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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 그 섬으로 간다

덕적도 기행

"덕적도"
그 섬으로 간다

이 도 연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다.
어제 늦은 행사에 몸이 무거워 그런지 밤잠을 설치며 새벽을 맞이한다. 밝음과 어둠이 겹치며 내려앉은 어시장 새벽 모닥불을 등에 지고 떠나야 하고 돌아와야 하는 연안여객선 대합실 풍경을 그려본다.
정월의 한파가 세상 모든 것을 빙하기에 접어든 고대 도시처럼 꽁꽁 얼어 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또 어디론가 가야하고 그들만의 발걸음이 분주함으로 여념이 없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이라는 단어는 늘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지만, 바다 건너 아득하게 먼 곳이라는 생각에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목적지 같기만 하다.
바다 건너 그곳에 사람이 산다.
유년 시절 섬의 질감은 가깝고도 먼 그리움 같은 낭만이 있는 풍경으로 동화책 여백을 장식하는 보물섬처럼 다가온다.

자연이 빚은 갯벌의 드넓은 풍경이나 해풍에 몸을 실은 낙락장송 푸른 해송이 우거진 이국의 섬들이 파도에 밀려오는 원양의 바다를 동경하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바다는 꿈이었고 동경이었다.
먼바다 소식을 전하는 해 질 녘 노을 앞에 서면 거역할 수 없는 숨 막히는 노을빛에 눈부신 황홀경을 마주하곤 했다.
바다는 섬을 품에 안고 섬은 바다를 밀어 내면 저 멀리 섬이 있다.
오늘 섬으로 간다.
바다는 넓고 섬은 수평선 너머 미지의 대륙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삶의 터전 그곳에 사람이 산다.

연안여객터미널
암청색 바다가 새벽 공기와 버무려지면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눅진하게 젖은 바다에서 염분에 짙게 절은 바다 냄새가 난다.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냄새가 아침 공기를 무력하게 밀어붙이며 태초에 인류의 기원이 어류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태고의 냄새가 짭조름하게 진동한다.
싫지 않은 생동감이 바다를 향한 달뜬 마음을 부채질하듯 코끝을 자극하며 시나브로 무감각해진다.

어느 섬으로 무슨 사연을 전하러 가는지, 새벽 졸음에 노곤한 몸을 이끌고 나온 사람들로 분주하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연안여객터미널 풍경이 정겹다.
모바일 승선권을 제시하고 뱃머리에 올라선다.
고려 고속페리의 날렵한 모습이 물 찬 제비처럼 미끈하게 빠졌다.
8시 30분 정시에 배는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를 우렁차게 울리며 1시간 50분 덕적도를 향한 장도에 양 날개를 활짝 펴는 새처럼 두 개의 고속 스크루를 회전한다.
일렁이는 바다 위로 아침노을이 풀어지며 눈 분신 황금빛 물결이 남항부두를 적시고 있다.

멀리 보이는 인천 대교의 주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위용과 바다 끝에 닿을 듯 길게 이어진 다리는 수평선과 나란하게 섬과 섬을 지나 뭍과 뭍을 이어서 또 다른 세계로 다가서고 다리 위를 지나는 자동차는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고속페리는 도시와 사람의 흔적을 천천히 지우며 망망대해에 독야청청 일엽편주 떠간다는 생각에 젖을 무렵 우리나라 최초 등대이자 인천상륙작전의 상징과도 같은 팔미도 등대가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바다 위의 경이를 경험하는 일은 여행이 주는 행복한 순간이다.
후미의 스크루에서 감아올리는 물살의 포말을 거칠게 일으켜 세워 바다를 휘저으며 배는 앞으로 질주하지만, 파도가 잠든 승선감은 잔잔한 파도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고속페리는 커피잔의 미동도 숨죽인 정중동 움직임이 없는 듯 고요의 바다를 지나 시간을 밀어내며 덕적도로 향한다.

갈매기가 수평선을 길게 선회하며 궤적을 그리며 먼저 마중을 나왔다.
겨울산을 가득 메운 해송을 머리에 이고 반원의 둥지를 튼 새집처럼 도우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햇살 가득 내려앉은 아늑하고 안온한 도우 선착장에 닻을 내려 덕적도에 첫발을 내디딘다.
붉은 등대가 백악기에 솟아오른 기암괴석을 병풍 삼아 아름다운 풍경으로 여행자를 반긴다.

정월의 섬은 인적이 끊어진 어촌마을 풍경으로 육지와 섬은 구별하기 어렵고 어색하지 않아서 발밑에서 밀고 당기는 파도만이 섬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덕적도와 형제처럼 나란하게 소야도가 연륙교 하나로 서로를 결박하고 형제 섬으로 어깨를 마주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우라는 지명은 덕적도에서 소야도로 나룻배를 통하여 물동량이 이동하는 길이라는 의미로 도(道)라 한 것이 오늘의 지명이 되어 도우라 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덕적도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바닷길을 여는 관문으로 지정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수년 전 방 운했을 때 선착장에 늘어서 있던 경운기를 타고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던 시절은 아마도 구석기 시대였나 보다.
지인의 아버님을 따라 덕적도 근해 어장에 나가 미리 쳐놓은 그물을 당기던 추억이 오래 묵은 그림자처럼 아련하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던 게와 각종 해산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신이나 그물을 당기던 것도 잠시 노동이라는 단어가 어깨를 누르고 힘겨운 어부의 삶을 느끼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한 경험이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어부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안타는 것을 경험한 귀중한 체험적 순간이었다.

경운기 대신 녹색 마을버스를 타고 이름도 예쁜 밧지름해변을 지나 마을버스로 15분 거리의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서포리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풍경 품에서 시원한 해풍이 불어온다.

서포리해수욕장을 뒤로하고 해발 292m 비조봉 정상을 향해 들머리를 잡는다.
초입부터 급경사에 서설의 흔적이 흩어져 있는 눈길은 좁은 통로를 내어주며 조릿대 군락이 밀림을 이루고 있다.
응달진 곳에 태고의 발자국 위에 나를 남기며 여유로운 발걸음을 걷다 보니 어느새 가파르게 올라서는 고샅길 앞에 호흡이 거칠어진다.

구불구불한 능선을 돌아올라 힘겨운 목소리를 토해낼 즘에 그래 이 맛에 산행하는 거지, 정상에 고풍스럽게 지어진 팔각정에서 동서남북 풍경을 즐기며 절로 감탄을 연발하는 일밖에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섬과 바다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고 시야에 가득 담긴 풍경에 마주 서 도가의 신선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다.

2시간 바닷길을 달려와 비조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덕적군도의 섬들은 해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마치 신선들이 사는 낙원의 모습으로 흩어져 있다.
소야도, 백아도, 굴업도, 흑도, 문갑도, 선도, 지도, 소이작도, 사승봉도. 눈앞에 펼쳐진 덕적군도의 황홀경에 취해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린다.
섬과 섬들 사이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은빛 물비늘이 눈부시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인 이치가 그러하듯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
아직 녹지 않은 눈길 사이로 갈잎 낙엽을 밟으며 하산 길에 만나는 집들은 납작 엎드려 옹기종기 모여 해풍을 피하며 늘어서 있는 모습이 정겹다.
아직 이른 섬마을의 비수기에 식당들은 문을 닫은 곳이 많지만, 선착장 옆 "뻘집 "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식당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장의 안내를 받으며 바지락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은 오늘의 행복이 따로 없다.

올해 얼마나 많은 인천의 섬들과 조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한발 다가설 수 있을까?
행복한 표정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신년 초행의 덕적도 섬긴 행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행의 시작은 머무르는 곳에서 길을 떠나면 돌아갈 곳이 있어서 여행이라 했던가! 새벽달을 등에 지고 어둠을 밟으며 떠나온 그곳으로 내일의 바닷길을 기대하며 고속페리의 아늑한 품속에서 나른한 오수를 즐기며 망망대해에서 자지러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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