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월도 기행
달빛 어우러 고요한 섬
자월도를(紫月島) 그리다
이 도 연
신년 기획 세 번째 오늘은 자월도를 가는 날 새벽이 희뿌옇게 다가와 하루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아직 이른 새벽 시간임에도 커튼 사이로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작은 소음과 버무려지면서 방안으로 드문드문 들어와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다 사라지곤 한다.
새벽잠에서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기지개를 켜는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참 많은 것 같다.
새벽 공기에 묻어나는 싸늘한 한기에서 아직은 건재한 동장군의 위력을 느끼며 자라목이 된다.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의 소음은 어둠이 잔뜩 묻어나는 도로 위를 가파르게 오르내리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헤드라이트 불빛을 직선으로 길게 그리며 다가와 멈춘다.
여행의 성급함인지 출발 시간보다 한참 앞서 도착한 연안여객터미널 건물이 커다란 그림자처럼 어둠 속 깊게 드리워져 있다. 여행의 장도에 오르는 여행객들은 새파란 공기를 깊이 호흡하며 들어선다.
입김이 하얗게 안경 위로 뿜어져 올라오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다가와 고막에 부딪혀 이내 소멸한다.
인적이 드문 새벽 도로를 달려왔건만, 이곳은 벌써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 많은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갈까?
뿌리 없는 부표처럼 대양을 떠도는 어류가 되어 물길 끝에 떠도는 섬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하다.
아니 그곳이 섬이든 산이든 길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은 언제나 미지의 그곳에 먼저 성급한 정착을 한다.
승선을 알리는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개찰 중이라는 문자를 따라 익숙하게 발길을 욺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벌써 한두 차례 해본 경험은 사람을 느긋하고 편안하게 한다.
코리아 피스 호의 크게 벌린 입으로 줄지어 들어서는 사람들 모습이 마치 자월도 앞바다에서 잉태할 치어갔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혼자만의 실없는 웃음을 희미하게 지어본다.
뱃머리에서 바라보는 겨울 바다는 차갑게 얼어 있으며 아침 햇살은 선홍색 빛의 입자를 잘게 부스며 밝아온다.
수선스러운 여객터미널과 다르게 적요의 바다는 투명한 유리잔이 살며시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로 부드럽게 찰랑이고 가느다란 물비늘을 일으키며 흐르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배에서 바라보는 겨울 바다 풍경은 해변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별과 재회, 떠남과 환송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는 입장에서 바다의 표정도 다르게 보이나 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별과 재회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바다의 시간은 멈추어 있는 듯 천천히 흐르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형상들을 소환하면서 붉게 울고 있는 아침 바다는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잔잔한 수면의 고요와 정적을 흔들며 배는 미끄러지듯이 원양의 바다를 지양하는 전사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팔미도 등대를 지나 영흥도 발전소 풍경을 바라보며 수면 위를 날아가듯 얼마나 달렸을까? 한 무리 갈매기가 소란스럽게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저 멀리 달바위 선착장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온 여객선의 노고를 아는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드디어 배는 인천에서 자월도 선착장에 닻을 내리고 필자는 연안 부두에서 32km 거리를 약 50분을 달려 시공의 대양을 건너 자월도 땅에서 돛을 올렸다.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다.
자월도 지명은 원래 소홀도라 불리었는데 조선시대 세곡선을 운반하던 조운선이 폭풍우를 피하고자 섬에 머물 때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마음에 조급한 아전이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니 검붉은 달빛이 교교하더라! 하여 자줒빛 자紫 달월月 자월도(紫月島)라 부르고 선착장 이름이 아전이 달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달바위 선착장이 되었다.
선착장 풍경은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오래전 왔다 갔던 자월도 선착장은 생경한 풍경이다.
누군가는 선착장에서 뭍을 동경하며 떠났고 주인 잃은 빈집들이 여기저기 힘을 잃어 가며 세월과 덤불 속으로 풍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섬은 누군가에게는 돌아올 고향일 것이다.
여행객은 발자취만 남기고 떠나면 그뿐일지 모르나 왠지 섬이라는 단어 앞에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선착장에 내리자, 정면에 "자줏빛 자월" 간판을 이고 있는 작은 섬 박물관이 인상적으로 들어오고 달바위 바다역을 기웃거려본다. 선착장 터미널 이름을 멋지게 붙여 놓았다. 고개 위로는 달빛 프러포즈 데크가 여행의 시작점을 알린다. 해안가에 한 무더기 커다란 바위에 전망대가 보인다.
이곳은 어부 인 남편이 커다란 지네에게 물려 죽자, 남편을 기다리던 어부의 아내도 바다로 뛰어내려 죽었다는 열녀 바위 전설이 전해진다.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을 외면하고 우측 해안을 끼고 자월도 두발로 여행을 시작한다.
갑진모래해변이 넓은 자월도의 앞바다와 맞닿아 있고 물길로 만들어진 갯벌의 문양을 바라보며 아이의 하얀 살결같이 포슬포슬한 백사장 해안선을 따라 걷는다.
사구를 걷다 보니 십수 년 전 여름, 이곳에 여름휴가 차 야영을 했을 때 환영이 밀려온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위태로웠던 순간이 천둥처럼 생각난다.
한낮에는 분명하게 맑게 갠 하늘에서 햇살이 폭포처럼 내리던 상쾌한 날이었건만, 밤사이 폭풍이 불어닥치면서 텐트가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자다 말고 텐트가 물에 잠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했던 순간이었다.
해변에 도착해서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어눌하게 말하는 노파가 이곳에 텐트를 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장소가 너무 좋아 보여 설마 하고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기도 했다.
자다 말고 부지불식간에 당했던 일로 잘 곳이 없어져 당황스러웠다. 마침, 마을 위에 케이티 기지국 안테나가 보여서 무작정 올라갔다. 물에 젖어 솜뭉치가 된 짐들을 둘러메고 언덕을 한참 올라가 케이티 직원이라고 말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주재원이 따뜻하게 반겨주며 손수 잡은 생선으로 매운탕까지 맛나게 끓여준 마음씨 좋은 동료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은 퇴직했을 테지만. 온정을 베풀어준 그 동료는 폭풍이 몰아치던 이십여 년 전 여름날 밤을 기억하는 줄 모르겠으나 잘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추억과 기억이 겹치는 자월도에서 지금은 편안하게 해변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감회가 새롭다.
국사봉(178m)이 품은 분지에 해풍을 피해 둥지를 튼 어촌 풍경은 정갈하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으나 뭍에서는 잊힌 것들이 이곳에는 시간이 멈추었는지 할머니의 할머니가 쓰던 물건 하며 흙벽 뒤켠 시렁에 매달려있는 멍석과 쌀키, 대바구니와 어구는 오래 묵어 손때 묻은 물건들과 섬의 풍경이 되어 공존한다.
섬의 풍경은 눈으로도 다가오지만, 소리로도 냄새로도 여행객을 자극한다.
시골집 아궁이 군불이 피고 타닥타닥 장작이 불똥을 튕겨내며 타들어 가는 소리, 굴뚝에는 솔향 가득한 연기가 피어오르면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이 가마솥에 익어가고 구수한 누룽지 냄새는 덤으로 풍겨온다.
갑진모래해변 끝에서 만난 넓은 도로는 섬 중앙을 가로지르며 넘어가는 하이웨이 같다고 생각하며 목섬을 향해 경사진 도로를 올라간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목섬이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갈 듯 위태롭게 보인다. 섬의 섬 끝에 자리 잡은 작은 목섬은 가늘어 보이는 구름다리 끝을 붙잡고 검푸른 파도에 온몸을 마주하고 있다.
국사봉 178m 가는 길 아래 반달 모양의 하늬깨 해변이 동화 속 나라의 그림 같은 모습으로 속눈썹을 짙게 드리운 여인의 눈썹처럼 지긋이 내리깔고 있다.
섬과 바다가 빚어내는 풍경이 저토록 아름답구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척박한 삶의 터전일지 모르나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며 먼 훗날 추억해야 하는 아름다운 절경을 가슴에 그린다.
178m 국사봉은 파란 하늘 아래 손이 닿을 듯 보이지만 해변에서 바로 오르는 급경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게 한다.
북벽 능선에 남아 있는 잔설에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갈 무렵 국사봉 끝자락에 작은 돌탑처럼 만들어진 봉수대가 정상임을 알린다.
정상에서 바라다보이는 주변의 섬들이 흐릿한 바다 건너 그림자처럼 떠 있다.
승봉도 이작도를 비롯한 덕적군도 섬들이 파도를 밀고 당기며 시선을 끌어당긴다.
국사봉 봉수대는 조선 후기에 설치된 것으로 납작한 돌로 넓은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반원형으로 축조하였으며 벽면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놓은 것으로 볼 때 봉수대 이외의 용도로도 쓰였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봉화는 먼바다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덕적도를 기점으로 자월도를 지나 대부도를 건너 문학산성을 연결하는 빛과 연기의 통로이자 길이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적의 침입은 사나웠으며 피어오르는 봉화는 다급했을 것이고 날이 흐린 날의 봉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섬과 섬을 연결하려는 심정은 간절했을 것이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한 절실한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봉화의 꿈을 꾸며 장골해수욕장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는다.
아득하게 보이는 섬들은 말이 없고 잔바람에 몸을 흔들어 출렁이는 바다는 태고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어서 오라고 어서 가라고 이곳의 산과 바람은 외롭지 않다고!
자월도 해변과 능선에 발자취를 남기며 여행객은 길 위에서 행복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얀 눈발을 헤치고 포구로 다가오는 고속 폐리를 정물처럼 바다에 걸어 두고 또 다른 여행을 위해 나그네는 오늘도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