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 기행
"내장산 내장사"
그 겨울은 동안거 중
이 도 연
내장산 하면 가을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던 아기단풍 절정이 먼저 떠오른다. 내장사 가을이 무르익어 스님들 선방 앞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 위 가을로 물들어가는 알록달록 단풍이 떨어지는 풍경을 화폭에 그려 넣는다.
하지만, 겨울 상고대 또한 가을 풍경 못지않게 아름답다.
내장산 겨울 산의 적막함이 좋다.
번잡하지 않고 단조로워서 좋고 침묵으로 깊어지는 고독은 더욱 좋다.
편안하고 고요한 선방 고즈넉한 외로움이 묻어나는 헐거운 계절을 지나 겨울 설산 내장산은 어떤 풍경일까! 겨울 품에 안겨 묵언으로 동안거에 들어가 인적이 끊어진 내장산 내장사 겨울을 찾아 떠나는 새벽이 성급하게 다가온다. 수선스러운 발걸음은 또 다른 호기심으로 설산의 풍경을 마음에 담으려는 여행자의 마음이 두근거린다.
현관을 나오자, 새벽 골목의 파란 바람과 몸을 감싸고 있던 더운 바람이 뒤섞이면서 주춤거릴 때 찬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어 온다.
그토록 극성이던 입춘 추위가 살짝 누그러지긴 했어도 새벽 찬바람 속에 녹아 있는 빙하의 기운이 서늘하다.
온몸 솜털에서 정전기가 일어나고 몸속을 휘감아 도는 혈관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숨을 쉴 때마다 끓어오르는 주전자나 담배 연기처럼 심장에서 덮인 수증기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 홀로 일어나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일 뿐, 이미 길에는 생업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산내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의 발걸음 소리가 여기저기 분주히 움직이는 암청색 새벽이 발밑에 밟힌다.
전문가나 학자 입장에서 여행은 이런 것이라 하고 사전적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굳이 정의한다면 호기심 가득하고 부지런한 자만이 여행을 기획하고 진정 용기 있는 자만이 실행을 통해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은 또 다른 용기를 만들어가는 공작소이다. 즉 용기 있는 자만이 모험을 즐기고 여행을 통하여 용기는 배가되어 체험의 세계로 나간다.
선의적인 일탈이 여행자를 부추기고 여행을 통해 자연의 품에 안겨 태고의 만물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은 경이로운 성스러움 이자 자연에 동화되는 숭고하고 선한 마음이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라 칼바람이 불어와 살을 에는 척박한 바위투성이 갯벌 굴밭에서 만나는 노파의 굽어진 허리를 바라보는 일이다.
여행자의 시선에 걸린 사무치게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산과 바다와 인간의 사투는 비정하다. 거칠어진 손마디로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사람들. 부리로 강과 바다를 휘젓는 저어새처럼 끝없이 산과 바다를 누비며 몸을 사리지 않는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조우하는 일이다.
여행자의 눈이 아닌 현실을 보는 시선이 때로는 여행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들의 진솔한 삶 속으로 녹아들어야 진정 여행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풍경 이면에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여행이 가르쳐 주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만이 수도자의 고행처럼 참 진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군산을 지나자 드넓은 호남평야 지평선을 배경으로 기러기 떼가 편대 비행을 한다.
끼룩끼룩 저들만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DNA에 저장된 기억장치를 가동하며 날아간다.
하늘길은 기러기 날아가고 땅의 길과 길이 겹치고 풀어지면서 길의 끝자락에 내장산 이정표가 걸려 있다. 먼발치에 펼쳐진 내장산 설산 풍경은 평화롭고 안락하다.
정읍과 순창군을 아우르며 이어지는 능선은 느리게 누웠다가 가파르게 일어서며 전남북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어 도시와 도시를 구획하고 경계를 만들어 낸다.
경계는 풍경 속으로 치환되면서 풍속과 삶의 방식을 다르게 하고 같은 언어와 다른 문장이 산맥 속으로 녹아들어 삶의 방식을 달리하기도 한다. 경계의 의미는 엄중하며 무겁다.
서로 다른 물길을 만들어 내며 장엄하고 도도한 섬진강 원류가 되고 생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내장산은 이름만으로도 다정하고 정겹다. 산과 산들의 음영이 겹치면서 불출봉, 서래봉을 지나 주봉인 신선봉(763.5m)을 중심으로 문필봉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 능선이 풀어지며 내장사를 둥지처럼 품에 안아 병풍을 두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장저수지에 회색빛으로 내려앉은 산의 음영이 잔물결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내장사 주차장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시공을 초월해 조선 8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여행자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우화정 맑은 물에 마음을 씻고 명경지수 청정옥수을 시선에 품으니 참으로 눈이 싱그럽다.
내장사 일주문을 바라보며 좌측 연자봉으로 길을 잡아 설산의 가파른 벼랑 앞에 선다.
산맥과 산맥이 가까이 다가서고 문명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여 연자봉 중턱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한다. 발아래 설산 속눈을 내려다보며 아득한 산맥 심장을 향해 오른다.
설산 풍경에 펼쳐진 마른 참나무, 밤나무 우듬지에 겨우살이가 지천이다.
겨우살이의 기생은 높은 가지 끝에서 위태로우나 바람 앞에 자유롭지 못하고 뽕나무, 참나무에 의탁하는 그들의 삶은 척박하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겨우 한 해를 살아간다.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 눈발은 골짜기 깊은 곳에 쌓이고 산을 오르는 여행자의 발등으로 쏟아져 내린다.
겨울로 성그러진 폭설로 길은 온통 무아의 투명한 세상이 되었고 여행자는 눈 속에서 헤매는 방랑자가 되었다.
길옆을 조금 벗어나면 무릎까지 발이 푹푹 빠지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으로 온몸의 균형을 잡고 오르고 또 오른다.
아무리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호흡이 거칠어져 가는가 싶더니 드디어 연자봉 정상이다.
연자봉 정수리로 파란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탁 트이며 온 천하가 눈에 들어올 듯 상쾌하다.
산맥과 산맥 사이로 실금 같은 길이 이어지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 실핏줄같이 뻗어 있고 골짜기로 흘러내린 물줄기가 사람을 키우고 살리는구나. 내장저수지 맑은 물이 귀한 보배가 따로 없다.
저 멀리 호남평야의 드넓은 곳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며 은빛 평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연자봉을 중심으로 장군봉과 신선봉이 날개를 펼치는 형국이라 하여 연자봉이니, 이곳이 바로 명당이로다.
태고의 설산 모습으로 우뚝 솟아오른 주봉인 신선봉이 말 그대로 신령함이 묻어난다.
그간에 내린 폭설로 비탈마다 눈이 한가득이다.
인간의 오만은 자연 앞에 부질없는 치기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기에 눈으로 담과 가슴으로 품어 하산을 결정한다. 대자연의 위용 앞에 고개 숙이고 겸손을 배웠으니 이 또한 참 잘한 일이다.
인생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선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천천히 또 천천히 삶의 끝자락을 향해 내려가는 평안함은 그런 것이다.
등산로 입구를 돌아 내려와 내장사 입구로 부지런한 발걸음을 옮긴다.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과 금강역사를 만나는 순간 아미타불의 불력에 주눅이 들어 속세에 더럽혀진 마음을 사찰 앞 개여울에 씻어 흘려보낸다.
대웅전 소실로 절간은 침울하고 허전하다. 내장사 수도승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만으로 불을 질러 사라진 대웅전은 허망하고 허탈하다.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사라진 대웅전은 간데없고 범종의 울림은 힘을 잃어 서럽고 빈터에는 분주한 대목장의 망치 소리만 산사를 흔든다.
불에 탄 내장사 대웅전 중수 작업이 한창이다.
백제 무왕 때 영은조사는 절을 지었고 수도를 하였으나, 정유재란에 불타고 한국 전쟁에 불타서 울었는데 최근에 수도승의 불만으로 다시 불타서 또 울었고 나도 울었다.
세속과 내세는 무엇이고 불도의 경계는 어디에 닿았는지 알 수 없으나 수도승의 배교는 믿음이 가지 않아서 대웅전은 또다시 화염에 싸이고 화엄의 세상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은 멀고멀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염원으로 대웅전 중수를 기리며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다.
내장산 주변에 유명한 불토의 도장 백양사가 있다.
전라도라 그곳에 가면 산은 내장산이요 사찰은 백양사라 했거늘 내장산에 갔다 백양사를 들르지 못했으면 내장산 다녀왔다 하지 말라 하였으나, 자연 앞에 어찌 우열이 있을까! 내장산 설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사리사욕(私利私慾) 내려놓은 철인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 현인이 되어 무아의 경계를 꿈꾸었으면 족한 것을, 또 다른 시간 속에 아쉬움을 묻어놓고 훗날을 기약한다. 백양사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가슴에 묻어 발길을 돌리다.
새벽을 밟고 지나온 시간을 접어 과거로 편입한다. 숙련공의 일상같이 매일이라는 하루의 일정한 풍경과 마주하고 저녁노을이 들과 산을 지나 바다로 스며드는 장엄한 과정을 하루로 정의한다.
사람의 일생 또한 하루와 하루가 겹치며 생로병사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살아 있는 만물의 것들과 다르지 않아 생명의 이치 또한 거스를 수 없음이다.
커다란 느티나무 가지에 걸린 저녁노을이 나무를 온통 태워버릴 기세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루가 여행자의 발끝에서 저물어 간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던 것을 멈추고 조금은 느리고 천천히 걸어도 좋다고 자연은 끊임없이 가르치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바쁘다 바빠!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아온 순간들, 왜 그랬을까? 자문해 본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삶의 무게가 힘겹다는 핑계로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조차 없이 세월을 살아간다.
이제는 안다.
반백의 세월을 지나 쌓여가는 나이와 짧아지는 생의 끝자락에 서 있다는 것을, 여행이 가르쳐 주는 매 순간이 기쁨으로 충만했다는 사실은 더없이 감사한 세월이었다. 이 겨울 내장산 내장사는 깊은 묵언 속에서 동안거 중이고 그림자만 남겨두고 뒤돌아서는 여행자의 깨달음은 갈 길이 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길 떠나고 돌아갈 곳이 있으니 잘 살고 있다고 위로해도 좋다.
산은 진중하니 무겁고 노을은 산하로 저물어 오늘이라는 이정표가 시간 속으로 시나브로 풍화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