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간혹 인적이 뜸한 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나 야생동물을 마주친 적 있나요? 이런 경우 대개 본능적으로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거나 운전대를 틀 수밖에 없습니다. 야생동물이 난입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각종 장애물이나 고장 차량, 포트홀 기타 돌발 상황을 급하게 회피하는 경우는 운전 중 종종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이동하는 하중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차량은 운전자가 의도하는 경로를 벗어나거나, 스핀을 하거나, 심지어는 전복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현대적인 자동차 설계에서는 사고 발생 시 탑승객을 보호하는 수동적 안전성(passive safety)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을 안정적으로 회피하고 원래의 경로로 안전하게 복귀하는 능동적 안전성(active safety)도 중시되는 추세입니다.
수동적 안전성을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각국에서 시행하는 신차 안전도 평가(NCAP)입니다. 흔히 '충돌 테스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다양한 사고 상황에서의 안전성을 실제 시험을 통해 평가하는 것이죠. 최근에는 다양한 첨단 주행 보조 기능까지도 NCAP을 통해 평가 받고 있습니다.
반면 차량 본연의 운동 성능, 전자제어장치의 빠르고 정확한 개입이 요구되는 능동적 안전성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속도, 조향각, 노폭 등 워낙 다양한 변수가 상존하기 때문인데요. 그나마 현재 시행되고 있는 평가 중 가장 체계화된 능동적 안전성 평가 방식이 바로 무스 테스트(moose test)입니다.
무스 테스트의 정식 명칭은 회피 기동 테스트(evasive manoeuvre test)입니다. 우리말로 말코손바닥사슴이라고도 불리는 무스는 북미와 유라시아 지역에 사는 사슴의 일종으로, 사람보다 큰 키에 체중이 600kg에 달하는 대형 동물인데요. 무스 테스트는 길에서 이 커다란 사슴을 마주친 상황을 가정하고, 급격한 회피 기동 시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테스트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고 귀여운(?) 고라니와 달리, 거대한 무스를 들이받으면 차가 망가지는 건 물론이고 인명피해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운전대를 틀었는데 차량의 급선회 안정성이 떨어진다면 2차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죠. 때문에 무스를 안정적으로 피할 수 있는 회피 기동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무스 테스트는 1970년대 스웨덴에서 처음 시행됐습니다. 처음에는 정확한 기준 없이 단순히 연속으로 차로를 변경해 장애물을 피하는 방식이었는데요. 능동적 안전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시절에는 그저 일부 자동차 전문지에서나 실시하는 가혹 조건의 특수 테스트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이 테스트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건 1997년 스웨덴 매체 'Teknikens värld'가 메르세데스-벤츠 A-클래스의 무스 테스트를 시행하면서부터였습니다. 갓 출시된 메르세데스-벤츠의 신형 소형차가 고작 60km/h로 회피 기동을 하다가 전복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심지어 수십 년 전 동독에서 개발한 구닥다리 트라반트조차 같은 속도에서 무사히 통과를 했는데 말이죠.
이 사건으로 1세대 A-클래스의 안전성 논란이 불거졌고, 처음에는 결함을 부정하던 메르세데스-벤츠는 결국 이미 판매된 차량을 모두 회수하고 전자식 자세제어장치(ESP)를 기본 장착해야 했습니다. 세계 최정상급 자동차 회사가 이 테스트 한 건으로 당시 28억 마르크(한화 약 2조 5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하는 곤혹을 치른 것입니다. 또 이를 계기로 자세제어장치의 효용성이 밝혀지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자동차가 자세제어장치를 기본 장착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무스 테스트는 단순히 사슴을 피하는 테스트가 아닌, 자동차의 능동적 안전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치러지던 테스트의 정확한 평가 기준을 세우기 위해 오늘날에는 테스트 코스를 국제 규격화하기에 이릅니다(ISO 3888-2).
현재는 표준화된 코스에 맞춰 세계 각지에서 출시되는 자동차들이 무스 테스트를 치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건 스페인 'km77'의 테스트 결과인데요. km77은 동일한 코스에서 조금씩 속도를 높이며 여러 번 반복 테스트를 시행한 뒤, 차종 별로 코스 외곽의 라바콘을 넘어뜨리지 않고 통과하는 가장 높은 속도를 공표합니다.
요즘 차들은 성능과 품질이 상향평준화 되면서 과거보다 월등한 주행 안정성과 고성능 타이어, 전자제어장치를 기본 사양으로 탑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차들의 경우 웬만하면 70km/h 전후의 속도로 어렵지 않게 코스를 통과하는데요. 그런 와중에도 종종 저조한 기록을 보이는 차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가령 2012년 7월 스웨덴에서 시행된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무스 테스트에서는 한 쪽 바퀴에 쏠리는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여러 대의 차량으로 반복 테스트를 했음에도 똑같은 문제가 하면서 지프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국산차 중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낸 경우가 있었습니다. 쌍용 티볼리 에어는 지난 2016년, 테스트 도중 스핀하며 자칫 큰 사고를 낼 뻔했습니다. 원인은 ESP의 고장으로 밝혀져 이후 정상 차량으로 재평가가 이뤄졌는데요. ESP가 고장났음에도 경고등이 점등되지 않아 비판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예상 밖의 뛰어난 기록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트로엥 잔티아 악티바(Xantia Activa)는 1999년 표준 코스가 제정되기 전 무려 85km/h로 코스를 통과한 기록을 세웠고, 지난해 표준 코스에서 치뤄진 재평가에서도 73km/h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전자식 자세제어장치가 없음에도 유압식 액티브 서스펜션 덕에 최신 모델과 대등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죠.
이름처럼 단순히 "사슴을 피하는 테스트"라고 생각한다면, 무스 테스트가 일상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는 극단적인 평가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차량의 결함이나 문제점을 밝혀내고 보다 안전한 도로를 만드는 데에 무스 테스트가 기여한 바는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더 우수한 안정성을 지닌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무스 테스트의 공이 컸습니다.
물론 아무리 무스 테스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차라도, 가장 중요한 건 운전자가 안전하게 모는 것이겠죠? 최근 따뜻한 봄날씨와 팬데믹 종식 분위기에 도로 위의 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잊지 말고 안전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