지만, 20년 전, 그것도 반세기 넘게 스포츠카만 만들던 회사가 대뜸 SUV를 만드는 건 포르쉐 스스로에게도 크나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 카이엔은 어엿한 포르쉐 패밀리의 일원이자 구원자로 기억됩니다.

브랜드의 전통과 고유의 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새로운 장르에서 완성도 높은 차를 선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고, 비록 출시 당시에는 비난당했지만 이제는 명실상부한 포르쉐의 구원자로서 당당히 명차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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