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은 냉장고 안에 있다

다섯 살, 마음 내비게이션이 이끄는 시간여행

by 엄마의 왈츠

아이가 다섯 살이었을 땐, 몸과 마음의 성장은 느렸지만 호기심 레이더만큼은 총알보다 빨랐다. 아빠가 없어진 아이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나는 '따뜻한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아이의 말도 안 되는 실험 정신과 모험으로 매일 전쟁터가 되곤 했다.



"엄마, 또 냉장고 안에 들어가고 싶어!"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참 특이했다. 거실 한편에 자리한 회색 냉장고는 아이에게 상상의 집이자, 타임머신이었다.



놀이를 시작하려면 냉장고 안의 모든 음식과 선반을 꺼내야 했고, 놀이가 길어지면 반찬이 쉬거나 냉장고가 고장 날 때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유년 시절을 떠올릴 때 반짝반짝 웃음 나는 기억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



왜냐하면—그 '왜냐하면'이란 단어 속에 내 모든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발달이 느렸고, 이혼 트라우마가 있었으며, 나는 언제나 마음속에 묵직하게 '내 책임'이란 반성문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 무거운 책임감이 나를 '완벽한 엄마'로 만들려 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지친 엄마였다.



어느 날, 또다시 냉장고 타임머신을 타게 된 우리. 아이는 나를 특별한 승객으로 초대했다.

"안녕하세요. 사랑이 타임머신입니다. 엄마 손님은 어느 시간으로 갈 건가요?"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한 마디가 지나갔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엄마도 태어나지 않았던 아주 오래전 어떤 시간으로요...'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서 영혼이 반쯤 나가 있던 그 시기, 내 머릿속 생각에 깜짝 놀라 몇 초를 조용히 있었을까. 내 대답을 기다리던 아이가 나를 쿡 찌를 때야 정신이 돌아왔다.



"네, 사랑이 선장님! 공룡 시대로 갑시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우리의 상상 속 타임머신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아이는 공룡 소리를 내며 냉장고 안에서 뛰었다.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냉장고 안의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흘렀다.



"엄마, 이제 공룡 시대 여행 끝!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냉장고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날의 놀이는 저녁 준비로 자연스레 마무리되었다.



아이의 말은 예고 없이 맞닥뜨리는 압박 질문 같아서 진땀이 흐를 때가 많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내 마음상태를 비춰주고, 번뜩이는 섬광처럼 나를 깨운다.




정신 차리라고! 여기,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나랑 놀자고, 끊임없이 안내하는 마음 내비게이션이 된다. 그 '왜냐하면'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해주는 순간들.




이따금 옛 사진을 보며 지금 훌쩍 커버린 십 대 아이를 사진 너머로 훔쳐본다. '네 말이 맞았구나. 그때 그 순간이 정말 보석 같은 순간이었구나.'



오래된 사진 속에는 선반조차 없이 텅 빈 냉장고 안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웃음 뒤에 숨어있던 나의 고단함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타임머신


그럼 지금도 지나 보면 그렇겠지? 사진을 보는 내게 다 큰 아이가 묻는다. "엄마 뭐 해? 내가 이렇게 놀았다고?" 자기도 머쓱한지 웃어버린다. 더 이상 우리가 냉장고 안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냉장고는 반찬을 보관하는 충실한 가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식사 준비하느라 냉장고를 열 때 가끔 옛 놀이가 떠올라 웃게 된다.



십 년 전 아이와의 순간과 연결시켜 주는 진짜 타임머신이 되어버렸다. 잊지 말자,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종종 가장 소박한 곳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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